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이 소녀 가장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는다. 진짜 8명 대식구의 왕초였으니까 가장이라는 말은 맞는데 나이 40이 훌쩍 넘은 나이에 소녀 별칭을 붙여주었으니까 친구들 딴에도 좀 짠했던 모양이다.
진짜 왕초는 친정 어머니였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외아들은 미국에 가서 소식도 없고 나밖에 자식이 없었으니 살던 대로 같이 살아야만 되었다. 오빠 아들인 손자를 데리고 사셨기 때문에 식구가 그렇게 많았던 것이다.
고만고만한 또래의 남자 아이들만 4분이나 되니 교육비가 엄청난 데다가 잔 씀씀이며 생활비도 장난 아니었다. 밤을 새가며 일을 했는데도 물이 고일 사이가 없이 흘러나가 삶의 뿌리가 그리 튼튼하지 못했다.
하루는 부장이 지나가는 나를 불러 앉히더니 수고하신다며 샴푸 값을 좀 드리겠다고 했다.
원고료로 샴푸 정도는 살 수 있는데요?
싱글거리며 말을 건네는 그의 태도가 의미심장헤서 농담으로 받았다.
아니...요새 시청률도 좋고 많이 애를 쓰시고 있으니까.
"얼마 주실건데요?"
그 때까지도 별로 신빙성이 없어서 장난으로 물었다.
얼마입니다....
라는 말을 듣고는 30여 전에는 그리 작은 돈은 아니없다. 갑자기 로또에 당첨된 기분이었다.
그 돈이면 물고 있던 주택 월부의 잔여금을 다 갚을 수가 있을 것이며 생활이 좀 여유가 있게 되었구나
재빨리 잔 대가리를 굴리며 계산했다. 나는 본래 산수 응용 문제는 못해도 암산은 제법 빨랐다.
그 때부터 연속극을 쓰면 별도로 계약금을 주는 제도가 생겼을 것이다.
고료가 아닌 보너스라는 뜻의 계약금을 받은 첫 번째 작가가 되었다. 그 돈을 받고 월부를 갚고 남은 돈으로 내가 한 일은 집을 재건축하는 짓이었다.
집을 재건축한다고 팔 때 돈을 더 받는 것이 아니었다. 집을 살고 팔고는 실은 땅을 사고 팔고 하는 것이다.
살면서 집을 고치느라 어려움은 말할 수도 없었다.
베란다 쪽의 벽을 허물고 창을 확장하는 공사였다. 그리고 반지하로 있던 일 층을 앞마당에서 바로 들어갈 수 있는 완전 1층으로 보수를 했다. 반지하 출입문이 달라 지면서 1층이 되었다. 1층은 2층이 되고 2층은 3층이 되었다.
생각난 김에 앞 마당도 고쳤다. 봄이면 개나리 꽃으로 만발하던 노랑 나무를 죄다 뽑아 버리고 과실 수며 좀 더 근사한 나무를 심고 잔디도 깔았다. 사실 그 1층 앞마당은 세를 준 사람들의 차지가 되는데도 내 취향을 누르지 못해 근사한 정원으로 만들고 말았다.‘
베란다를 없애고 거실을 넓혀 창문을 통창으로 만들었다. 넓은 창으로 보이는 거실 야경은 그 유명한 홍콩 야경 부럽지가 않았다. 한강에 걸린 수많은 다리에서 비취는 가로등과 강변 아파트에 켜놓은 휘황한 불빛, 강변도로를 오가는 차량의 헤드 라이트와 백 라이트의 조화가 어울려 맨날 축제날처럼 황홀하게도 찬란했다.
늦은 여름과 가을을 지나고 겨울이 되자 문제가 터지기 시작했다.
베란다까지 늘어난 거실은 겨울바람을 이기지 못해 쌩하게 코를 찔렀다.
오래된 건물이라 보일러 시설이 상당히 후져 있었다. 높은 지대라 물이 잘 나오지 않았다. 부루셀의 오줌 싸는 소년의 오줌발처럼 쫄쫄 나왔다. 샤워는커녕 세수도 대충해야만 하는 형편이 되었다.
