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四幕의 카덴짜(3)
암 환자는 석달에 한 번씩 병원에 가서 체크를 받아야 한다.
수술 받았던 자리에 혹 같은 것이 만져졌지만 내 배를 수술했던 주치의 선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혹은 점점 더 커지는데 의사는 매번 배를 만져 보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배는 거짓말 보태서 임신 6개월은 됨직해 보이고 이러다가 배가 터지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어 안성에 있는 외과에 가보았더니 탈장이 맞다고 했다. 수술을 받아야 되느냐고 물었더니 아직은 아니지만 꼭 하긴 해야할 것 같다고 말한다
정기 검사에 갔을 때 탈장인 것 같으니 봐 달라고 내 입으로 불었다. 의사는 언제나 똑같이 배를 만져보더니 그런 것 같다고 겨우 병명을 가르쳐 주었다. 탈장이 맞았다. 내 입장은 물어보지도 않고 석 달 후 몇 월 몇 일에 수술을 받으라고 했다. 날자 까지 박아서 말 한다. 그 날이 안 되면 수술 못 해주겠다는 뜻으로 보였다.
쫄아서 아무말도 안하고 석달 후에 얌전히 갔다.
의사가 바뀌고 없었다. 내가 병원을 바꾸지 않고 이왕 째 놓은 배 또 배째라 하고 계속 갔더니 의사 선생이 나보기가 역겨워 다른 병원으로 옮겨갔나...했지만 농담이고 잘 알려진 제법 큰 병원에 병원장으로 옮겼다는 말을 들었다.
본인은 그 때 쯤 다른 병원에 갈 것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떠난 후에 오라고 한 것이 아닌가 합리적인 의심을 해보며 혼자 웃었다. 탈장이 될까봐 퇴원을 늦게 하라고 했는데 참지 않고 진상을 부리고 퇴원했으니 다시는 수술해줄 생각이 없었을 테고 그래서 자신이 떠난 후 일주일 쯤으로 날자를 박아주었나 했다.
퇴원 후에도 몇 번이나 정기 검진을 갔기 때문에 오해를 풀 시간은 많았지만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았다. 변명하는 건 딱 질색이니까. 무뚝뚝한 대접을 받으면서도 굳이 계속 간 것은 나에게 잘해준 일에 대한 감사와 의사로서의 실력과 양심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드레싱 오더를 내리지 않아 열이 올라 밤새 헛소리를 하도록 며칠을 내버려 두었던 사실만은 절대로 잊을 수가 없지만 그렇다고 그리 죽지는 않았으니까. 내 생각이 맞았다. 병원이라는 곳은 병주고 약주고 약주고 병주고....그런 곳인 줄 알면서도 가지 않을 수 없는 곳이 병원이라는 웬수같은 쳇바귀의 세계이다.
많은 간호사가 갈리고 한 두 명 정도 남아 있었는데 아는 척하는 간호사도 있었고 모르는 척하는 이도 있었고 내가 생각이 나지 않는 이도 있었다. 새로 온 주치의 과장 선생은 마음 착하게 생겼는데 차트에 뭐라도 써 있기라도 했는지 인상하고는 다르게 되게 불친절했다. 병실에 잘 오지 않는 거야 뭐 그러려니 했는데 회진때 선하게 생긴 사람이 일부러 쌀쌀한 티를 내려는 것 같아 좀 웃겼다.
독심술을 배운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타인의 마음이 아주 잘 읽히는 때가 가끔 있어 곤란할 때가 있다.
그래서 심리를 그려야하는 드라마 작가를 하게 된 것일까.
수술은 다음 날 받았고 별 큰 문제는 없이 한 열흘 입원하라는 오더가 떨어졌다.
탈장 수술은 한 삼일만 입원하면 된다는 말을 어디서 주워듣고 왔는데 열흘이라니,
이번엔 코로나 때문에 보호자도 오면 안 되었다.
수술하고 며칠이 지났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지난 번에 진상을 부려서 쫓겨나서 이번엔 얌전하게 있으라는 날까지 있으리라 마음 먹었다. 대단한 수술도 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휴게실에 자주 갔는데 데굴데굴 구르는게 환자였는데 한 명도 없을 적도 있었다. 티비를 켜놓고 혼자 멍청하니 보고 있는 것도 마땅치 않아 심심해서 죽을 지경이다. 집에서는 책을 그렇게도 잘 읽는데 병원에서는 왠지 책이 읽혀지지가 않는다.
