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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달 Jul 29. 2022

버리는 건 쉽나요

익명의 U에게 - 여름의 단편

문득 내 교실 속 짐을 정리하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버리는 건 참 어렵다고요. 분명 언젠간 쓸 것이라 생각해 차곡차곡 잘 정리해 챙겨놨는데

막상 나중에 보면 '앞으로는 쓸 일 없어.'라고 생각하며 쓰레기통에 버리는 나를 발견해요.


역시 버리는 건 참 어려워요. 그리고 쉬웠어요.


그러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버리는 것과 잊는 것 사이에는 어떤 관련이 있을지.

버리는 게 더 쉬울까, 잊는 게 더 쉬울까 생각을 하다가

어쩌면 이 둘은 비슷한 것이 아닐까 하다가 아니 다를까 하다가

그러다가 결국 내 결론은 난 모르겠다, 였어요.


내 생각은 항상 이래요. 뻗어가던 가지가 어느 시점에서 문득 뚝 멈춰 서요.

더 이상 자라나지 못하고 그렇다고 꺾이지도 못한 채. 짓다가 돈이 없어 멈춰버린 건축물처럼

그 흉흉한 모습 그대로 노을 지는 하늘을 배경 삼아 우뚝 서 있지요.

그게 내 생각이에요. 하지만 그게 바로 나라는 사람을 나타내는 단편이라면 그건 또 조금 웃기네요.

사실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니거든요. 아니 나는 사실 그런 사람일까요.


달리는 택시 안에서 눈앞의 푸른 나무들과 완만한 경사를 가진 오름 그 위로 자라난 얕은 풀들을 바라봐요.


하필이면 제주여행을 오기 일주일 전 읽었던 책이 한강 작가님의 [작별하지 않는다.]였어요.

그 주의 독서모임을 위해 꽤 열심히 제주 4.3 사건을 공부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요. 많은 아이들이 죽었대요. 시리고 푸른 풀밭에서도, 깊고 차분한 바다에서도.

총성에 먹혀들었을, 차마 내뱉지 못하고 영영 사그라들었을 울음이 들리는 것 같았어요.


버리는 건 어려워요. 하지만 참 쉬워요. 마음만 먹으면 버리는 건 금방이에요.

그렇다고 모든 걸 다 버려야 한다는 건 아니에요. 맞아, 그건 아니에요.


검은 돌이 잊지 않은 핏자국들과 높게 솟은 산이 간직한 비명을 나는 버리지 않기로 했어요.

기억하기로 했어요. 잊지 않기로 했어요. 아니 잊으려 노력해야 할까요. 잊으려 노력하기만 해도 잊지 못하는 것이 되니까요. 잊는다는 건 이렇게나 모순적이네요.


차라리 품을래요. 소화하기 어려운 슬픔은 그냥 먹고 체해버릴래요. 그래서 평생 가슴에 얹혀놔야지.


꽉 막힌 가슴을 붙들고 공항에 내렸어요. 내 몸에 칭칭 감기는 딸아이의 뜨거운 체온이 좋아요.

우리는 항상 여름이야. 이토록 뜨거우니까. 섧게 내리는 초봄의 눈발에서 아이를 꼬옥 끌어안던

아낙의 매서운 가슴을 뒤로하고 우리는 비행기에 올랐어요.


음. 버리는 것과 잊는 건 본질적으로 다를까. 아니 같을까요.

여전히 내 생각은 좀처럼 뻗어나가질 못해요. 오늘은 그냥 이쯤 하기로 해요.


하지만 하나는 확실해요.


나는 잊지 않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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