이 집은 야경이 문제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난관에 봉착해 있는 집이었다.
그렇다고 다시 건축 할 용가는 없었다.
목욕은 공중탕을 이용해야 되었다. 이 일로 눈길에 목욕탕을 가시던 어머니는 미끄러져 다리를 다쳐 움직이지 못해 결국 돌아가시게 된 일부 원인이 되기도 했다.
아까웠지만 결국 이사 하기로 했다.. 일산의 아파트로 ..
소형 그랜드 피아노는 갖고 가기로 했다. 피아노 역시 놓을 자리가 걱정이었지만 피아노가 없는 세상은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피아노에 대한 집착이 병적이었기 때문이다.
집을 개축한다고 법석을 떨지 않고 진즉에 일산에 땅을 사놓았더라면 신도시 입주가 초기였으니 부자는 아니더라도 얼마쯤 쯤 물이 고이는 인생을 살았을 지도 모른다.
역시 나는 “어느 구름짱에서 비 떨어지는지 모르는 온실 속의 식물 인간” 임에 틀림이 없었다. 돈은, 돈이란 무엇인지 아는 사람에게는 후한 광합성 작용을 하지만 기본적인 상식도 없는 아둔한 인간에게는 후하게 베풀지를 않는다.
우리 어머니는 역시 예리하셨다. 태어난 재주로 돈은 얼마간 벌었지만 재산을 모으는 재주와 욕망은 애초에 없었다. 아버지가 물려주신 빌딩도 팔지않고 잘 버텼더라면 도시 계획이 있던 곳이라 보상금도 받으며 강남의 아파트 입주권도 받을 수 있었으련만 소식을 알고 있던 사람들로부터 전화를 많이 받았다. 딱지를 파시라고...
"딱지....? 뭐야....이 딴거"
묻지도 않고 끊어버린 나의 둔함에 새로 시집온 막내 며느리가 나중에 듣고는
아휴 어머니.....!!!!!
바보 짓은 또 있었다.
앞서서 말했지만 재판 소송 비용이 생각보담 무지 많았다. 피를 찍어 쓴 원고료를 안해도 되는 재판 소송비용으로 버려야 한다니 말이 되지를 않았다. 그래도 재판이 끝난 것만 시원했다. 승소를 했지만 엄청난 인지대며 변호사비를 내고 나니 얼마 되지도 않았다. 재판비는 패소한 사람이 낸다는 것을 모르니까 아마도 변호사가 눈먼 돈을 꿀꺽했던 모양이다. 그 일을 몇 년 후에야 알았기 때문에 돌려받지는 못했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어눌하게 살앗지만 그나마 시청률은 해마다 선두를 달렸다.
4년 째가 되자 나의 건강이 극도로 나빠졌다. 먹을 수가 없을 만큼 위장병이 심했지만 병원에 진찰을 받으러 갈 사이도 없었다.
어릴 때 부터 아버지 말씀으로는
종이로 붙여서 만든 아이, 움직이는 병동, 삶은 감자로 빚어 만든 아이....인 나의 건강은 절박했다.
위암이 아닌가 싶었다.
그만 쉬고 싶어졌다. 담당 PD에게 그만 쓰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놀라서 위에다 보고를 해야한다고 했다.
방송조직은 작가가 쉬고 싶다고 쉴 수 있는 곳이 아니고 부모님이 돌아가셨다고 방송을 펑크 내도 되는 일이 아니다. 관을 옆에 놓고 앉아서도 써야만 하는 직업이었다.
하물며 몇 년간을 시청률 1위를 고수하고 있는 작품을 끊으려고 하는 작가는 반역죄에 속했다. 국장과 부장이 식사 대접을 하겠다면서 나를 명동 롯데 호텔 몇 십층 레스토랑으로 데리고 갔다. 대형 랍스터를 먹이면서 간곡히 부탁을 했다.
용건은 작품을 계속 써달라는 부탁이었다. 시청률 1위를 하는 작품을 접을 수는 없다고...
