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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사쁨 Jun 19. 2024

엄마, 선생님이 커피 타줬어

이게 얼마짜리 실습인데 윤이가 엎드려 있다.


"윤이 졸린거야, 아픈거야?"

"반반이요."

"아프면 보건실 다녀오고."

"아니. 괜찮아요."


다시 봐도 축 쳐져 있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게 얼마짜리 실습인데 이대로 엎어져 있는 걸 보고 있을 수 없다.


"많이 힘들어? 시원한 마시고 올래?"

"아니요. 괜찮아요."

"샘이 갖다 줘?"

"아니요."

"커피 주까?"


 윤이 눈이 번쩍한다. 커피를 좋아해서인지 예상치 못한 전개에 놀래서인지 이유는 물어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분명히 반긴다. 얼른 학년부 교무실로 달려갔는데 운명처럼 종이컵이 딱 하나 남아 있다. 믹스 하나를 탈탈 고, 정수기에서 온수 약간. 스냅을 이용해 종이컵을 휙휙 돌려주며 냉동실을 열어보니 마침 얼음도 있다. 작은 컵에 얼음이 대여섯개나 들어간다. 다시 호다닥 교실로 조용히 들어가 소곤소곤. "지금은 진하니까 조금 기다렸다가 녹은 다음에 마셔." 


 기다리라고 했건만 바로 입을 갖다 덴다. 요즘 아이들이야 중학생 때부터 카페에 다니긴 하지만 윤이는 믹스커피의 맛도 아는지 고놈 참 잘 마신다. 같은 모둠에 있는 준이 민이가 신기하게 쳐다본다. 마시고 싶었던 건지, 무슨 이런 선생이 다 있나 싶어 기가 찬건지 물어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느네도 졸리면 말해. 다음에 샘이 타주께." 하니 하고 웃는다.


 야심차게 준비했다. 퍼스널 컬러 진단하기. 교과에 배정된 예산의 절반도 넘는 금액을 써버렸다. 1인당 1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워크북과 교구가 제공되고, 활동에 필요한 키트도 여섯 세트나 구입했다. 무엇보다 강사 선생님이 직접 수업을 해주신다. 즉, 퍼스널 컬러 진단을 위한 전문 인력을 뫼셔왔다는 뜻인데 노노 안 되지 안돼. 자면 안 된다.


 설탕 덕분인지 카페인 효과인지 어쨌든 윤이는 눈을 떴두껍고 도톰한 손으로 칼라 칩들을 조물조물 만지며 2시간 짜리 활동에 참여했다. 그 모습에 기분은 상쾌한데 커피를 마시게 한 것이 적절한 대처였을까 뒤늦게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졸려서 쓰러지는 아이를 어떻게 도왔어야 했을지. 다른 방법은 영 없었던 건지.


 '서서 책상'이라 부르는 키높이 책상이 교실마다 비치되어 있다. 졸린 아이들은 보통 자발적으로 서서 책상으로 향한다. 윤이에게 "잠깐 뒤에 서 있을래?" 라고 먼저 제안해 볼 걸. 그러고도 안되면 찬 물만 떠다 줬어도 됐을텐데 왜 덥썩 커피를 주겠다고 했는지. 잠깐 복도로 데리고 나가 오늘 실습의 내용과 이 활동이 수행평가와 연계된다는 점을 구구절절 설명한 후 나의 바람을 전하며 격려하는 방법도 있고 말이다.


 문제는 어떤 방법을 선택했든 넌 졸리겠지만 스스로 잘 극복하고 어서 잠에서 깨어나 좋은 태도로 수업에 임하라는 요청을 하는 것인데 그런다고 쫓겨날 잠이 아니라는 것. 수업을 하면서도 졸린 순간을 경험한다. 아이들 앞에서 쉬지 않고 떠들어제껴도 찾아오는 것이 잠이거늘. 아이들은 저도 모르게 눈알 뒤집으며 고개춤이라도 추지 선생은 졸려도 속수무책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에 눈꺼풀이 스르륵 닫히는 그 고충을 십분 이해.


 게다가 윤이가 매일 엎어지는 것도 아니다. 하필 오늘이 졸린 날일 수 있다. 하필 어젯밤 게임을 늦게까지 했을 수도 있.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니 굳이 진지하게 반응할 필요 없고, 애들식 표현으로 진지빨고 개정색해 봤자 사춘기 아이에게도 졸음에게도 먹히지 않기는 매한가지. 무엇보다 모둠 친구들과 함께 뭔가를 계속 해야 하는데 아이 감정을 자극하고 싶지가 않다. 그러나 무리 그렇다고 믹스를?


 분명한 건 내가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커피를 권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거다. 얼마나 사랑하는 믹스커피인가. 브런치 작가로 등단을 하고 필명으로 삼고 싶었던 이름 1순위가 '믹스커피'였을 만큼 믹스커피는 내 삶의 동반자와 같다. 출근해서 제일 먼저 하는 일. 누구에게 쫓기듯 굳이 허겁지겁 타 먹는 (마시지 않고 먹는) 나의 에너지 급원 식품이요 복잡하게 꼬인 뇌를 풀어주는 이완제요, 허전한 마음을 달래주는 엔돌핀이자 피로회복제가 바로 커피이다. 나의 살아가는 힘이자 영양제 그 이름 믹스커피. 사모하는 마음이 결국 윤이에게까지 미친 것. 나의 경험과 습관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윤이 눈이 반짝, 피식하고 입꼬리가 올라갔을 때, 그리고선 몸을 일으켜 열심히 수업 듣는 시간 내내 참 좋았는데, 짜릿하게 달았는데, 역시 끝맛이 텁텁하다. 좋은 편으로 생각하자면 인간적이긴 하지만 (지금은 알지 못하는) 더 있어 보이는, 보다 교육적인 좋은 방법이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쫄쫄쫄 저녁 내내 마음에 흘렀다. 그날 저녁 윤이가 집에서 가서 "엄마 나 선생님이 커피 타줬어."라고 했다면 어머니는 뭐라고 하셨을지.


  더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 아는 게 좀 많았으면 좋겠다. 중딩계의 최민준이 되고 싶은데 영.


윤이 어머니, 윤이가 맛있대요. 녀석 커피 마실 줄 알더라구요. 호로록 원샷 때리고 수업 지인짜 열심히 들었어요!


 (사실 그날 윤이는 여자친구와 이별의 기로에 서 있었답니다. 그래서 엎드려 있었대요. 여자친구도 같은 반이거든요. 쉬는 시간 기가 맥히게 연애상담  풀어주고 윤이는 다음 시간에도 수업을 잘 들었다는 뒷이야기를 전해요.)


사진 출처 : maxim 인스타 공식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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