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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익상 Apr 04. 2023

<슬램덩크>에 페미니즘 끼얹기?

끼얹으려면 잘 좀 합시다 +보너스

어떤 작품에서든 젠더박스를 읽어내고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비판이 적절한 작품과 ‘덜’ 적절한 작품을 구분하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다. 덜 적절한데도 유명세를 타고 있는 작품을 골라 굳이 비판한다면, 그건 작품 속 젠더 재현의 문제보다는 유명세 때문이라는 의혹을 피하기 어렵다. 그런 의혹 속에서 글의 의제와 논점이 곧이곧대로 읽힐리 만무하다.

(주의: 이 글은 악명을 떨친 어떤 글​을 계기로 하여 쓰였으나, 이 글을 읽기 위해 그 글을 반드시 읽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 읽지 않는 것을 권장합니다.)


단적으로 말해 <슬램덩크>의 여성 재현은 특별히 문제적이지 않으며, 당대 다른 소년만화 가운데서는 오히려 꽤 바람직한 예다. 대상화하는 재현도 드물고 한나 같은 경우는 멋지게 그려진다. 그리고 나도 이번에 발견했지만, 기자 박하진도 있다! 남자 농구가 제재이니 남성 중심 만화인 건 맞을 것이나, 당대의 여성혐오 하중을 버티며 더 나은 재현을 하려 노력한 점은 인정할 수 있다. <슬램덩크>에 서비스컷이나 판치라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적으며, 어느 시점 이후로는 거의 보이지 않는 데서 그 노력이 도드라진다. 이노우에가 사사한 만화가가 <시티헌터>의 호조 츠카사였단 걸 생각하면 <슬램덩크>를 그만큼 청정구역으로 그려낸 것은 놀라운 일이다. 물론 비판할 것은 비판해야 하지만, 비유하자면 항일운동은 안했지만 친일도 안한 사람을 항일운동 안했다고 친일파로 몰 수는 없다. 그 시대에 친일 안하기만 해도 얼마나 힘든 일인데.


https://twitter.com/lampedusa11/status/1292688597355823104  이 트윗 타래 재미납니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건 <슬램덩크> 변호만은 아니다. 그 글의 과오에서 배우고 질문하고 싶다. 페미니즘의 시선에서 스포츠 콘텐츠를 읽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물론 다양한 방식으로 가능할 것이다. 그중엔 한 작품을 골라잡고 그안에 담긴 재현의 문제와 인물들의 젠더박스 등을 살피는 방법도 물론 있다. 안타까운 것은 그것이 적실하고 설득력 있게, 특히 '적절한 텍스트를 대상으로 선정해' 수행되지 않으면, 오히려 들여다본 그 페미니즘의 시선 자체가 조롱당할 수 있다는 점이다. 코르크 판넬에 압정을 박는 일에 대형 망치를 휘두른 사람이 있다고 치자. 휘두른 사람이 이상한 게 분명한데, 대형 망치도 함께 우습게 보인다. 망치를 휘두른 이에 대한 조소와 망치에 대한 조소가 구분하기 어렵게 뒤섞이고 만다. 내 가장 큰 불만은 여기 있었다.


그래서 페미니즘의 시선에서 스포츠 콘텐츠를 적절하게 비평하는 일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뒤늦게 봉착했다. '한 작품'을 벗어나 생각하니 좋은 방법이 제법 떠오른다.


