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문학인이 된 출발점이 무엇인지 생각해 봤다. 십여 년 전 신문을 읽다가 ‘무료 아동문학교실’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무료라고? 그것도 1년씩이나? 그동안 문학에관심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특별한 제스처를 취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동문학가 양성을 위한 아동문학교실이라니? 한번 가볼까? 어느 출판사 한 공간이 강의실로 사용되었고,주관은 혜암아동문학회였다. 나는 7기로 등록을 했다.당시에는 80이 넘으신 아동문학가 혜암 최춘해 선생님이 지도를 하셨다.
월요일 오전에 수업을 들었는데, 매주 일기 검사를 했다. 내용은 보지 않고 일기장을 휘리릭 넘기면서 열심히 썼나 안 썼나 만 보셨다. 선생님은 팔십이 넘으셨지만 제자들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셨다. 온화하고 인자하셨다. 일기장을 검사한 후에는 늘 “어이구야, 열심히 쓰셨네요.” 웃으면서 칭찬하셨다. 어른이 되어 일기를 열심히 썼다고 칭찬을 받으니 동심으로 돌아간 듯했다. 어린 시절 일기 잘 썼다고 칭찬받던 그때처럼.
한 두 어달쯤 수업을 받다가 집안 사정으로 그만두고 나중에 다시 오겠다고 했다. 매년 신문에는 아동문학교실 수강생 공고가 났다. 볼 때마다 ‘올해도 안 되겠다. 다음에 가지 뭐.’ 미루기만 했다. 3년 후 최춘해 선생님이 10기를 끝으로 마지막 수업을 하신다는 기사가 났다. 선생님 인품에 끌렸던지라 이제 더 미루면 안 되겠구나 싶어 다시 찾아갔다. 책 모임 언니들에게 같이 배우자고 했고, 우리는 10기로 수료했다.
수료 한 두 달 전쯤 이미 시로 등단한 한 수강생이 지역에서 발행하는 문학잡지에 동시를 투고해 보라고 했다. “아유, 제가 벌써 무슨 등단이에요.” 그때까지 나는 등단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냥 연습 삼아 한 번 내봐요.” 자꾸 권하길래 투고를 했다. 그런데, 40세 어느 날 당선 됐다는 문자와 함께 전화가 왔다. 그게 뭐라고 나는 소리까지 질러가며 환호했다.
박완서 선생님이 40세에 등단을 하셨다. 나도 마흔에는 등단이란 걸 꼭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긴 했다. <대구문학>, 그게 시작이었다. 후에 [푸른 책들] 출판사가 이끄는 ‘푸른 동시놀이터’에 동시가 추천 완료 되면서 본격적으로 동시인이라는 길을 걷고 있다.
아직은 무명 동시인에 가깝다. 동시에 발을 들여놓고 동시를 하나하나 써 내려가다 보니 2022년 8월 30일에는 첫 동시집 <고래가 살지 않는 집>을 출간했다. 책을 몇 권씩, 수십 권씩 펴내는 작가분들에게는 어떨지 모르지만 내겐 어마무시한 큰 일이었다.
등단을 했을 때 딸아이에게 “엄마 이제 작가다.” 그랬더니 “엄마는 책도 없으면서 무슨 작가야?” 딸이 웃으면서 이런 말을 했다. 첫 책을 내고 나서는 “엄마, 이제 진짜 작가다.” 이번에는 또 “엄마는 책이 달랑 한 권 밖에 없잖아.” 이렇게 딸은 나를 계속 도전하게 만드는 말을 한다. “딸, 엄마가 성장하는 것은 다 니 덕이다. 두 번째 책 출간하면 그땐 제대로 한턱 쏠게.”
아무튼 그때 내가 아동문학교실 수업을 듣지 않았더라면,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았더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누가 꿈을 물으면 작가가 꿈이라고 대답을 하면서도 그에 준하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사는 게 빡빡하다고 읽고 쓰기에 몰입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내가 미친 듯이 읽고, 썼더라면 지금 뭐가 돼도 됐을 텐데, 우스개 소리를 곧잘 한다.
문학인으로 첫 시작은 이렇듯 혜암아동문학교실이다. 지금은 최춘해 선생님 제자들이 월요일 오전반, 화요일 저녁반으로 나누어서 수업을 이어가고 있다. 주 1회 수업으로, 여름방학에는 두 달 쉬고, 1년간 이어지는 오프라인 무료 수업이다. 올해는 22기 수강생을 모집한다. 든든한 문우들도 이때 얻게 되었다.
지역아동센터에서 평범한 독서지도교사로 살아가던 내게 동시인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첫 책을 내고, 브런치 작가로 물꼬를 터준 것도 바로 그 문이다. 지금은 독서논술 프리랜서 선생님으로 수업하는 아이들과 재미나게 동시를 가지고 놀고 있다. 평일에는 날마다 동시를 필사하며 단톡방에 인증도 남긴다. 어제는 함민복 시인이 쓴 동시 ‘앵두나무 저울’을 필사하며 동심으로 돌아갔다. 필사 글 밑에는 짧은 생각도 덧붙인다. 팍팍한 내 삶에 고소한 들기름 촉촉하게 얹어주는 이 모든 일들의 시작에는 무료아동문학수업이 있다. 자자, 무료아동문학수업에 관심 있는 분들은 어서 초록창으로 가시길.
앵두나무 저울
함민복
참새가 앉으면
낭창낭창 앵두나무 가지가 휜다
참새가 날아가면
붉은 앵두 서너 알 떨어진다
참새가 더 조심했어야 할
참새 마음의 무게가
달콤 달콤 달콤
앵두 서너 알인가
<노래는 최선을 다해 곡선이다> / 함민복 / 문학동네
-어릴 때 우리 집 장독대 밑에는 앵두나무가 있었다. 빨갛게 익은 앵두를 가득 따서 쉬지 않고 한 알씩 집어 먹던 기억. 어른이 되고 나서는 그때처럼 맛있는 앵두를 먹지 못했다. 그 앵두가 그리운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