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비주류 대중음악 리스너 문화
1. 음악 이야기는 왜 가끔 공허할까?
2. 음악추천 원칙과 취향 프레임은 서로를 강화한다
음악 이야기라는 게임의 규칙
음악추천 원칙: 음원 경험, 그리고 디깅이라는 실천
취향 프레임: 취향 경쟁, 그리고 순수한 주체라는 환상
3. 음악, 취향, ‘나’ 만들기 프로젝트
취향은 그가 누구인지를 말해준다
듣는 사람들은 안전하지 않다
4. 취향 프레임 바깥을 상상하기
무해한 정보, 유해한 토론?
평론이 취향 프레임을 약화했다
리스너들은 언어화하지 않는다
5. 더 많은 기대, 더 많은 진심
인터넷‧음악 생활자의 수기
망가지고 불완전한 언어의 세계에서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사람들이 모인다. 인터넷 이외에도, 직접 대면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몇몇 음악감상 모임과 이야기 모임이 있다. 밴드 붐을 일으키는 방법에 대해 토론하려고 네 번에 걸쳐 모이는 어느 유료 모임은 얼마 전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약간의 조롱을 받는다. 카카오톡 오픈채팅에 특이한 음악방이 존재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이 음악방은 오프모임도 갖는데, 사람들은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음악만 듣는다고 한다. 대화는 강제되지 않으며 뮤트(mute) 상태에서 사람들은 각자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면서 같은 음악을 듣다가 흩어진다.
2024년, 다른 이들과 음악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만나서 음악을 듣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한편, 다른 이들과 음악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만나서 음악은 듣지만, 함께 이야기는 나누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어느 쪽이든, 분명히 사람들은 다른 이들과 음악으로 연결되고 싶어한다.
음악은 경험된다. 그리고 이 경험을 공유하고 소통하려면 언어를 거쳐야 한다는 고전적인 믿음은 새로운 밀레니엄 이후 기술의 급격한 변화와 함께 서서히 침식되었지만, 여전히 떨쳐버리기 힘들다. 다른 이들과 음악으로 연결되고 싶은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충만한 음악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있겠지만, 여기에는 온갖 석연치 않은 감정들이 혼란스럽게 뒤엉켜 있다. 어쩌면 사람들은 무슨 음악 이야기를 해야 만족스러운지 스스로 모르는 상태인지도 모른다. 음악 이야기라고 이미 정의된 말들, 즉 신보와 공연 소식, 음악가들의 근황과 팬심 표출, 취향 호소, 그리고 몇몇 논쟁적 주제들 사이를 관성적으로 맴돈다. 요즘 무슨 음악을 듣는가, 이 음악은 들어봤는가, 음악을 추천해달라,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가, 둘 중 어떤 음악가가 더 위대한가,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가, 밴드 붐은 올 수 있는가, 한국에서 록은 죽었는가, 왜 인기 있는 그 음악가는 거품인가 등등. 그리고 이런 이야기들에 지치면, 언어에 대한 자신감 결여 또는 불신에서 비롯되었을 극단적 침묵으로 대응한다. 아니면 음악 이야기는 하등 쓸모가 없으며, 닥치고 계속 음악이나 듣자거나 음악은 어차피 혼자 듣는 것이라는 냉소를 표출한다. MP3파일과 스트리밍 서비스가 개시한 손쉬운 음원 접근성 덕분에 몇 분짜리 음악 경험은 거추장스러운 언어를 거치지 않아도 바로 공유 가능하다고, 음악을 경험한다는 것은 음원을 듣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굳게 믿고 싶을지도 모른다.
각자가 경험한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하지만 경험된 음악이란 경험된 물질적 음원, 일반적으로 디지털화된 소리들의 집합 이상이다. 우리는 음악을 들으며 무엇을 어떻게 경험하는가. 그러므로 음악에 대해 이야기할 때 헛돌고 겉도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면, 또는 가끔씩 불쾌한 어긋남과 허무함이 찾아든다면, 우리의 음악 이야기를 구성하는 언어,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음악 이야기를 작동시키는 게임의 규칙, 또는 프레임이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보아야 한다. 그것들은 과연 우리의 음악 경험을 온전히 담아내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일까?