먼저 통계다. 벡델 테스트가 의미를 지니는 지점은 특정 영화가 그것을 통과하거나 하지 못했다는 게 아니라, 너무 많은 영화가 그것을 통과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벡델 테스트의 출발점이 된 1985년 만화에서 두 여성이 대화하며 지나가는 거리에 붙은 각종 영화 포스터는 모두 남자 주인공의 우람한 신체를 과시하고 있다. 그런 영화들을 볼 수 없는 여성이 말한다. 가장 최근에 볼 수 있었던 영화는(테스트를 통과한 영화는) <에일리언>이었다고. 1979년 영화니, 그녀는 무려 6년 동안 영화를 볼 수 없었던 셈이다. 이는 물론 정확한 통계가 아니지만, 특정 영화가 아니라 영화라는 장르의 판이 얼마나 장르 편향적이었는지를 이미지로 인식시키기 충분하다. 명확한 숫자와 도표로 표현되면 설득력은 배가된다. 지나 데이비스 재단이 구글과 협업해 내놓은 통계는 미국 영화와 드라마의 젠더 편향성을 명쾌하게 드러낸다. 남자 배우들이 출연 분량이든 대사 양이든 모두 여자 배우들의 그것보다 두 배 가까이 많다.

https://www.npr.org/templates/story/story.php?storyId=94202522
네번째 칸과 다섯번째 칸이 벡델 테스트 대목이다.
짧은 머리 여자: "난 세 가지 기본적 요소를 충족하는 영화만 보러 가. ① 영화에 여성이 두 명 이상 나와서 ② 서로 대화하는데 ③ 그 둘의 얘기가 남자 말고 다른 것에 대해서일 것"


이렇게 판을 객관적으로 보여주고 나면, 그것을 적절하게 해석하고 적절한 대상에 호소하는 일이 이어져야 한다. 지나 데이비스는 "할리우드나 드라마 제작사들이 일부러 여성을 소외했다기보다도 무의식적인 편견에 따른 것"이라 말한다. 제작사들이 못돼 처먹었다거나, 여성혐오자라서 그랬다는 것보다 받아들일 허들이 낮은 발언이다. 보지 말아야 할 작품, 보이콧해야 할 감독을 적발해내는 방식보다 더 넓게 판을 겨냥하기도 한다. 또한 '무의식적인 편견'을 지적하는 것은 바꾸기 쉽지 않은 뿌리깊은 문제임을 강조함과 동시에, 의식적인 행동으로 바꿀 수 있는 문제라는 뜻도 전달한다.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남자들이 여자보다 더 중요하다고 보여주는 것을 이젠 멈추자"는 의식적인 변화를 향한 호소가 이어지는 것은 그래서다. 그 기울어진 숫자를 그냥 차별이니까 나쁘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남자들이 여자보다 더 중요하다고 보여주는' 재현의 영향력까지 환기함으로써 구체적으로 바꿀 대상을 타격한다.


배우 지나 데이비스, 할리우드 성차별 'GD 지수' 공개
https://www.yna.co.kr/view/AKR20160925003800075 


이건 장르별로 나눈 건데 꽤 재밌습니다.‘공포영화’는 가장 성평등한 장르다

https://m.hankookilbo.com/News/Read/201801151187652518


마지막으로는 페미니즘 그 자체와 관련된 방법이다. 페미니즘'만' 사용하지 않기, 자신의 페미니즘적 시선'을' 갈고닦기. 리타 펠스키는 <근대성의 젠더>에서 ‘페미니즘적으로 올바른 읽기’에 몰두한 나머지 텍스트가 경험하게 해주는 다양한 가치들을 놓쳐버릴 가능성을 경계한 바 있다. 펠스키의 지적은 이렇게 확장될 수 있다. 특정 독법에 몰두해 쓰여진 글이 다양한 가치를 충분히 존중하지 못할 때, 다양한 가치를 우선 발견하고 이를 통해 '입덕'한 이들과 불화할 수 있다고. 불화는 일어나야 하지만, 그것은 텍스트와 독자 사이에서여야 하지, 페미니즘을 대상으로 한 불화여서는 곤란하다. 섣부른 불화를 이끌어낸 책임은 8할은 글쓴이에게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페미니즘 글쓰기가 어렵고 끊임없는 공부를 요청한다. 적잖은 페미니스트들이 때로 놓치는 사실은, 페미니즘의 생각하는 결이 엄청나게 다채롭고 활용 방식도 무궁무진하다는 것이다. 처음엔 마구 휘두를 망치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장갑이고 갑옷이며 신발인 페미니즘을 발견하는 경험. 어떤 페미니즘은 코르셋일 수도 있고, 코르셋이 반드시 페미니즘이 적대시할 대상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니, 갈고닦아 잘 쓰자, 페미니즘. 나 역시 페미니즘을 배우고 실천하는 긴 길 위에 서 있는 사람이니, 이것은 내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위에서 언급한 방법들과 그외에도 분명 존재할 방법들을 활용해 페미니즘 비평을 잘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아 마무리하고 싶지만, 여기서 마치는 건 너무 재미없으니 두 가지 선례를 보여주고 싶다. 나는 보면서 좋았다. 하지만 이것이 최상의 사례라는 것은 아니다. 참고 삼아 봐주었으면 한다.