그 때 마침 방송국 넘들 내 앞에 무릎을 꿇리고 말거야....했던 중얼거림이 생각낫더라면 얼마나 통쾌했을까만은 랍스터 맛 때문인지 그런 똑똑한 말은 때 맞추어 생각나지가 않았다. 랍스터를 맛있게 먹으면서 위가 나빠져서 전혀 먹지를 못한다는 어이없게 말을 아주 진심을 다해서 설명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위병 환자들은 먹을 때는 잘 먹는다. 먹고나서 한 시간 정도나 되야 증상이 나타나는 법이니까.
곧 병원으로 가서 검사를 받을 예정이라고 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그 후 여러 곳에서 압력과 부탁이 번갈아 들어왔지만 더 이상 쓸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지난해 연말에 대상을 받은 모든 배우 감독 스탭들이 방송국의 포상으로 유럽여행을 보내주었다. 나도 상을 받은 터라 사꽃나 마지막 촬영에도 가보지 못하고 마지막 회식도 불참하고 유럽 여행을 떠났고 그 후 톡톡히 보복을 당했다.
그러나 당장 당한 보복은 아니었다.
만약에 진단을 받고 떠났다면 로마 광장을 봐도 비감할 것이고 대성당을 봐도 삐딱한 마음으로 보게 될 것 같아서 병명을 모르고 실컷 놀다 와서 병원에 가서 용감히 진단을 받으리라 뱃장을 정했다.
헌데 여행 이틀 만에 아침 뷔페에서 팔뚝 만한 소시지에 빵에 야채에 고기에 잘도 먹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먹기만 하면 충치가 막히고 머리가 아프던 증상이 말끔히 사라지고 평소에 금기시 되던 빵을 먹어도 그떡 없다는 것을 알고는 위암이 아니라 신경병이었던 것을 짐작했다.
의학 드라마를 4, 5년을 쓰고 나니까 거짓말 보태서 반 의사는 된 것 같이 자가 진단이 가능해졌다. 갔다 와서 숨을 돌리기도 전에 방송사에서 연락이 왔다.
국장을 만났다. 사꽃나는 다른 작가가 계속 쓰기로 했으니 다음 작품을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사랑이 꽃피는 나무는 계속되지만 배우들은 다 바뀌고 스토리 전개도 물론 달랐다. 헌데 왜 제목은 달고 나니냐고 속상해서 물었다. 국장은 주인은 달라졌어도 아까워서 문패는 그대로 달아놓기로 했다는 것이다.
나는 속상했지만 저작권은 방송사에 있었다. 다행히 그 작품은 석달을 간신히 채우고는 끝났다.
계약금이며 방송일자를 일단 구두로 약속을 했다. 방송일자가 반년 정도로 가차이 두고 있기 때문에 그게 좀 마음에 걸렸다. 심각한 병운 아니더라도 이왕 쉬는 김에 좀 더 푹 쉬고 싶었다. 위암은 아닌데 허리에도 병이 생겨 남모르는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유럽여행 후 일본에 유학 간 막내 아들을 보러가야 했는데 사꽃나를 연출했던 A감독이 전화를 했다. 새로 생긴 방송국으로 이적했다며 한 번 만나자고 했다. 일본에 갔다와서 만나고 싶다고 했다. 자기도 곧 일본에 갈거라며 새 방송국으로 대거 이적한 두 방송국 감독들이 모여 함께 일본으로 간다는 것이다. 나도 대충 다 아는 사람들이니까 도쿄에서 같이 만나 동행하자고 했다.
나는 일행이기라도 하듯 그들의 스케줄에 맞춰 같이 다녔다. 덕분에 NHK 방송 시설도 보고 극진한 접대를 받으며 저녁 식사 대접에 같이 받았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A피디가 새로 옮긴 방송사에서 프로그람을 같이 하자고 나를 꼬드겼다.
나는 이미 전에 방송국과 구두 약속을 하고 있었다. 6개월 후에 방송을 할 수 있는 젊은이 드라마 시놉시스를 주기로 돼 있었다.
서울로 돌아가는대로 계약을 하기로 되있다고 거듭 말해도 계약을 끝낸 것은 아니잖느냐며 억지를 부렸다.