모든 장에는 고유한 게임의 규칙이 있다. 음악을 듣는다는 것에 대한 자의식을 지닌 리스너들이 모이는 한국의 대중음악 담론장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람들은 음악 이야기라고 합의되었다고 상상하는 영역 안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음악을 이야기하며, 이것은 음악 이야기이고 저것은 음악 이야기가 아니라고 미리 선을 긋는다. 그러므로 음악 이야기라고 하면 흔히 떠올리는 것들이 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을 소개하고 새로운 음악을 추천받는 것이 음악 이야기라고 여긴다. 음악을 듣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정보 교류, 아티스트 팬질, 음악 추천, 취향 대조, 단골 떡밥이라고 불리는 몇몇 주제에 대한 의견 제시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동시에, 사람들은 음악 이야기란 이러한 것에 그치지 않으며 그쳐서도 안 된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런 말들을 무난하거나 재미있거나 진정한 음악 이야기라고 여기고 행하도록 만드는 것일까? 이러한 규칙을 유지시키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나는 그 중심에 음악추천 원칙과 취향 프레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둘은 자주, 하나로 맞물려 돌아가며 서로를 강화한다.
비주류 대중음악을 주로 듣는 리스너들에게 음악 이야기의 가장 주요한 목적은 음악일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다른 이들과의 이야기를 통해 이전엔 몰랐던 음악들을 알아내고 또 듣게 되는 것이다. 또는 그들이 몰랐던 음악들을 알려주고 또 듣게 만드는 것이다. “음악 좀 추천해줘”, “이런 음악 들었는데 너(네)도 들어봐”라는 이 익숙한 말과 음악 추천을 둘러싼 실천들이 리스너들의 욕망을 주조하며 음악 이야기의 실질적인 척추 기능을 한다. 음악을 추천받아라, 또는 음악을 추천하라. 나는 이처럼 추천이 대화를 비롯한 대중음악 담론에서 일종의 명령처럼 수행되는 것을 음악추천 원칙이라고 부르고 싶다.
추천받기를 바라는 입장에서 보면, 정보를 비롯한 음악 이야기들은 새로운 음악을 향한 호기심을 바탕으로 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음악을 향한 ‘양적인’ 추구라는 형식만이 존재하고, 어떤 음악이냐는 질적인 내용은 비어 있다. 비평계와 학계의 영향이 강한 다른 문화예술에서 사적․공적 추천을 통해 퍼지는 작품이 중요성과 의미를 중심으로 구성된다면, 음악 추천은 그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워 보인다. 주관적으로 좋은 느낌을 받은 것, 재미있는 것, 기이한 것, 알려지지 않은 것 등 무엇으로든 그 내용을 채워 넣을 수 있다. 이 순수한, 작품이라기보다 아이템의 발견․획득 욕구를 만족시키는 데 음악 추천은 가장 손쉬운 행위였고, 여기서 디깅이라는 독특한 문화실천이 발생했으며, 스트리밍 서비스의 추천 알고리즘으로 유연하게 이동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음악 추천이라는 오래된 관습은 기술적 환경이 변함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인터넷이 없던 시대의 음악 추천을 상상해보자. 음악 정보를 얻는 데 TV와 라디오 방송, 음악잡지만으론 부족했을 것이다. 음악을 잘 아는 사람들을 만나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었을 것이고, 서로 음악을 추천하면서 음악과 무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음악을 추천받는다는 것은 단순한 정보의 교류가 아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세계에 초대받거나 그 세계의 일부를 받아들이는 행위에 가깝다. 누군가에게 음악을 추천받는다는 것은, 추천하는 것도 마찬가지이지만,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며, 최소한의 관계 맺기, 즉 서로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 없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음악잡지나 음반점 주인으로부터의 추천조차 그들의 음악관과 취향을 파악하지 못하고 안목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인터넷 시대에서도 큰 맥락은 변하지 않았다. 인터넷의 비(非)관계 속에서도 사람들은 음악을 선별해 소개하는 블로그, 인터넷 커뮤니티, RYM 리스트, 스트리밍 서비스의 플레이리스트, 각종 음악 큐레이팅 콘텐츠를 탐색하며 그 음악들을 추천하는 ‘특정 개인’의 취향과 안목을 따지고 그 음악들을 받아들일지 말지 결정하는 디깅을 수행한다. 하지만 추천된 음악에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있던 사람의 흔적은 점점 지워지고, 음악은 사물화된 음원에 가까워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스트리밍 서비스의 알고리즘 추천과 데이터베이스 사이트가 이것을 실현시켰다.
