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흔한 의지박약아, 어느 날 갑자기 러너가 되다.
러닝을 시작한 지는 만 3년 5개월쯤 되었다. 정확한 시작날짜를 알고 싶어 찾아보니 2020년 3월 23일, <런데이> 어플 초급자 코스를 이용해서 1분 달리고 2분 걷고를 반복하며 총 13분가량을 인터벌로 뛴 게 나의 첫 러닝 기록이었다.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당시를 떠올려보면 숨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차고, 현기증도 났던 것 같다. 내가 좀 엄살이 심한 편이기는 하지만 정말로 무릎도 시큰거리고 종아리와 발목과 발등이 연쇄적으로 뻐근해서 이게 건강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내 몸을 최단코스로 망가뜨리는 지름길이 아닐까 싶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러닝’ ‘무릎’ ‘발목’ ‘부상’ 이런 걸 검색해 봤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3년 5개월이 지난 지금, 나는 10km를 쉬지 않고 1시간 8분 만에 뛸 수 있다.
그 해에 내가 왜 러닝을 시작했더라? 기억을 더듬어본다.
그즈음, 그러니까 정확히는 직전 해, 2019년 여름에 유명 제작사와 작품 계약을 하며 드라마 메인작가로 데뷔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마침내 내 눈앞에 성큼 다가왔는데, 혹독하게 스스로를 몰아치며 전력질주를 하고 싶은 나의 마음과 달리 몸뚱아리는 영 협조적이지가 않았다.
카페에 나가서 글만 쓰려고 앉아있으면 수시로 머리가 멍해지고 허리는 뻐근해오고, 컨디션 난조로 인해 작업이 좀처럼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자 마음속 초조함 때문에 몰입이 더더욱 쉽지 않은 악순환이 이어졌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뻔한 말에 그때 처음으로 뼛속 깊이 공감했다. ‘이런 몸뚱아리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는 위기감이 자꾸만 해일처럼 덮쳐왔으므로.
그래서 수영과 요가 등 흥미로웠지만 결코 정을 붙이기는 쉽지 않았던 여러 운동을 전전하다가 유명 작가들이 러닝에 꽤 푹 빠져있다는 걸 알고 나서 문득 나도 러닝이 해보고 싶어졌다. ‘그래. 작가라면 러닝이지!’ 운동을 시작하는 데는 이런 허영과 허세가 아주 많은 도움이 된다. 경험상.
아무튼 강습 시간을 꼭 맞춰야만 하는 수영, 요가 같은 레슨형 운동과 달리 달리기는 아무 때나 원하는 시간에 할 수 있고, 대단한 장비가 그닥 필요하지도 않다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충동적으로 나이키매장에서 러닝화를 하나 신어 보고 구입한 뒤 그다음 날 곧바로 집 근처 천변에 달리기를 하러 나갔다.
‘뛴다’는 행위는 성인이 된 후로는 꼭 타야만 하는 버스를 아슬아슬하게 놓치기 일보 직전, 혹은 지금 꼭 건너야만 하는 횡단보도 신호등이 5초 미만으로 점멸을 알리고 있을 때... 그럴 때나 끽해야 5초 정도 하는 거였는데, 십몇 년 만에 천변에 나가 어플 코치의 티칭에 따라 1분을 허덕 허덕 뛰고 나자 심장과 폐가 동시에 ‘이게 뭐 하는 짓이냐’며 거칠게 자기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얼마나 연약한지 알면서’, ‘왜 안 하던 짓을 하냐’, ‘이러다 너 죽는다’ 뭐 대충 이런 항의였던 것 같다.
하지만 온몸으로 느껴지는 신선한 공기와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온갖 풍경을 유일한 재미 삼아 아무 생각 없이 뛰는 경험은 여태껏 느껴본 적 없는 생경한 황홀감도 동시에 안겨줬다.
나는 러닝을 마치고 인터넷 세계를 정처 없이 탐색해 본 끝에 러닝을 처음 하는 초보들의 경우에 다리 근육이 부실한 경우가 많아 무릎 통증이 유발될 수 있으니 헬스로 허벅지 근육을 보강하면 무릎 부상을 방지할 수 있다는 설명이 꽤 합리적이라고 생각해 얼마 뒤 불도저처럼 헬스까지 등록해 버렸다.