그의 막무가내식 억지에 띵해져 있는데 일행이 된 M국장이 기차 안에서 일행과 떨어진 내게로 와서 이번 시즌에 B감독하고 방송사 개국 첫 드라마를 쓰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B감독은 그 때 한창 뜨는 신진 감독이었다. 나는 다른 방송국과 구두 계약을 했다고 같은 말을 되풀이 했다.
그렇게 나의 존재는 아직 죽지 않고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계약금 보담은 좀 더 많이 쉴 수 있다는 조건이 마음에 들어 새 방송국에서 A감독과 같이 일을 하기로 했다. 먼저 방송국은 두 달 쯤 후엔 방송이 시작되는 촉박한 상황이었지다. 사실 쉴사이가 없었다. 이렇게 되면 사꽃나는 괜히 그만둔 셈이된다.
새 방송국은 개국일까지 기한이 많이 남아 일 년은 더 쉴 수가 있었었다.
데뷔작과 사꽃나를 함께 시작한 A감독과의 의리도 있어서 승낙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나중에 후일 담으로 전에 방송국에서는 나의 게약금 약정까지 다 해놓고 내가 일본에서 돌아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나의 배신에 몹시 황당해 했다는 후문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배신이 맞았나 보다.
그들이 너무도 쉽게 몇 번이나 물을 먹였었기 때문에 나도 그런 행동을 해도 당연한 줄로 알고 있었다. 별로 배신했다는 죄의식 같은 건 없었고 내 허리병을 고칠 수 있는 기회라고만 생각했다.
새로운 방송국에 가서 A피디와 한 드라마는 목소리를 낮추어라...하는 역시 시추에이션 드라마였다.
연속극 작가는 많아도 시추에이션을 잘 쓰는 작가는 드물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방송국은 작가가 한 작품에 성공을 하면 아류 작품을 쓰게해서 시청률 경쟁에 안정되게 대비하고 싶어하는 속성이 심하던 때이다.
사극을 쓰고 싶었지만 신설 방송국으로는 쌓여있는 노하우나 장비가 없어서 당장은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쉽게 아류작 같은 것을 쓰게 되었다. 역시 금방 싫증이 왔다. 새 방송사는 서울 인근의 지역에만 송출이 되기 때문에 시청률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했다. 나는 이 사실도 옮긴 다음에야 알고는 자신에게 혀를 찾다.
앞뒤를 재지않고 멋대로 행동하는 버르장머리는 언제즘이면 고칠 수 있을까.
나는 지적 허영심은 꽤 많은 편이지만 세상 사는 이치에 대한 호기심에는 관심도 없었고 호기심은 더더욱 없었다. 또한 시추에이션 방송에서는 주인공이 있긴 하지만 매회 마다 주인공이 달라질 수도 있었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의 방송을 배우들이 선호하지 않았다. 보수가 적어지기 때문이다.
잘 나가는 사랑이 꽃피는 나무를 그만 쓰게 든 이유중의 하나도 키워놓은 최 수지나 최 재성, 이 미연 등이 줄줄이 하차하고 싶다고 말했고 그들은 아무런 미련도 인사도 없이 내 드라마를 떠났던 이유가 컸다.
헌데 새 방송국에 가서 쓴 드라마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그들은 드라마에서 뜨면 틀림없이 영화게나 다른 방송으로 옮겨갔다. 연속 드라마에선 스토리라는 것이 확실하게 정해져 있지만 시투에이션에서는 매회 이야기가 다르기 때문에 언제 떠나도 작품상에는 별 이상이 없을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길게 쓰는 동안 메인 스토리가 축적이 되어 가고 조연들의 이야기도 축적이 된다. 그래야만 이어서 쓰기가 쉽다.
주인공들이 축적해놓은 이야기들을 버리고 떠나면 나는 이야기를 꾸려갈 수가없다. 최 재성이 나가겠다고 할 때 드라마에서 죽여버리겠다고 말했더니 죽이진 말아주세요...하며 애교를 떨었다.
알고 봤더니 영화에 출연하느라고 떠난 것이고 그 영화가 촬영이 끝나자 우리 집에 닭튀김 한 봉지를 사들고 와서는 드라마에 다시 출연하고 싶다고 초대도 안한 밥상에 붙어 앉으며 졸랐다.