음악 추천에 난처하게 따라붙던 타자가 지워지는 과정에 디깅의 확산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디깅에는 음악을 타인, 그리고 음악이 속한 문화적 맥락으로부터 분리해 음원, 아이템, 또는 정보로 만들어낼 위험이 내재해 있다. 디깅은 독립적이고 능동적인 대중음악 리스너의 필수적인 덕목처럼 여겨지며 나 또한 디깅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지만, 디깅의 본질은 작품에 집중해 음미하는 체험이라기보다 오히려 여행 체험에 가깝다. 그것은 최대한 많은 장소를 방문하는 여행, 랜드마크 대신 남들이 가지 않는 곳에 가는 여행,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곳을 탐험하는 여행, 지도를 새로 작성해내는 여행을 닮았다. 오프라인 레코드 가게에서 중고음반을 뒤지며 우연한 횡재를 기대하는 일부터 인터넷에서 관련 정보를 모으고 음원들을 정보처럼 수집․분류하고 (플레이)리스트처럼 자기 소유의 목록으로 저장하는 일까지, 디깅하는 사람은 음악을 숨겨진 보물의 자리에 놓고 그것을 찾아내는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발견과 획득, 나아가 음원들로 이루어진 세계의 확장에서 재미와 즐거움을 느낀다. 음악 추천의 기저에 존재하는, 아이템의 발견․획득․확장 욕구는 디깅이라는 모델과 딱 들어맞는다. 이처럼 대중음악 리스너들의 주요 실천이 디깅이 될 때, 음악 이야기의 규칙은 이 디깅 주체에 걸맞게 짜일 수밖에 없다.
물론 여행 중에 잠시 체류하거나 오래 거주할 곳을 찾을 수도 있고, 자신의 여행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날 흥미로운 여행 기록이 드문 것처럼, 일종의 정신적 여행인 디깅은 그곳에서 건져 올린 음악들에 대한 소개를 넘어선 서사를 들려주기 쉽지 않아 보인다. 한편, 음악추천 원칙이 자족성을 띠게 될 때 음악에 대한 말들은 있을 곳을 잃고,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줄어든다. 디깅, 그리고 아이러니컬하게도 디깅조차 쓸모없게 만드는 개인맞춤의 알고리즘이 음악 이야기를 불태워버리는 연료 역할을 했다. 이와 함께, 음악 듣기에서 음원들을 찾고 ‘음원 경험’을 계량화하고 데이터베이스화하는 행위가 부각되면서 특정 작품과의 교감 또는 감상이라는 측면은 희미해졌다. 여기서 음악 이야기는 작품에서 느낀 감흥을 언어화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을 표현하는 정확하고 정교한 언어를 찾기 위해 다른 레퍼런스를 뒤지는 일도 아니다. 음악을 듣는 것은 타자의 존재, 즉 다른 리스너들의 감상과 의견, 평론가들의 견해, 각종 문화적 논평들, 동시대와 영향관계에 있는 다른 문화예술들, 심지어 자기 자신의 기억, 사회와 개인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음악가에 대한 이해 역시 마찬가지다. 플레이리스트와 싱글 위주의 알고리즘 듣기가 대세가 되면서 음악가의 존재는 희미해졌다. 어떤 이들에게 음악은 분위기를 위한 것, 개인의 기분을 디자인하는 공간적 소품이 되었다. 음악은 방향제에 더 가까워졌다.) 새로운 것들에 대한 호기심과 작품에 대한 집중이 균형을 잃고 ‘닥치고 음악’이 될 때, 마치 걸신들리고 허기진 아귀처럼 발견‧획득‧확장 욕구에 사로잡혀 음악 듣기를 지속할 때, 음악은 그 사회적 기능, 즉 타인과의 연결을 상실한다.
