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여행을 가기로 한 것은 충동적이면서도 계획적인 일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한창 수능 공부에 질려있을 때 멋진 풍경 사진을 보게 되었다. 푸른 들판과 나무집 한 채, 뒤로 보이는 거대한 산. 분명 실물보다 못할 테인데도 그 사진에 담긴 작은 평화로움에 빠져들었고 시험이 끝나자마자 그곳으로 향하겠다고 다짐했다. 힘들 때마다 비행기표 가격을 확인하는 건 덤이었다.
물론 시험이 끝나자마자 가진 못했다. 크리스마스 경 대학 합격 발표가 나고서야 비행기표를 찾게 되었고 3월 이전의 비행기 값은 평소보다 비쌌으며 숙소도 자리가 없었다. 결국 타협하고 비행기 값이 그나마 괜찮았던 8월 중순으로 끊어뒀다. 그러고 나서야 가족들에게 선언했다.
"나 8월에 스위스 간다."
반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반년이나 남은 데다가 너무 현실성 없는 말이었는지 그래, 라며 허락했다. 나중에 여쭤보니 정말로 갈 줄은 몰랐다고 했다. 하긴 해외여행 경험도 없고 갓 성인이 된 자식이 상의도 없이 모아둔 돈을 털어 먼 나라로 여행 간다는 건 예상하기 힘든 일일지도 모른다. 충동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당사자 입장에서 변명해보자면 이미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일이었다. 힘든 시절을 버티게 해 준 목표와도 같았기 때문에 그 순간에는 두려움이나 망설임은 전혀 없었다. 한다면 하는 성격 때문인 것 같다.
여행을 위해 비자카드를 발급받고 숙소와 이동수단을 예약하고 루트를 짜는 일은 모두 혼자서 해냈다. 지금 생각해도 대단했던 때였다. 겁 없고 도전적이고.
여행의 매 순간이 행복했다면 거짓이다. 티켓을 잃어버리는 실수도 하고 예약석에 잘못 앉기도 했으며 버스를 한참 기다리기도 했다. 체르마트에서는 하이킹 중 길을 잃어서 험한 길을 타고 내려온 적도 있다. 혼자 떠난 여행인 만큼 누구에게 힘듦을 토로할 수도 없었다.
이런 힘든 일들도 기억나지만 멋진 경치와 새로운 경험, 사람들의 친절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았다.
기차에서 이쪽 경치가 멋지다며 자리를 바꿔주시던 할머니, 평화롭게 풀을 뜯는 소의 목에서 울리는 방울소리, 눈보라가 몰아치던 융프라우 꼭대기에서 먹던 컵라면, 멋진 풍경을 배경으로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는 여행객들, 도시를 지나는 강에 사는 백조, 아름다운 경치가 끝없이 펼쳐진 멘리헨에서 클라이네 샤이덱까지의 하이킹...
여행 막바지에 이르러 방문한 시옹성은 영화에서 나오는 중세 성과 똑같았다. 직접 보니 영화 속에 들어온 것 같아서 신기했다. 이렇게 영화 같은 성이 있다니, 라며 선후관계가 뒤바뀐 감상도 즐겼다. 가족 여행객의 사진을 찍어주기도 하고 대가로 내 사진도 찍었다. 끝나고 나와서 사 먹은 망고맛 아이스크림도 생각난다. 영국 낭만파 시인인 바이런이 여기를 배경으로 시를 썼고, 스위스에서는 국가 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곳이라는 걸 생각하면 가벼운 감상이지만 갓 세상에 나온 청년의 시선은 그랬다. 당장의 즐거움과 더운 날 혀에 닿는 시원한 달콤함이 좋았다.
체르마트에서도 기념품 가게에 들렀지만 가게에 있는 엽서들은 지나치게 인터넷 배경화면 같은 사진들이었다. 푸르고 또 푸르고... 그렇게 넣어도 멋진 풍경이었지만 뭔가 특별한 느낌을 담은 엽서를 찾고 싶었다. 시옹성에도 작은 기념품점이 있기에 한번 들러보자 싶었다. 그렇게 들어간 기념품점에는 운명처럼 날 기다리고 있던 엽서들이 있었다.
펜화로 그린 것 같은 시옹성의 전경 엽서.
그리고 중세시대의 기사의 모습을 담은 엽서도 있었다.
스위스! 기사! 안 그래도 스위스는 용병으로 유명한 나라라고 한다. 루체른을 관광할 때 프랑스혁명에서의 스위스 용병을 기리는 빈사의 사자상을 구경하기도 했다. 엽서의 제목으로 보이는 문장을 번역해보니 '13세기 후반 기사'였다. 그리고 엽서 아래 서명이 되어있어 찾아보니 프랑스 일러스트레이터 Patrick Dallanegra의 작품이라고 한다. 프랑스어로 된 사이트를 탐색하며 다시 한번 예술 분야에서 프랑스어를 떼기 힘들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시옹성 기념품 상점에서 이 프랑스 출신 일러스트레이터의 엽서를 판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관련이 없는 건 아니었다. 시옹성을 둘러보며 중세시대의 느낌을 받은 것도 있지만 시옹성이 위치한 스위스 몽트뢰는 남서부에 위치하고 있어 레만 호를 건너면 프랑스였다. 그래서 그런지 몽트뢰와 로잔 지역을 관광할 때에는 표지판이 온통 프랑스어로 되어있어 난감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에비앙'이 근처라 에비앙 생수를 매일 사마셨던 재미있는 일도 기억한다.
여행은 이렇듯 수많은 도전 경험과 좌절, 그리고 소소한 성취로 이뤄지는 것 같다. 말이 통하지 않아 서러운 순간과 말도 못 할 정도로 벅찬 순간을 한순간에 오가는 것이 여행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여행을 계획하고 직접 실천하며 나 자신을 살필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기에 한번 정도는 혼자 여행을 잡아보길 추천한다.
* 글에 첨부된 사진은 제가 산 엽서를 직접 찍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