그 녀석이 나간 다음에 손창민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었는데 무작정 다시 출연하고 싶다고 하니 이런 밉상이 없었다. 치킨 한 봉지에 넘어가서 그 녀석을 다시 옹색하게 들여놓고 옹색한 스토리를 다시 꾸려가야만 했다.
새 방송국 개국 드라마에서도 한 일년이 지나가자 같은 일이 계속되었다.
나는 원래 가는 사람 붙잡지 않고 오는 사람 막지 않는 성격이다. 그런데 이건 해도 너무 하다 싶었다. 2년이 지나면 여지없이 돌아오는 질병이었다. 나도 싫증나고 배우들도 싫증이 났다.
같은 시투에이션 드라마인 “전원일기” 자가는 아무런 말도 없이 10여 년을 계속 잘 나가고 있는데 왜 박 선생은 그렇게 못 하느냐고 전 방송사에서 이직해온 국장이 한탄을 했다.
거기는 최 불암, 김 혜자, 고 두심, 이 수미, 유 인촌 같은 중견 배우들이 딱 틀어쥐고 작품에 애정을 갖고 임하니 작가도 쓸 맛이 나겠지만 나 같은 경우는 최 수지라는 문맹 덩어리 신인을 겨우 가갸거겨를 읽게 만들어놨더니 하필 박 경리 선생의 토지에 서희역으로 자국 방송국에서 빼내 가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래서 부랴사랴 이 미연, 문맹이긴 매한가지인 그 아이를 캐스팅해서 이야기를 엮어가면서 생고생을 하며 키워났더니 냉큼 영화에서 불러내 두 번 생각할 사이도 없이 인사도 없이 가버리고 말았다.
새 방송국에 가서도 그렇게 지지고 볶으며 또 10여 년을 훌쩍 보내 버리고 말았다.
40대를 눈 깜짝 할 사이에 넘기고 50대도 중반을 넘어서자 쓰는 것마다 옥돔을 건지는 것은 아니었다. 때론 꼴뚜기도 나타났다. 나는 여전히 옥돔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꽁치 쯤으로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컴맹이 되지 않으려고 50대 중반에 일주일에 걸친 하드 트레이닝으로 좌판을 완전 정복하고 컴퓨터를 사용하는 첨단 세력권에 간신히 입성했다.
나이가 들면 작품이 중후해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순수 문학에서는 중후함이 필요하지만 드라마에서는 “올드”로 찍힌다. 반짝이던 재능에 녹이 슬었다는 것은
나이 먹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만큼이나 어려웠다.
내가 “올드” 해버린 세상에서는 삶의 경험과 깊이와 중후함이 중심축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올드함 조차도 감각적으로 녹여내야 한다. 새로움과 신선함은 사극에서 조차 필요했다.
내가 올드하다고 겨우 긍정하고 이해했을 때 나는 60을 바라보고 있었다.
김 대중 노 무현 시대를 지나고 있었다. 정치 세력은 보수에서 진보를 바뀌었지만 나는 별로 의식을 하지 못한 채 새로운 옛 시대를 도전하려고 결심을 했다.
오랜 숙원인 사극에 손을 대었다. 손을 대는 것은 공부를 한다는 뜻이다.
신라 시대를 택했다. 아주 올드한 옛적 삼국 시대의 이야기다. 5년을 아무 작품도 쓰지 않고 준비를 했다. 그 시대의 인간들의 역학적인 관계를 추적했다. 근친 혼인이 일상이었던 신라시대 왕실의 인척관계는 참으로 골치아픈 족보 였다.
김유신과 김춘추의 관계는 이렇게 보면 외사촌이고 저렇게 보면 친 사촌이고 고종사촌이었다. 김유신에게는 태후가 외할머니이고 김춘추에게는 친할머니였다.
김 춘추가 선덕여왕에게는 조카이며 김 유신에게는.....20년이 지나서 다 잊어버렸
지만 하여튼 모둔 등장인물이 다 인척으로 엮여있었다. 구태어 꼬치꼬치 다 알지 않아도 대충 쓰면 될텐데 그런 태평한 성격이 아니어서 그들의 뿌리를 완전히 알고 나야 대사 한마디라도 제대로 할 것 같아 그리도 모질게 파헤치고 있었다.