음악추천 원칙은 어떤 음악을 추천받거나 추천할 것인가에 대한 내용이 정해지지 않은 텅 빈 형식이고, 오늘날 그것을 채우는 것은 대부분, 개인의 취향이다. 서로의 취향을 탐색하고, 자신의 취향에 맞는 음악을 추천받기 원하며, 타인의 취향에 맞는 음악을 추천하려고 애쓰거나 타인이 자신의 취향을 받아들여주기를 제안한다. 음악에 관한 대화가 맞이하는 종착지는 흔히 음악 추천이기 마련이지만, 음악 추천이 아니더라도 음악 이야기는 주로 취향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작동한다.
취향은 오늘날 음악 이야기를 성립시키는 일종의 상식이자 의례이며 토대 자체가 되었다. 무슨 음악을 좋아하는가, 어떤 음악가를 좋아하는가, 그 음악가를 좋아하면 이 음악가도 좋아하는가, 저 음악가는 좋아하는가, 어떤 곡을 좋아하는가…. 여기에는 목적어에 들어가는 고유명사만 바꾸면서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지게 만드는 ‘좋아함’의 마법이 있다. 하지만 동시에, 취향만큼 음악 이야기를 멈추게 하는 것도 드물다. 사람들의 취향은 너무나 다양해서 접점을 찾기 어려워졌다. 게다가 모든 게 순전히 개인의 취향이고 취향은 존중해야 한다는데, 이처럼 불가침의 성역이 된 각자의 취향에 대해 어떤 말을 덧붙일 수 있을까? 기껏해야 서로의 선호 리스트를 대조하고, 아이템의 일치와 불일치를 확인하는 작업에 그칠 것이다.
이때, 취향을 범인으로 모는, 음악 이야기의 가장 나쁜 두 가지 양상이 출현한다. 하나는 취향 경쟁이고, 또 하나는 순수한 주체라는 환상이다. 여전히 힙스터들이 비난받는 주요 이유 중 하나로도 악명 높은 취향 경쟁 또는 음부심(특정한 음악취향을 가진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에 수반된, 다른 취향들의 폄하는 아마도 대중음악과 관련된 하위문화가 형성되면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1995년, 영국의 사회학자 세라 손턴은 ‘하위문화자본’이란 개념으로 클럽 하위문화를 분석한 바 있다. 손턴은 클러버들이 하위문화 특유의 은밀한 요소들과 ‘힙’(hip)의 위계를 이용함으로써 주류(mainstream) 문화, 또 다른 개인과 또래집단으로부터 자신들을 차별화하고 우월한 사회적 지위를 획득해낸다며, 이들이 기존의 하위문화연구에서 말하는 저항적이고 대안적인 집단이 아님을 강조한다. 사람들이 음악적 지식, 더 정확히 취향을 어떻게 상징자본의 형태로 사용하는지에 관한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이다. 다만,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이 경쟁이 집단들끼리의 경쟁이라기보다 각개전투의 형식을 띠는 경우가 늘어났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취향 경쟁이 말문을 막히게 하거나 진심이 아닌 말들을 쏟아내도록 한다. 게다가 오늘날 리스너들의 이상(理想)은 소위 음잘알(음악을 양적으로 ‘많이’ 들었을 뿐만 아니라 적절한 음악 추천의 능력이 있는 사람)로부터 타인과의 접점이 희박할지라도 자기만의 고유한 취향을 가진 독립적이고 능동적인 주체로 빠르게 이동 중이다.
