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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런인생 Jul 17. 2024

1994년은 매우 분주했다

1994년

나는 1994년에 대학에 들어갔다. 그해는 뭐랄까 모두들 바쁜 해였다. 우선 OJ Simpson이 백인 마누라를 죽이고 도망치는 모습이 TV에서 생중계된 해였다. 미국이 북한 경수로를 폭격할지도 모른다는 뉴스가 떠돌았다. 라디오에서는 Ace of Base와 Boyz II Men 이 차트를 휘어잡고 있었고 뜬금없이 자마이카풍의 레게 음악도 유행을 탔다. 한국에서도 자메이카는 가보지도 않은 어중이떠중이들이 레게뮤지션 행세를 하면서 대충 비슷한 노래들을 내놓기도 했다. 인기 있는 R&B 가수들 중에는 Boyz II Men 외에도 R. Kelly 가 있었다. Aliyah라는 열다섯 살짜리 가수가 여자친구라는 소문이 있었지만 뭐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때는 서양에서도 그런 게 범죄라는 인식이 생각보다 옅었다. 같은 고등학교의 한 백인 여자애는 친구들에게 새로 생긴 자기 남자친구 이야기를 하면서 남친의 나이가 서른이라 성숙한 데이트를 해서 너무 황홀하다고 그랬던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 주위에서 여고생들을 꼬시려고 하교 시간에 차를 몰고 배회하는 아저씨들도 있었다.  지금은 법이 강화되어서 설마 아직도 그런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무렵 컴퓨터의 수준도 급속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인텔의 펜티엄 칩이 출시되었고 더 이상 삑삑거리는 전자음만 나오던 컴퓨터가 아니라 16비트 사운드와 cd-rom이 가정용 PC에도 달려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로는 컴퓨터에서 동영상이 나온다는 것은 혁명적인 개념이었고, 이런 걸 ‘멀티미디어 PC'라고 불렀다. 아직 인터넷은 대중화되어있지 않아서 그런 컴퓨터를 사면 '멀티미디어 백과사전' cd가 딸려 왔었다. 백과사전 몇십 권이 cd 한 장에 들어가다니! 부모님들은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그게 30년 전이다. 지금은 cd도 백과사전도 거의 보기 힘들다. 그러고 보니 컴퓨터도 이제는 사는 사람이 예전보다 많이 줄었다.


6월에는 졸업시험이 있었다. 당시 BC주에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려면 주 정부에서 관할하는 졸업시험에서 60점 이상이 나와야 했다. 장학금을 받고 싶으면 문제를 몇 개 더 풀어야 했고 점수가 어느 정도 좋으면 천 달러를 주었다. 그리고 9학년 때부터 성적이 어느 정도를 넘으면 매년 이백 몇십 달러 정도의 장학금을 줬는데 그 돈은 고등학교를 졸업해야 수령할 수 있었다. 웬만한 대학교에는 신입생들에게 주는 장학금이 여러 종류가 있었는데, 나는 신청하는 법도 몰랐고 집에 돈이 없다는 사실도 잘 실감이 나지 않았기 때문에 뭐 그 돈 굳이 받지 않아도 별 문제없겠지 생각했다. 그때는 학비도 쌌다. 내 기억으로 토론토대 일 년 학비가 3천 불 정도였고 기숙사비가 5천 불 미만이었다.