출연할 인물들의 인간관계와 존재의 뿌리를 확실하게 알고 나서야 드라마의 스토리를 엮었다. 역사에 기록된 이야기니까 큰 윤곽은 이미 짜여져 있었다. 그러나 캐릭터 선정이며 에피소드의 취사선택은 까다롭고 미묘했다.
역사적 사실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당위성과 합리성과 상상력을 겸해야하는 작업은 만만하지가 않았다. 그러나 마침내 정말 그럴듯한 스토리를 짜고 구성을 촘촘히하며 대본 작업을 시작했다
그 시대 왕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쳣던 “미실”이라는 새로운인물을 등장시켰다. 우리 역사서에는 처음으로 등장하는 인물이었다. 정사에는 그녀의 이름이 없었다.
자료를 찾으러 서점에 들러서 이 책 저 책을 뒤져보다가 우연히 발견한 책이었다. 일본 왕궁도서관 비슷한 곳에서 발견된 책을 그 곳에서 일하고 있던 한국인 직원이 발견하고 첵을 필사해서 밀반출해서 한국에서 펴낸 책이었다.
신라시대 화랑들의 모임에는 풍월주라는 최고 수장이 있었다. 이 수장중에는 역사에 나오는 김유신 김춘추등 역사에 나오는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들의 풍월주로서의 상황을 세심하게 기록한 역사책이었다. 소중한 기록들이었다.
그 책에는 놀랍게도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 신라의 중흥기인 지증왕, 법흥왕, 진평왕 등 5대외 왕을 모신 미실이라는 인물은 진골은 되는 왕족 핏줄이었고 특히
왕의 성관계를 주요 업무로 담당하고 있는 조금은 야릇한 일을 하는 인물이었다.
그 일을 색공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색의 기술을 전수하며 색을 연구하고 색을 공급하는 일이었다. 미모의 이 여인은 자신이 색을 연구하며 자신이 색을 이용하여 다섯명의 임금은 물론 당시의 유명한 인물....데층 디 섭렵하며 궁중에 새 아이들을 수없이 배출한 여인이었다. 어지간한 인물들은 다 미실과 얼키고 설겨있었다. 삼국사에서 장수왕 보다 더 오래산 늙은 진평왕을 모시며 권력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었다.
선덕여왕의 친동생인 선화공주와 서동요의 작자인 백제의 왕자이며 마지막 왕이 된 아명이 서동이며 나중에 백제의 무왕이 된 인물과 신라의 선덕여왕을 대비시키며 신라와 백제와의 관계를 수평으로 삼았다. 백제의 명망까지를 교직으로 다룬 거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다 된 드라마 원고 몇편을 들고 자신 있게 지인인 A감독을 찾아갔다. 감독은 읽어보겠다며 나에게 밥을 사주며 친절하게 전화드리겠다고 말했지만 연락은 6달이 지나도록 오지 않았다.
헌데 어느 날 그 방송사에서 드라마 예고 광고가 대대적으로 떴다. 새로운 사극이 다음 주부터 방송이 된다는 예고가 날마다 시간마다 방송이 되었다. 제목은 내가 써낸 제목과 같았다.
미실이가 등장했고 쌍둥이로 변조된 공주 선덕이 중동 지방까지 가서 살다가 여나믄 살이 되어 신라로 다시 날아오는 것으로 되어있다.
내 드라마에선 공주가 아니라 백제 왕자가 아버지의 정적을 피해 중동에서 로마까지 건너가 큰 거상이 되어 고향 백제는 못 가고 신라에서 거주하며 경주의 서시에서 신분을 감추고 큰 교역 상인으로 살며 신라 왕실과 얽혀가는 이야기로 시작되었다.
저작권 등록을 했기 때문에 협회와 또 의논을 했다.