획일적이고 몰개성적인 타인들과 비교해 우월한 위치가 핵심이었던 이 독립적이고 능동적인 주체는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 순수한 주체라는 변종을 낳았다. 순수한 주체의 신봉자들은 ‘나’의 진정한 주관, ‘나’의 순전한 감상, ‘나’의 유일한 취향을 음악 듣기에서 최고의 덕목이자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목표로 삼으며, 음악의 인기와 영향력, 또는 평론가나 음악매체에 의한 평가와 의미화, 심지어 다른 리스너들의 감상과 견해조차 하찮게 여기는 걸 넘어 자신의 순수함을 오염시킬 위험 요소로 파악하기도 한다. ‘내가 들어서 좋으면 그만이지’라는 강력한 믿음을 지닌 이들에게 자기 자신이 듣지 않거나 자기 자신의 취향이 아닌 음악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다. 이들은 음악에 대한 외부의 말들에 귀를 틀어막고 음악을 둘러싼 여러 겹의 사회․문화․역사적 맥락을 무시함으로써 음악과 분리할 수 없이 따라붙는 타자를 말끔히 지워내고자 한다. 음악추천 원칙처럼 취향 프레임 또한 자족성으로 수렴되면서 말들을 질식시킨다. 물론 이러한 순수한 주체에 대한 환상은 아마도, 디깅 경험과 그에 수반되는 지식에 비례할 음잘알/음알못의 세계, 더 나아가 희소성의 취향이 만들어내는 위계 속에서 상대를 시험하고 견적을 내는 취향 경쟁으로부터 빠져나오는 전략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영향 받기, 즉 소통을 거부하는 이 순수한 주체는 타자 없이 성립하지 못한다. 이들이 순수한 주체라는 환상을 고수하는 한, 음악은 타인들에게 자신이 고유한 취향을 가진 사람임을 확인받고자 하는 중요한 도구로서 기능하며, 음악 듣기는 ‘남들을 신경 쓰기’와 ‘남들을 신경 쓰지 않기’라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음악 이야기에서 취향 프레임이 득세하게 되었을까? 여기서 다시, 음악추천 원칙이 등장한다. 나는 그것이 음악 담론이 음악 추천으로 대표되는 행위들을 통해 음악을 일종의 선물(gift)로서 주고받는 경제처럼 설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음악 담론에서 가장 중요하고 거대한 경제는 아티스트 팬덤이다.) 이러한 경제에서는 선물 그 자체만큼이나 선물을 주고받는 사람들 및 그들 사이의 관계가 중요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음악 추천이 중심이 되는 세계에서 음악 이야기는 (앞서 언급했듯이 음악의 자기증식을 목적으로 기우는 경향 또한 강하지만) 음악이 연결시키는 사람들을 향해 있다. 여기에는 음악을 듣는 나 자신, 다른 사람(들), 그리고 이들 사이의 관계나 집단성에 관한 생각이 배음(背音)처럼 깔려 있고, 자주 의식적으로 돌출한다. 일반적으로, 추천하는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거나 흥미 있는 음악, 또는 상대가 좋아할 만하거나 흥미를 가질 법한 음악을 추천하고, 추천받는 사람 역시 각자의 기준으로 타인을 판단하며 그들의 취향을 선택적으로 흡수한다. 결국, 음악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사람과 분리해낼 수 없는 취향들이 마주치고 합류하거나 충돌하는 곳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다른 문화예술 영역보다 훨씬 더, 음악에서 취향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여겨진다면, 그것은 다른 가치 평가 체계보다 개인의 취향, 더 정확히 ‘개인들’이 중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좋아하는 음악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바로 그 음악을 좋아하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한 사람의 취향이 그가 누구인지를 말해준다고 믿는 시대를 살고 있다. 실제로, 취향은 한 사람에 대해 아주 많은 것을 드러내며, 음악취향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한 것처럼 보인다. 특정 음악가나 특정 장르에 대한 선호를 넘어 다양한 장르와 스타일을 아우르는 음악 선택의 논리, 그리고 음악에서 무엇을 어떻게 느끼느냐와 관련된 감각과 감흥의 패턴이라고 음악취향을 정의한다면, 그것은 개인의 내밀한 부분, 한 사람을 구성하는 감성의 핵심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연애를 시작할 때 상대의 음악취향에 끌리는 사람들이 다수 존재한다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음악취향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더 정확히 세상을 어떻게 느끼는 사람인지에 대한 힌트를 제공한다. 