졸업식 후에는 Prom night 이 있었지만 예전과 달리 이번 학교에서는 한국 사람들과 주로 어울려 놀았기 때문에 Prom에 별로 미련이 없었다. 조금만 공을 들였으면 같이 갈 여자애도 있었지만 나는 조금 있으면 밴쿠버를 떠날 처지인 데다가 인간관계를 세련되게 유지할 능력도 없었기 때문에 Prom을 가지 않고 한국 사람들과 캠핑을 다녀왔다.  그렇다고 학교에서 한국 사람들끼리만 논 건 또 아니었다. Grad Council (한국으로 치면 학생회)에서 멤버로 들어오라고 권유를 하는 바람에 거기서 활동도 조금 했었고, 물리 성적이 좋아서 물리 올림피아드 대표 중 하나가 되기도 했었다.  미적분 선생은 종종 학생들에게 앞에 나와서 문제를 설명하면서 푸는 과제를 주었는데, 평소에 별로 말이 없던 내가 나가서 선생처럼 떠들면서 설명을 하자 아이들은 그 후로 자주 나에게 인사를 하고 숙제를 물어보곤 했다.  펑퍼짐하고 사람 좋아 보이는 금발 여자애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고 숲 속을 산책한 뒤 거절을 당하기도 했었다. 아마 내가 상황을 오판하고 너무 일찍 어깨동무를 해서 그랬을 것이다. 12학년 들어와서는 그런 바쁜 일들이 많았다. 한국 아이들은 인종차별 때문에 백인들과는 친해지기 어렵다고들 했지만 나는 딱히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으나 한국인들과 어울리는 것이 훨씬 편하기는 했다. 내가 백인이었어도 친구가 아주 없던지 아님 이해심이 아주 많지 않으면 굳이 한국인들과 친하게 지낼 이유는 없을 것 같았다.


아버지는 내가 “그 어려운” 토론토대에 합격해서 간다고 사람을 만날 때마다 자랑을 했다. 나이 지긋하신 분들은 대부분 축하를 해 주셨지만 내 또래 아이들이 있는 사람들은 별로 탐탁지 않아 했다.  어떤 분은 가서 공부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편지와 같이 돈도 주셨다. 빼먹을 것 하나 없는 우리 같은 사람한테 그렇게까지 해 줄 필요는 없었지만 주변에는 다행히도 그런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 12학년 들어와서 성적이 떨어지자 "이따위로 하려면 동네 칼리지나 가라" 며 호통을 치던 때와는 정반대였다. 아버지는 머리가 좋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성적이 잘 나올 거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나의 성적표에 A대신 B가 보이기 시작하자 왜 성적이 떨어졌는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고 그냥 돌대가리라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돌대가리 자식에게는 짜증밖에 낼 일이 없었다.


 솔직히 그때 나의 생각은 두 가지였다. 첫째, 내가 공부를 못 따라가서 대학에서 쫓겨나면 그때는 어쩌려고 아버지는 저렇게 자랑을 해 대는 것일까. 하지만 자식 자랑하는 사람들은 대개 먼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다. 두 번째로 나는 토론토 대학을 그렇게 어렵게 들어갔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토론토대에 7개의 칼리지가 있다는 것도 몰랐고 어떤 칼리지들은 다른 곳보다 입결이 높다는 것도 몰랐다. 희망 칼리지 세 군데를 적어내라 해서 나는 아무 데나 적어냈지만 다행히 입학허가가 나온 빅토리아 칼리지라는 곳은 그리 나쁘지 않은 곳이었다. 내 눈에는 나보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만 보였다. 미국 대학도 못 가는 나는 참 별거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랬기 때문에 그럼 토론토대도 못 가는 애들은 도대체 얼마나 공부를 못하는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게 대학 입결로 나눌 수 없다는 것은 나는 아주 나중에 알았다.


아버지는 내가 토론토로 떠나기 한 달쯤 전에 집을 팔았다. 가게는 예전에 날아갔으니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내가 원래 알던 동갑내기 한국 아이의 부모님이 우리 집을 샀다. 그 집은 우리와는 달리 장사를 잘해서 경제사정이 넉넉했다.


이사하기로 한 날은 내가 토론토로 떠나기로 계획한 날이었다. 나는 같은 값이면 비행기보다는 불편하더라도 기차로 대륙을 횡단해서 가고 싶었다. 중간에 잠깐씩 내려서 쉬다가 다시 다음 기차를 타고 하는 식으로 가면 거의 일주일이 걸리는 거리였다. 아버지는 좋은 생각이라고 했고 나는 기차표를 한참 알아보고 있었다. 그런데 날짜가 겹치자 아버지는 기차여행은 그만두고 이사를 도운 다음에 비행기를 타고 가라고 했다. 돈이 없어서 아는 사람에게 우리 집을 판 것까지는 그런가 보다 했지만 이삿짐센터를 부를 돈도 없어서 우리끼리 짐을 날라야 하는 처지가 한심했고 툭하면 가족으로 노동력을 때우려는 아버지도 무능해 보였다. 뭐 이따위 집이 있냐고 신경질을 내면서 나는 방문을 닫았고 한참 뒤 아버지는 나를 불러낸 뒤 땅을 내려다 보면서 그냥 원래 계획대로 기차를 타고 가라고 했다. 나는 조금 생각에 잠겼고 그냥 비행기를 타고 가겠다고 했다.  