이번 까지 세 번 입원하는 동안 흡입기로 숨을 훅 들이마시는 치료를 20분씩 하루에 세 번 하는 치료를 계속 받았다. 이걸 하고 나면 머리가 어지럽고 기분이 나쁜 치료여서 하기 싫었지만 이 치료 덕분에 언덕을 헐떡거리지 않고도 올라갈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 때문에 1분도 에누리 하지 않고 열심히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약간의 공포가 몰려왔다. 우울증 증세였는데 그 때는 별 이유없이 아주 흐미하게 나타났기 때문에 우울증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그냥 기분이 나쁘다고만 알았다. 수술 때문에 신경 안정제를 복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리라.
나를 모른척하던 간호사가 들어왔다. 체크에 앞서 흡입기를 주었다. 그녀가 나가자 갑자기 흡입기를 하기 싫어져서 던져버렸다. 얼마 후에 간호사가 물건을 잔뜩 실은 트럭처럼 체크용 밀차를 밀고 들어왔다.
왜 호흡기를 불고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목소리가 상냥하지 않았고 나는 갑자기 두려워졌다.
그녀가 나를 해칠 것만 같았다. 흡입기를 집어주며 시작하라고 했다. 받아서 다시 던져 버렸다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명령을 했는지 어쨌는지 잊어버렸다. 어쨋던 하기 싫었다.
퇴원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아마도 안된다고 했을 것이며 나는 계속 퇴원을 하겠다고 고집했을 것이다.
나는 아들한테 전화를 걸어 퇴원하겠다고 했다 아들은 곧 오겠으니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간호사가 다시 들어와서 왜 보호자를 불렀느냐. 항의를 했다. 보호자 부를 자유도 없느냐. 쏘아붙였다.
그녀는 물론 코로나를 꺼내들었을 것이다. 난 퇴원하겠다고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아들이 와서 나를 달랬다. 수술 뒤끝이 아물지도 않았는데 이 여름에 퇴원하면 위험하다. 조금 더 참고 있어야 한다고 아들 특유의 설득력으로 조곤조곤 말했다.
옛날부터 아들의 설득에는 언제든지 져주던 버릇이 아직도 남아 있었는지 아님 공포감이 줄어들었는지 그런다고 끄덕였다. 쫓아온 여동생이 남아 있도록 의료진을 설득한 모양이다. 동생이 간병인으로 남기로 하고 아들은 돌아갔다. 이 글을 쓰면서 아들에게 그 때 상황을 다시 물어보았다.
간호사를 따로 만나 지난번에 수술받았을 때 수술 부위가 곪아서 열이 올라 헛소리까지 했던 일이 있었다고 말했단다. 그 일이 아마도 트라우마 비슷하게 마음에 남아있다가 수술을 받고 혼자 있으면서 갑자기 공황장애 같은 증상을 보인 것 같다. 신경안정제를 복용해야 잠을 자는데 여기선 그 약을 복용을 할 수가 없으니 잠도 못 자며 보호자도 없이 혼자만 있으니 생각보담 많이 예민해 있는 것 같다.
말 나온 김에 보호자가 있는 편이 간호사도 좋고 환자에게도 좋을 것 같다.
아들이 간호사에게 그런 설득까지 한 줄은 모르고 있었다. 아들의 설득력은 언제나 그럴 듯 했다.
난 모르고 있었다.
그 후 그 간호사는 보이지 않았으니까. 다른 병동으로 옮겨간 모양이다.
내가 왜 이런 흑역사를 고백하는지....
혼자 친정 어머니를 모시고 아이들 내아이 남의 아이 여섯 명을 키우며 힘에 버겁게 살아와서 멘탈이 강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역시 나이 탓인가?
이만한 일에 신경이 흐터지다니.
한동안 완치되었던 우울증이 여러 번 병원을 들낙이며 역시 데미지를 받고 있었던 모양이다.
언젠가 몇 년 전 우울증 약을 너무 강하게 처방받아 급작스러운 치매 증상을 일으켜 말도 어눌하게 하고 손님하고 식사를 같이하는데 질질 흘리고 먹었다는 후문도 들었다. 어느 병원을 한 달간 다녔다는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좋은 의사를 사방 팔방으로 찾아서 만났다. 나한테 맞는 약을 찾고는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 왔다.
2018년 11월부터 2020년 6월까지 일 년 좀 넘는 사이에 6 번이나 크고 작은 수술을 받은 잊어버릴 수 없는 해가 되었다. 그 사이에 두 번이나 넘어져 왼팔 오른팔이 번갈아 부러졌다.