음악이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누군가의 취향의 지도를 얻을 수 있다면, 그가 여태 어떤 음악적 자극을 받아왔는지, 음악에서 어떤 요소들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천착하는 테마들은 무엇인지, 어떤 감정의 결 또는 회로(回路)를 지니고 있는지, 어떤 감정적 상황이나 가치에 매혹되는지 등을 짐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취향이 이미 고정되어 있는 것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취향을 알아간다는 것은 이전엔 어렴풋했던 자기 자신을 재발견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다양한 자극과 영향 앞에 스스로를 열고 ‘나’를 새로이 만들어가는 과정이자 활동의 총체이기도 할 것이다. 순수한 자기 자신만의 취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독립적으로 보이는 취향이라도 애초에 자기가 속한 집단이나 사회의 영향 속에서 온갖 선입견과 편견에 의해 ‘이미’ 더럽혀져 있다. 따라서 취향을 안다는 건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파악하는 일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점을 왜 좋아하는지, 반대로 어떤 점을 왜 싫어하는지, 그러한 취향은 어디에서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 등의 문제를 여러 각도에서 생각해보는 자기탐구일 수 있다. 취향의 사전적 정의처럼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가령 디깅을 하거나 음반을 모으거나 악기를 배우거나 공연을 보거나 음악을 좋아하는 다른 사람들과 만나거나 음악에서 파생된 관심사가 전시나 영화나 책으로 이어지면서 접하게 되는 경험들이 한 사람의 특유한 개성을 만들어낸다. 취향이 정체성과 연결된다면, 취향이 곧 자기 자신이라기보다, 취향이 던지는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찾아가면서 확장된 자기이해, 자기가 되고 싶은 ‘나’를 향해 취향이 이끄는 경험들이 자기 자신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취향 프레임 안에서 움직이는 음악 이야기가 처한 난관이 있다. 2000년대 이후 한국에서 음악 이야기의 빈곤을 초래한 주범으로, ‘나’라는 말밖에 모르는 것처럼 보이는 취향 중심의 담론구조가 자주 지목되지만, 문제는 취향 프레임 자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개인의 취향에 기반을 둔 이야기는 음악 추천을 중심으로 음악 담론이 작동하는 방식에 이미 오래전부터 달라붙어 있었으며, 음악에 대한 자신의 취향을 드러냄으로써 사람들은 음악 이야기를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할 기회와 권리를 얻는다. 음악이 매개이자 장소가 되어,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 기존 방식과 다른 언어와 실천들을 통해 ‘나’를 새로이 구성하게 하고, 비슷한 취향을 가지고 비슷하게 느끼는 이들을 모이게 한다. 개인 및 집단 정체성 만들기에 관여하는 취향 중심의 음악 경험은 대중음악이 지닌 가장 중요한 힘 중 하나일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대중음악은 20세기 후반 이후 펑크, 힙스터 등 중요한 청년 하위문화에서 패션과 함께 가장 핵심적인 코드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오늘날 지배적인 형태의 취향 프레임, 다시 말해, 취향을 이야기하는 특정한 방식, 더 정확히, 우리 자신에 대해 말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빗나가게 하는 소통의 규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음악 이야기를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스스로와 더 친해질 수 있기를, 또는 타인이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라거나, 음악이 입구가 되어서 다른 사람들의 세계 또한 이해하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고 싶어하는 리스너들조차 스스로에 대해 선뜻 말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왜일까?
