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
대학생은 아이와 성인 어딘가의 뭔가 애매한 위치에 있다. 아이의 껍질을 완전히 벗지 못했지만 대학생이라는 지위는 내가 어디 나가도 무시받지 않을 수준의 사람이라는 착각을 일으킨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대학생들이 얼마나 덜 떨어진 풋내기들인지 잘 알고 있지만 굳이 그런 걸 상기시키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착각은 첫 직장을 잡을 때까지 계속된다.
대학에 들어가면 예전보다는 훨씬 많은 종류의 사람들과 얽히게 된다. 듣도보도 못한 곳에서 살다가 온 사람들도 만나게 되고, 생활방식이 나와는 너무나도 다른 사람들도 본다. 나는 저녁에 잠을 잘 때 잠옷으로 갈아입지 않고 그냥 자는 사람을 대학에 들어가서 처음 보았다. 그렇게 살았어도 죽지 않고 멀쩡히 대학까지 온 걸 보면 사실 잠옷이란건 필요가 없는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기존의 믿음을 뒤흔들기에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 만한 게 없다.
누구나 결혼하기 전에 되도록이면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경험을 쌓아서 사람 보는 눈을 어느정도 만드는 게 좋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에 대해 근거없는 기대를 가지게 된다. 그래서 집에서 엄마 말 잘 듣고 교회에서 어른들의 주선으로 비슷한 계층의 사람와 중매결혼을 한 사람들이 나중에는 저 미친년이 돈을 펑펑 쓰네 저 또라이가 또 사업을 벌리네 하면서 죽자살자 싸우는 걸 많이 본다. 자동차를 사기 전에 여러 딜러들을 방문해서 시승을 해야 하는 것처럼 사람도 마찬가지다. 중매로 3개월만에 속전속결로 결혼해서 임신부터 서두르는 사람들은 얼마나 세상을 만만하게 보는 것일까. 그런 면에서 볼때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던 건 나에게는 다행스런 일이었다.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체대생이 있었다. 그는 나보다 한학년 위였고 신입생들에게 걸핏하면 욕지거리를 했다. 그는 부업으로 정자를 팔았다. 건당 200불이 좀 넘는 당시에는 많은 돈이었다. 금발에 파란눈의 백인인데다가 토론토 대학생이기까지한 그의 정자는 수요가 많았다. 가끔씩 여자친구가 도와줄 때도 있다고 했다. 너는 돈 쉽게 버는구나라고 내가 그러자 그는 딱히 그렇지만은 않다고 했다. 주기적으로 성병검사를 해야 했기 때문에 검사날이면 면봉 같은 것을 요도에 쑤셔넣어야 했고 그런 순간에는 200불은 별로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쉽게 돈 버는 방법은 찾기 힘들다. 지금쯤이면 그의 후손들이 몇명이나 만들어졌을지 궁금하다.
스페인에서 온 유학생도 있었다. 아버지가 엄청난 부자라고 했다. 호텔에서 살아도 되지만 자기가 하도 방탕하게 살아서 아버지가 훈육 차원으로 이런 후진 기숙사에 들여보냈다는 것이었다. 그는 친화력도 좋았다. 아무에게나 말을 잘 걸었고 돈도 원없이 썼다. 부자들은 구김살이라는게 없다. 그는 기숙사 방에 대형 스테레오 시스템을 사다놓았고 주말이면 크게 틀어놓고 파티를 했다. 맘에 드는 게 있으면 뭐든지 샀다. 그는 얼마 후 이웃 여자 기숙사의 신입생과 사귀게 되었다. 얼굴은 별로였지만 몸매는 좋고 이야기해 보면 아 이 사람은 뭔가 그렇게 아는게 많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여자였다. 그는 여자에게 유럽에서 근사한 여름 휴가를 보내자고 했다.
"페라리를 빌려서, 스페인에서 파리까지 가는거야"
"페라리는 트렁크가 작은데..."
"트렁크가 뭐가 필요해? 가는 곳마다 다 새로 사면 되지?"
그러나 그는 얼마 후 여자를 전화로 차버렸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얼굴을 보면 볼수록 못생긴 얼굴이 질린다고 나에게 말했다.
"그래도 같이 잠은 원없이 잤으니 본전은 뽑은거지 뭐"
여자는 우리 기숙사로 친구들을 데리고 쳐들어와서 전남친을 찾았지만 그는 이미 어디로 내뺀 후였고 그녀는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다. 여자는 스페인을 정말로 좋아했던 것 같다. 바람둥이라고 남자를 욕할 만도 하다. 하지만 법은 눈으로 볼 수 없는 피해를 입혔을 경우 죄를 묻지 않는다. 거짓말을 하건, 바람을 피건, 일방적으로 차버리건 그건 개인의 자유고 사회생활의 일부다. 대학에 막 들어온 어린이들은 이 사실을 모른다. 연애에도 엄격한 규범이란게 존재한다고 믿지만 막상 그 규범을 깬 사람이 손해볼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건 나중에야 알게 된다.
그는 학년이 끝나던 해 모든 과목을 낙제하고 스페인으로 다시 돌아갔다.