눈에 미끄러져 넘어져 왼팔에는 000까지 박아넣었다.
이사간 집에서는 현관 밖에서 계단이 있다는 것을 까맣고 뒤로 벌렁 자빠지면서 오른 팔목 뼈를 다쳤다.
두 번 다 깁스를 하고 있는 시간은 얼마 안 되었어도 그 후유증은 상당히 길었다.
피아노를 칠 수가 없었고 오른손은 약간의 수전증이 남아있었다.
그 사실을 피아노를 가르치는 어린 제자가 알려주었다.
할머니 선생님....손이 떨려요. 아주 미세한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떨림을 10살도 안 된 소녀가 알아채었다.
단 한 번도 몸에 칼을 덴 적이 없었는데. 80을 바라보는 늘그막까지 된서리는 계속 진행이었다.
사람들은 내가 자신만만하고 화려하게 살아온 줄 안다. 그렇게 알도록 내버려 두었다.
내게 주어진 재능을 최대한 발휘하며 열정과 승부욕으로 사막의 생활을 이겨나갔다.
독주가 아니고 방송사와 협연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살아남을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언제나 이를 악물고 덤벼야 했으니까. 아니면 눈 뜨고 원고를 도둑 맞는다.
몇 번이나 아이디어도 도둑을 맞았지만 고소같은 흙탕물 싸움은 삼갔다.
완벽한 카덴짜를 연주하면서 명예롭게 살아가려는 안간힘이었다.
내 인생의 협주곡에서 어려운 과정들을 다 이겨내며 살아왔다고 자부하고 싶다.
실은 욕심일 뿐이지 자식이건 누구건 함께 동거하며 산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려운지 매 순간을 체험하고 있다. 신경 줄이 너무도 가늘고 복잡하고 예민하게 어우러져 있어서 혼자 살아야만 편안해 질 수 있는 성격이라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예전부터 혼자 사는 것은 외롭지만 괴롭지는 않다고 단언했다.
혼자 살아도 충분한 멘탈과 건강한 사고력과 많은 취미를 갖고 있다. 나는 설거지를 너무 사랑한다. 지저분한 음식 찌꺼기가 비누질로 하얗고 깨끗한 모습으로 변하는 모습이 기적이 언제나 상쾌했다. 그리고 음식을 만드는 것도 좋아한다. 맛있게 한다. 할 줄 모르지만 10번도 더 맛을 보기 때문에 어떡하든 맛있게 만들고야 만다는 것이다. 매일 라면으로나 끼니를 때우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괴로움을 택할 것이냐 외로움을 택할 것이냐.
'To be or not to be....'
외로움이냐 or 괴로움이냐.....계단을 한층 한층 내려오며 중얼거리는 햄릿 같은 생명 자체의 고뇌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이냐 하는 고민이었다. 한 번도 내가 선택한 적은 없고 다가오는 운명을 감수할 뿐이며 선택은 로망일 뿐이었는데도 언제나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하곤 했다.
마지막으로 물리적인 힘이 나를 습격했다. 엎지면 덮친다고 다 늙어서 암이라는 절벽이 앞에 다가와 섰다. 암은 초기였고 수술은 잘 되었고 큰 어려움은 없었다. 운명을 감수하며 살아온 긍정적 마인드가 제 2의 성격으로 정착하고 있었다.
멘탈 갑의 여인으로 중무장을 하고 있었지만 검찰 조직처럼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타인에게는 냉혹한 무소불위의 약 주고 병 주는 텃세에 마침내 멘탈이 무너지는 흑역사를 축적하고 말았다.
흙으로 이겨 정성스레 쌓았던 토담이 무너졌던 것이다.
아들 내외의 주의 깊은 보살핌과 다른 가족들에게 보호되어 잘 이겨 왔지만 자신을 향해 짓는 비소(鼻笑)는 용서가 없었다. 박 아무개 너....마침내 무너졌구나.
한 달 만에 혹은 며칠 만에 빠르게 이겨낸 사실이 감사할 뿐이다. 하나님께, 가족들에게, 그리고 걱정하고 같이 울어주었던 나의 어린 시절부터 동무들인 군계란에게.
네가 가족을 지켜냈듯이 지금은 가족들이 나를 지켜주고 있다.
2020년 2월 12일
장미피는 마을의 흔한 저녁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