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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우 Feb 14. 2022

일상을 지탱하는 작은 것들

"윤희에게" 를 보고


안녕하세요. 해가 바뀌고도 한달 보름이 지나 이렇게 다시 뵙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오늘은 윤희에게 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겨울을 배경으로 잔잔하게 이어지는 두 여인의 사랑 이야기 라고 해야 할까요. 퀴어영화라고 소개된 글을 보기도 했지만 퀴어 라는 단어가 주는 이미지에 갇혀버리기엔 아쉬운, 함박눈처럼 조용하지만 얼음처럼 단단한 힘이 느껴지는 이야기였습니다.


자세한 줄거리는 영화를 보실지도 모를 여러분의 즐거움을 빼앗지 않기 위해 더이상 언급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제게 남아있는 장면들을 여러분께 닿을 장면들과 비교해보고 싶은 욕심은 참기 어렵네요. 이런 이야기가 하고 싶다고 할까요?


"그리움 사이로 일상이 흐릅니다. 반대인가요? 일상의 틈 사이사이로 그리움이 흐르는 걸까요?"


제가 이 영화를 보며 느낀 감정은 잔잔하게 흐르다 이어지는 두 여인의 그리워하는 마음에 대한 애잔함이라기 보다는 고단한 일상에 두 여인을 단단하게 붙들어매어주는 또 다른 두 여인의 강인함에 대한 찬탄이었습니다. 엄마를 대신해 겁도 없이 일본 여행을 감행하는 윤희의 딸, 새봄과 일본에서 외로운 삶을 견디고 있는 쥰을 따듯하게 보듬어주는 고모의 존재가 두 주인공을 단단히 받쳐주고 있는 것이죠.


우리는 무료한 일상을 지겨워하며 일상에서 체감하기 어려운 강렬한 감정을 갈구합니다. 코로나로 자가격리를 시작한지 겨우 삼일째인데도, 출근해서 일에 시달릴 때보다 오히려 더욱 더디게 지나가는 시간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어떻게 아이와 버텨야 할지, 어떤 장난감으로 시간을 떼워야 할지 고민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우리를 삶에 붙들어 매어 주는 것은 비일상적인 쾌락이 아닌, 끊임없이 이어지는 듯한 일상의 소소한 기쁨과 슬픔들입니다. 시소처럼 하루에도 수십번 내려갔다 올라오는 감정들, 짜증과 애정 사이를 죽 끓듯 오르락 내리락하는 이 감정들이 우리를, 적어도 저를 단단히 감아 천천히 이 자리에 뿌리내리게 하고 있습니다.


이 곳이 바로 내가 있어야하는 장소라는 감각.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든 그저 존재만으로도 받아들여지는 장소라는 단단한 삶의 감각.


이 눈으로 뒤덮힌 잔잔한 영화가 끝나고나서 제게 남은 것은, 지나간 사랑에 대한 추억도, 남들과 다른 성적 정체성에 대한 뒤늦은 성찰도 아니었습니다. 고단한 배식 일을 마치고 돌아온 집에서 다시 딸을 먹이고 설겆이를 하는 엄마의 등, 기껏 떠난 여행길에서 눈덮힌 언덕길 위로 무거운 캐리어를 혼자 들고나르는 엄마의 손, 그리고 치워도치워도 계속 쌓이는 눈을 치우는 조카를 바라보는 고모의 따듯한 눈길, 그런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쉽게 지나치는, 사랑이라 미처 이름 붙여지지도 않을 사랑이 바로 우리를 지탱해주리라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럼 늦은 편지는 이만 줄이고 다음 편지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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