1)


"씨네페미니스트 아네트 쿤이 분석한 세미 다큐멘터리 영화 <펌핑 아이언 2: 여성편>(1985)을 관람한 페미니스트 집단의 반응을 참고하자. 영화는 1984년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여성 보디빌딩 챔피언 대회 이야기를 담으며 보디빌딩 챔피언인 레이첼 맥리시와 칼러 던럽(유일한 흑인 참가자), 호주 역도 선수 출신 보디빌더 베브 프랜시스 세 명의 여성에 집중한다. 누가 이길 것인지가 관전 포인트다. 즉, 여성 보디빌더로서 ‘최고의 몸’이란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가가 핵심 질문이다. 레이첼의 몸은 ‘여성적인 몸’에 가깝고, 베브의 몸은 ‘남성적인 몸’으로 보일 만큼 근육이 잘 발달했다. 결국 1등은 베브와 레이철의 중간 형태의 몸인 칼러에게 돌아간다. ‘여성 보디빌더에게 적합한 몸이 무엇인가’란 질문은 해결되지 못했다. 참고로 이 영화를 본 페미니스트들은 모순적 반응을 보였다. 영화를 보는 중에는 신나게 즐기고, 끝난 후의 토론에서는 부정적으로 비평한 것이다. 자신이 아마도 남성적인 방식으로 시각적 즐거움을 누렸다는 사실이 불편했던 까닭이다. 당분간 우리는 여성을 다룬 스포츠 영화의 서사와 재현을 둘러싼 이 불편한 감정에 끌려 다니거나 혹은 저항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스포츠 영화를 둘러싼 여성적 서사와 여성 재현에 대한 페미니스트 관객의 운명이 아닐까."

오만과 편견 그리고 변화, 스포츠 영화가 여성을 재현하는 방식 https://www.maxmovie.com/news/253342/


여성을 재현한 스포츠영화를 여러 편 훑으며 통계와 유사한 객관적 효과를 자아내고 적절한 해석을 제공하던 글은, 마지막에 이르러 자신들=페미니스트의 시선을 바라본다. 어떻게 볼 것인가는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 '운명'이 답이 없을 리는 없다. 서성이며 생각할 운명 앞의 우리를 보여주는 이런 글, 나는 참 좋아한다.



2)