협회에서는 또 갸웃둥했다. 대본을 전부 다 등록한 것이냐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아니라고 했다. 10편 정도의 대본을 쓰고 있는 중이었다. 경험이 많은 협회 사람은 사극은 기성 스토리가 있기 때문에 내용은 비슷하더라도 괜찮지만 똑같은 대사가 있을 때만 저작권이 채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저 쪽 작가는 시청률 올리기 위해서는 역사를 왜곡해도 된다는 사관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 절대로 스토리를 침법하지 않을 것이며 특히 대사를 잘 쓰는 사람이기 때
문에 저작권에 대한 상식을 갖고 썼음에 틀림이 없다.
내가 쓴 제목과 방송을 볼 수가 없었지만 결심을 하고 보기 시작했다.
선덕공주가 천명 공주와 쌍생아라는 설정은 심해도 너무 심한 역사 왜곡이었다.
첫 도입부는 내가 쓴 글과 너무도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선덕공주는 축복받지 못한 생명으로 아기 시절에 유모와 함께 중동으로 도망을 가서 어린 시절을 고생하며 살다가 돌아온다는 설정은 너무도 똑 같았다.
나의 스토리는 백제의 서동 왕자가 목숨의 위험을 받자 아버지의 근위 무사의 보호를 받으며 중동으로 도망가 큰 거상이 되어 돌아와 고국 백제로는 정치적 상황 때문에 돌아가지 못하고 신라로 와서 동시전에서 수입품을 파는 상인으로 살며 신라 왕실에 귀한 서양 물품들을 납입하며 왕족의 공주들과 인연을 맺어간다는 설정이었다 역사 드라마에서는 큰 스토리는 어쩔 수 없이 비슷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스토리를 어떤 설정으로 정하느냐는 드라마가 앞으로 나아갈 지표가 되며 모티브가 되는 것이다. 이 드라만 살면 안된다는 설정 때문에 중동으로 도망가 그 작가는 신라 왕조의 순서까지 바꿔가면서 내 작품을 비켜 갔다. 아버지와 아들의 연대기를 바궈치는 것도 서슴치 않았다. 내 작품과 다르게 하기 위해서 확실한 왕조의 연대기조차 거꾸로 갔다. 이건 왜곡 정도가 아니라 망동이라고 개탄이 갔다
그와 나는 전혀 다른 부류이기 때문에 같은 대사를 쓸 리가 없었다.
이야기는 조금씩 조금씩 손질하고 대사와 캐릭터는 바꾸고 대사는 아마도 토씨 조차도 다르게 쓸려고 했을 것이다. 저작권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상황이엇다.
나는 또 지고 있었다. 참을 수가 없었다.
니가 아끼던 후배였고 나와 작품으로 오랫동안 인연을 이어가던 감독이었다.
먼저 작가에게 전화를 했다. 그의 작품을 칭찬한 유일한 선배라며 나에게 무척 호감을 갖고 있던 후배였다. 그녀는 물론 펄적 뛰며 부인했다. 내가 뭐라고 씨부렸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물론 나는 A감독에게도 지꿎은 전화를 했다. 그는 내 전화인 것을 알자 묻기도
전에 변명부터 했다. 그 작품은 일 년 전부터 준비했기 때문에 내 작품과는 아무 런 관계도 없다고 했다. 그러면 내가 작품을 줄 대는 왜 가만히 있었느냐고 따졌을 것이다. 그가 뭐라고 대답을 했는지는 잊어버렸다. 심증은 가고 여기저기 비슷한 약점을 보이고 있는데도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을 낼 수는 없는 상태였다.
나는 재판이라면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심을 일지감치 하고 있었다.
일본에 갔을 때 다른 방송국과의 약속과 국장의 부탁을 외면하면서 까지 그의 손을 들어준 나의 의리를 그는 그렇게 갚았다. 방송국 넘들은 그런 태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때의 분노와 자괴감은 두고 두고 잊혀지질 않았다.
그 소재로 꼭 한 번 제작을 해서 박 리미 버전과 그 작가의 버전을 대비하고 싶은
욕심이 불쑥불쑥 치밀어 올랐지만 나의 시대는 지나갔다는 세월의 냉혹함을 꺠닫지 않을 수 없었다.
내 나이가 7순을 넘어 있었고 이번엔 진짜 암에 걸리고 말았다.그 사이 명박 근혜의 헬조선 시대가 지나갔고 문정부 시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