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명록

by HANA


방명록






다시, 페이지를 넘기며

우리가 만난 적이 있음을

증명하는 시간



한때 존재했던 이름들에

제법 낯가림을 느끼고

뭐 좋은 일이라고

남의 죽음 앞에서 또렷이 빛내는 검은 字들



이름이 글자가 되고

뭉텅뭉텅 음절로 썰어지고

음소로 선으로 점으로

그리고



하나 둘 셋

이제 노인이 된 아이가

숫자를 세며 눈감는 동안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어느 殘香



너는 어둠을 좋아했고

너는 사과 씹는 소리를 소름끼쳐 했고

너는 잠을 자지 못했다



시각을 잃는다는 일은 두려운 일이야

눈에 보이는 것을 부여잡고

필사적으로 살고자 했고

그렇게 나는 필사적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사라져가는 모든 것들을 붙잡아야 해



그러다 문득

사라진 게 아니라 부재한 게 아니었을까

존재의 흔적을 확인하려

무턱대고 페이지를 넘겨보곤 했다



모두가 죽어가는 마당에

마지막에서야 피어오르는 너의 香

너는 왜 사라지지 않는가

아니, 너는 왜 존재했는가

너는 왜 보이지 않았는가



사랑을 노래했으나 사랑을 해본 적은 없었다

사랑을 갈구했으나 사랑을 믿지 않았다

이 모든 게 시각을 잃어서 그런 거야

시각을 잃는다는 일은 두려운 일이야



다시, 페이지가 넘어가고

우리가 한때 만났었음을 증명하며

짙은 香이 숨통을 조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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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의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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