릭이라는 2세 한인도 있었다. 자신은 2세인데도 한국말을 잘한다고 자랑했지만 웬지 내 앞에서는 한번도 한국말을 하지 않았다. 전형적인 못생기고 살찐 한국인의 외양을 가지고 있었고 걸음도 팔자걸음이었지만 항상 자신이 흑인 갱스터인것처럼 행동했다. 그의 전공은 영문과였다. 지금은 어떨런지 모르지만 문학 한다고 개폼 잡는 남자들이 의외로 여자들이 잘 꼬였다. 뭘 모르는 여자들에게는 허풍과 개폼이 지성과 고뇌로 보이는 것이다. 살찐 하회탈 같은 얼굴로 투팩이 어쩌고 갱스터라이프가 어쩌고 하는 걸 들으면 뭔가 미묘한 기분이 들었고, 그도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걸 눈치를 챘는지 나에게 별로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하루는 그가 언젠가 부탁한 비디오를 갖다주러 아무생각 없이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더니 그가 방 구석에서 새로 만난 여자와 한참 분위기를 잡고 있었다. 당황한 그는 황급히 나를 내보냈고 그 이후로 우리의 사이는 더 벌어졌다. 여자를 꼬실 때는 적어도 문은 잠가야 하는 게 기본 아닌가. 그도 역시 이듬해 토론토대학을 견디지 못하고 떠났다. 듣기로는 작가가 되기 위해서 무작정 뉴욕에 살러 간다고 했다. 한국 사람들은 무조건 큰물에만 가면 어떻게든 될거라는 이상한 믿음이 있다.
토론토 음대에 다니는 덩치큰 백인 성악가도 있었다. 그는 캐나다 성악계의 떠오르는 샛별로 인정받았지만 아쉽게도 성악 이외의 분야에서는 많이 모자란 사람이었다. 그는 남의 말을 잘 믿었고 속기도 자주 속았다. 한번은 장난으로 미국 군대가 지금 온타리오 호수를 건너 토론토로 진격하고 있다고 사람들이 입을 맞추어 호들갑을 떨자 사색이 된 그는 뭘 챙겨서 피난가야 하냐고 소란을 피웠다. 그는 놀리기 딱 좋았기 때문에 자주 희생양이 되었다. 한번은 그가 없는 사이 기숙사 하우스메이트들이 방문을 따고 들어가 침대와 책상을 포함한 그의 방 내부를 기숙사 앞 마당에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그런데 그의 물건들을 옮기는 도중 여기저기 숨겨놓은 포르노잡지도 발견되었고 그가 수업에서 돌아올 즈음 마당에 재현해놓은 그의 방에서는 사람들이 다같이 사이좋게 잡지를 보고 있었다. 그는 매우 분노했고 자기 문 밖에 "세상에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 의 리스트를 적어서 붙여놓았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는 다시 사람들과 웃고 떠들면서 전날밤에 여자친구 몸에 꿀을 많이 바르고 해봤는데 털에 엉켜서 아주 불편했다는 식의 이야기를 자주 했다. 그의 여자친구는 수줍고 말없는 타입이었다. 그런 부류일수록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더 막나가는 경향이 있다.
아무와도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학기 내내 정말로 아무와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밥도 항상 혼자 다른 테이블에서 먹었다. 그는 채식주의자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가 먹는 건 피넛버터와 검은 귀리빵 뿐이었다. 다른 음식을 먹은 걸 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는 키가 크고 파리한 얼굴에 매우 마른 몸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에 그의 방에 자주 드나드는 그의 여자친구는 살이 찐 얼굴로 항상 인상을 쓰고 있었다. 둘은 천생연분인 듯 했다. 어떤 평온한 주말 저녁 이웃들은 그의 방 앞을 지나가다가 여자가 호통치는 소리를 들었다. "좀 제대로 쑤셔넣을 수 없어? 내가 맨날 위에서 올라타야 돼?" 아무도 그와 이야기한 적은 없었지만 사람들은 그가 그 여자를 벗어나지 못할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남자의 얼굴은 계속 어두워져 갔고 여자는 더 신경질적이 되어갔다. 나중에 얼핏 듣기로 둘은 결혼했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대학에 와서야 그동안 자신의 주위 사람들이 참 괜찮았구나 하고 느낀다. 반면에 그제서야 자신이 얼마나 이상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는지 깨닫는 경우도 있다. 나쁜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고 좋은 물에서만 놀던 아이들은 언젠가는 자신이 얼마나 우물안 개구리로 살았는지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인척 연기하는 것은 매우 쉽다. 다행히도 기숙사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살았지만 남을 이용하려 드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사람들은 남에게 부탁을 할 때는 항상 '미안하지만...' 으로 시작되는 정중한 부탁을 했다. 그리고 부탁을 거절해도 알겠다고 하고 순순히 물러났다. 집에서나 한국 형들에게서나 내가 영어를 할 줄 안다는 이유로 "야 이것좀 해와" 하면서 던져주는 요구를 처리하는 데 익숙하던 나에게는 낯설은 일이었다. 부탁이란 건 저렇게 하는 거구나란 걸 나는 그때 처음 배웠다.
기숙사에 살면서 깨달은 건 또 있었다. 고등학교를 다닐때도 느꼈던 거지만 여기 사람들은 서로 미안하다 고맙다라는 말을 참 자주 했다. 우리 집에서는 평생 한두 번 들어볼까 말까한 말들이었다. 우리 집에서는 내가 뭘 하더라도 네가 그걸 해주는 건 당연한 건데 고마울게 뭐 있냐는 암묵적인 분위기가 흘렀다. 그리고 미안하다는 말은 상대방에게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는 제스처라고 이해했던 나는 사람들이 남들이 보는 앞에서 "이러이러하게 해서 미안해, 앞으로는 주의할께" 라고 말하는 걸 보는 것이 신기했다. 우리 집에서는 '미안하다' 라는 말이 부모님 입에서 나온 적이 한번도 없었다. 비단 우리 집 뿐만 아니라 한국 사람들은 미안하다는 말을 별로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진정한 사과라는 말은 자주 회자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