나를 처음으로 가르치게 된 PT선생님의 ‘운동 목적이 뭐냐’라는 질문엔 이렇게 대답했다. ‘러닝을 할 때 무릎이 아파서 다리 근육을 좀 키우고 싶어요.’ 그렇게 헬스도 시작한 지 어언 3년이 넘었는데 지금 나는 데드리프트를 꽤 정확한 자세로 내 몸무게만큼은 들 수 있다.
3년 5개월 동안 내가 혼자서 달리기를 즐겁게 했던 날은 초반 1년 정도에 불과하다. 초반의 폭발적인 아드레날린과 엔도르핀은 시간이 지날수록 고갈되어 갔다. 달리기가 좀처럼 즐겁지 않고 지루했다. 분명 달리기를 하는 달과 하지 않는 달(한여름이라던가, 한겨울이라던가)의 체력 격차는 있으니 달리기가 매우 좋은 운동이라는 건 알겠는데 비슷한 풍경을 매일 보며 매일 비슷한 속도로 비슷한 거리를 달리다 보니 간사한 내 뇌가 더 이상 ‘황홀감’을 느끼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다 우연히 친한 동생들과 뜻이 맞아 일주일에 한 번씩 같이 러닝을 하기 시작했는데 혼자 달릴 때와는 다른 재미가 느껴졌다. ‘이래서 사람들이 러닝크루 같은 동호회를 하나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운동을 한다는 것은 이점이 많았다. 일단 운동이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운동 겸 사교 모임’으로 인식되어 ‘운동좋지만운동하러나가기싫어죽겠어’모드가 자동 해제 되고, 그날의 목표치를 함께 설정해 놓으면 설령 중간에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처럼 솟아오를 때에도 실제로 포기하는 경우는 잘 없었다. 본새가 이만저만 훼손되는 게 아니었기에.
게다가 함께 달린 뒤, 땀에 흠뻑 젖은 채 음료 같은 걸 나눠마시며 뿌듯한 눈빛을 공유하는 그 순간은 이상하게 혼자서 벅차오를 때 보다 아드레날린 방출량이 2배는 족히 넘는 느낌이었다. 세상에 대고 거의 ‘이봐! 이렇게 대단한 나를 봐! 우리, 제법 멋지지 않아?’라고 고래고래 고함이라도 치고 싶은 기분... 과장을 보태면 그렇다는 거다.
아무튼 그렇게 함께 달리는 것에 중독이 되어가다 보니, 저절로 혼자 뛰는 것은 더욱 고역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같이 뛰는 동생들과는 주말 시간대를 맞추기가 쉽지 않아 서로가 피로해질 때도 있었고 남동생들이다 보니 그들이 여자친구라도 생기는 날엔 나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
그래서 여러 날의 고민 끝에 소모임이란 어플에서 동네 러닝클럽을 찾아 가입했고, 꽤 활발한 방 분위기에 반가운 마음으로 녹아들어 1년여 가량을 사람들과 즐겁게 뛰었으나 운영자가 경기도 외곽으로 발령이 나며 모임은 순식간에 공중분해가 되어버린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두 번째로 내가 소속될 러닝클럽을 찾아 나섰다. ‘러너’로 살기로 결심한 내게 ‘같이 뛰는 친구들’은 이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첫 번째 모임보다 더 지근거리의 운동장과 한강을 기점 삼아 뛰고 있는 한 러닝클럽을 오픈카톡에서 발견했으니, 그 모임의 크루들이 이제부터 내가 하려는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된다.
제가 브런치에서 쓰고 싶은 첫 시리즈의 주제는 <콩국수를 좋아하는 러너들>입니다.
저는 글을 쓰며 쉽게 피로해지곤 하는 하찮은 체력을 보강하기 위해 근 3년간 꾸준히 러닝을 해왔는데요,
혼자 뛰면 지루해서 오래 뛸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최근 동네 러닝클럽에 가입해 크루들과 함께 러닝을 해오고 있습니다.
우리 클럽의 특징은 '열정 광인'이 많고 '러닝'뿐만 아니라 다들 '콩국수'에 미쳐있다는 건데요,
평범하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저희 러닝클럽 사람들과의 일상을 통해 경험한 운동과 미식,
그리고 관계에 대한 고찰을 저만의 시각으로 신선하게 풀어보려 합니다.
-박사랑의 브런치 작가 신청서 중-
P.S. 생활밀착감이 있으며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기록하고 싶은 나의 이야기가 어떤 것이 있을까 고민하던 중에 ‘콩국수’라는 좋은 소재를 던져준 러닝클럽 멤버, 반포밍씨 잠수공파 ‘밍밍’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