오랫동안 나는 아버지가 돈을 벌지 못하는 이유는 무능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흔히 생각하는 대로 '게을러서' 무능한 경우는 생각보다 적다. 아버지는 항상 열심히 일했지만 불운했다. 성공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조건은 운이다. 현명한 부모를 만나야 하고 명석한 두뇌와 끈기도 물려받아야 하고 주위 환경도 중요하다. 이것들 중에 내가 내 마음대로 고를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노력만으로 누구나 부자가 된다고 말하는 사람은 물정을 모르거나 사기꾼이다. 한쪽 다리가 없는 사람에게 노력만 하면 달리기에서 1등을 한다고 말하면 안 된다. 그런 사람은 달리기 말고 다른 걸 알아봐야 한다.


우리는 미니밴으로 새 집과 옛날 집 사이를 대여섯 번 왕복을 하면서 짐을 날랐다. 다행히 2 킬로미터밖에 되지 않는 거리였다. 새로 이사 간 집은 우리가 처음 이민 와서 살았던 그 타운하우스였다.  토론토행 비행기 표는 같은 학교의 한국 친구네가 운영하는 여행사에서 싸게 해 주었다. 나는 그 와중에도 대학 홍보 팸플릿에서 본 고풍스러운 건물들을 생각하면서 일단 거기 가면 여기에서처럼 궁상떨지 않으면서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홍보책자에 왜 기숙사 내부 사진은 하나도 없는지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그래도 개인 방에 화장실은 하나씩 딸려 있겠지 하고 내 멋대로 생각했다. 나도 그런 면에서는 꼼꼼하지 못했다.


주위의 다른 한국 아이들은 나와는 달리 대부분 순탄하게들 대학에 입학했다. 한 형은 입학 축하 선물로 일제 스포츠카를 선물로 받았고 다른 아이는 당시 한국 드라마에서 안재욱이 몰던 하늘색 BMW 오픈카를 받았다. 아버지가 조선일보 기자로 일해서 뇌물을 많이 받아서 돈이 많은 집이었다. 타지로 유학 간 사람들은 학비 이외에도 월 천 달러 정도의 용돈을 집에서 부쳐주었다. 그래도 모자라다고 다들 볼멘소리를 했다. 아이들은 부모의 감시에서 벗어나게 되어 즐거워했고 부모들도 일단 대학을 들어가면 아이들을 풀어 주었다. "대학에 들어갔으면 놀아야지."  고등학교에서 점수에 목을 매던 아이들은 대학에 가자 약속이나 한 듯 놀기만 했다. 술을 너무 먹어서 위에 구멍이 나서 응급실로 실려가기도 했고 남자친구를 생전 처음 사귀었다가 실연당하자 자살기도를 한 아이도 있었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대학만 들어가면 만사가 잘 풀릴 줄 알았다가 막상 대학 졸업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당황했다. 유급은 비일비재했고 학교에서 학위를 따지 못하고 나간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래도 다들 잘 풀렸다. 그때는 외국에서 왔다고 하면 아무리 꼴통이래도 한국에서 좋은 직장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려면 돈이 필요했지만 그 정도 돈은 그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자식이 자기 앞길을 혼자서 고생하며 해결하면서 사는 것과 필요할 때마다 부모가 도와주면서 편하게 인생을 사는 것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과연 사람들은 어느 쪽을 선택할까. 예전에는 전자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그래도 적지 않았지만 요새 부모들에게 물어보면 "애를 뭐 하러 고생을 시켜... 내가 해줄 수 있음 해주는 게 낫지" 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한국의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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