장승현, 이혁기, 한국스포츠영화 내 여성재현의 양상: 2000~2018 개봉작을 중심으로, 한국여성체육학회지

http://journal.phywomen.or.kr/xml/30506/30506.pdf


표는 두번째 선례의 일부로, 연습 용도를 겸해 첨부했다. 목록들을 쭉 보며 어떤 해석과 분석, 비평을 각 작품이나 전체를 두고 할 수 있을지 짐작해 볼 수 있다. 연습은 연습이고 논문 얘기로 돌아가자. 총 27편의 스포츠영화를 연구의 분석 대상으로 선정했는데, 이들 스포츠영화 속에서 여성이 어떻게 재현되었을까를 두루 살피고 여태까지의 재현을 읽어내는 일에는 27편을 보는 시간이 들었을 것이다. 얼마나 잘 보고 해석했는지는 논문을 통해 직접 확인해도 좋겠으나,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런 부지런함이 어쩌면 기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앞서 말했듯, 한 작품이 아니라 판을 추한 것으로 드러낸다. 물론 이는 짧은 칼럼에서 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판을 보여주려는 부지런한 노력을 경주하여 짧은 칼럼 안에서도 해내는 칼럼 장인들이 몇몇 있다. 물론 그분들 정도가 아니라도 글은 쓸 수 있다. 그런데 게으르게 쓴 글을 언론 지면에 싣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언론 지면에 실을 글이라면 더 부지런히 더 적절하게 더 잘 쓰자. 애먼 페미니즘 욕 보이지 말자.


사족) 스포츠만화로도 이런 거 할 수 있는데, 아직은 없다. 있었으면 정말 잘 이야기할 수 있었는데. 한국 것만 추려보고 거기서 웹툰으로 다시 좁히면 20편 안에서 할 수 있겠지? 그렇다고 하겠단 얘기는 아니다. 누가 해주세요.


*제목은 탱알 평론가의  책 <다 된 만화에 페미니즘 끼얹기>를 오마주한 것입니다.
**이 글은 얼룩소를 체험할 겸하여 그곳에서 처음 공개했습니다. 이 글 이후로 글을 더 쓰고 있지 않으니 링크는 누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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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여기까지지만 보너스가 있답니다


남자 농구를 그린 <슬램덩크>에서 제한적인 여성 역할에 아쉬움을 느낀 독자라면, 운동하는 여자들에 초점을 맞춘 작품을 읽어보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아쉽게도 여성 주인공이 운동하는 만화는 그리 많지 않고 잘 알려진 작품도 적다. 그래서 열심히 찾아서 알려야 한다! 다양성을 위해서도 그 편이 더 바람직하다.

여자 유도선수가 주인공인 <야와라>와 테니스 선수 이야기 <해피>가 우라사와 나오키 작품인 것까지 포함해 유명하긴 하지만 이 작품의 성적 대상화는 <슬램덩크>에 비할 바가 아니라 추천하기 어렵다.(그래도 주체적 여성을 제한적이나마 그려낸 작품이다.) 일본 출판만화 중엔 (내가 많이 읽지 못한 탓에) <스바루>(발레)가 좋았던 기억이 있고, 웹툰 중에는 <샌프란시스코 화랑관>(태권도)와 <헤어진 다음날, 달리기>(마라톤)이 무척 좋다. <웹툰 내비게이션> 100선 수록작인 <난 슬플 땐 봉춤을 춰>(폴댄스)도 좋은 대안이다.

하지만 내가 읽어본 작품 중 이 맥락에서 가장 추천하고 싶은 작품은 여자농구 팀 이야기인 <에코즈>다. 좋은 대안이라고 모든 아쉬움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아니나, 이참에 읽기에는 이만한 작품이 없다.

아유미, <에코즈 Echoes>, artePOP

“트랜스 남성 만화가 아유미의 작품 <에코즈>(아르테팝·2018)는 또 다른 멋진 재현이다. 일본에서 ‘여성판 <슬램덩크>’라는 평을 받은 바 있는 <에코즈>는 여자 농구부원들의 이야기다. (트랜지션 전의) 트랜스젠더가 넌지시 등장하지만, 그 정체성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승리를 향한 열정으로 모두가 함께 하나의 시합을 만들어갈 뿐이다. 선수들은 각자의 개성이 담긴 플레이를 하되 서로 공명한다. 이 만화의 재현은 ‘우리’가 어떻게 함께할 수 있을까에 대한 답 가운데 하나다. 한 사람이 그 자신으로서 살고 싶은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모두에게 평등하게 가능한 것이 될 때를 스포츠를 경유해 그려낸 것이다.”

<에코즈> 소개를 담은 주간경향 만화로본세상 칼럼에서.
http://weekly.khan.co.kr/khnm.html?www&mode=view&art_id=202104051528121&de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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