“좋아한다”, “싫어한다”, “관심 없다”, “내 취향이다”, “내 취향이 아니다”를 비롯한 몇 개의 문장을 따라 고유명사들이 끊임없이 나열된다. 취향에 관한 음악 이야기가 이러한 양상을 띠면서 개운하지 않은 것은, 먼저, 음악 이야기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취향의 정의, 그리고 취향을 둘러싼 한정된 질문들 때문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취향은 단순히 무엇을 좋아하는지 또 무엇을 싫어하는지에 국한된 문제라고 생각된다. 취향은 취향의 대상, 그리고 대상에 대한 관심 유무와 호오 표현으로 축소된다. 또한 리스너들은 스스로를 취향의 대상이나 그 대상이 갖는 상징적 위치와 쉽게 동일시한다. 취향 과시, 허세, 음악을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패션이나 액세서리로 이용한다는 흔한 지적들은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취향의 기능에 대한 보편적 합의를 담고 있으며, 취향이 강렬하고 순수하고 진실한 감정의 문제임을 드러낸다(이렇게 볼 때, 취향은 변형된 진정성 담론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취향의 대상을 향한 진심이 증명되더라도 취향이 ‘내가 좋아하는 그 무엇’으로 존재하는 한, 그것에 대한 배타적 소유권, 또는 그것의 영향력에 대한 자신의 지분을 주장하는 일에 빠지지 않기란 쉽지 않다. 그리고 취향을 대상, 나아가 ‘개인의 소유물’로 보는 바로 이러한 시각이 속류화된 취향 존중 또는 관용이라는 윤리(‘다른 사람의 사적 소유권을 침해하지 말고, 그것에 대해 질문하지 마라’)를 낳는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음악에 대해 나누는 일상적인 대화들을 통해 뒷받침되는데, 만일 기본 설정된 질문이 ‘무엇을 좋아하는가?’가 아니고, ‘어떤 점이 좋은가?’ 또는 ‘왜 좋은가?’, ‘어떻게 좋아하게 됐는가?’라고 물어도 무례하거나 부담스럽다고 느끼지 않으며, 오히려 그처럼 다양한 질문이 당연시되었다면, 음악 이야기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자라났을 것이다.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음악 경험에서 생겨난 자기 자신의 ‘진실한 감정’에 대해 말하기를 두려워하고, 타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 또한 두려워하는지도 모른다. 타인과 자신의 취향을 비교우위로 파악하는 경쟁심, 취향이 인정받지 못하면 자기 자신 또한 존중받지 못할 것이란 불안과 수치심, 그렇기에 자신의 실제 느낌과 별개로 괜찮은 취향을 꾸며내야 한다는 강박 등이 공존할 때, 우리는 진심이 아닌 말을 꺼내거나 말하기를 주저하게 된다. 게다가 자기전시를 그 동력으로 삼는 인터넷에서조차 자기전시의 특정한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면 적대와 혐오에 노출될 위험에 처한다. 음악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정확하게 표현해내려는 서투른 시도들이 ‘오글거린다’, ‘정병’, ‘의미 없다’ 등의 말로 매도되고, 대세를 거스르는 다듬어지지 않은 의심, 사회적 승인을 받지 못한 채 이미 낙인찍힌 취향들이 일방적인 조롱과 악의적인 공격의 표적이 되는 시대, 그러한 음악 이야기는 가장 취약한 부분을 내밀어도 우습게 여기거나 비난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서로에게 호의적이고 안전한 사이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현실이든 인터넷이든 이러한 사이에 이르기란 쉽지 않은 일이기에 우리의 음악 이야기는 자기보호를 위한 긴장과 경계 속에서 취향의 표면만을 맴돌 수밖에 없다는 뜻이자, 진실되고 해방적인 음악 이야기를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이 서로에게 기꺼이 귀를 기울이며 의미를 부여해주는 호의적인 관계 또는 ‘내적 친밀감’이 존재하는 안전한 공동체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개인적 태도와 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형성된 이중성의 결과, 즉 솔직해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과 타협한 결과가 ‘취향을 내세운 폐쇄적이고 피상적인 이야기’라는 규칙일 것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그 음악을 듣는 ‘멋진 나’에 도취하거나, 같은 음악을 알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 서로 통한다고 상상한다. 슬프게도, 이 음악 이야기의 규칙들은 우리가 그곳에 갇혀 있기를 원하기 때문에 우리의 음악 경험을 온전히 담아내는 것 같다.
하지만 대중음악을 듣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을 들이며 그 문화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특히 인터넷 내에서의 음악 이야기를 주도하며 대중음악 담론을 만들어내는 목소리 큰 연령대가 10대와 20대 초반이라는 사실이 이러한 현상의 중요한 원인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 시기 특유의 불안정한 자의식이 음악 이야기를 둘러싼 잡음과 소란들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 여기에는 자기 자신의 불확실한 정체성에 대한 불안과 성급한 열정이 함께하며, 몇 가지 질문을 중심으로 공회전하다가 자주 수렁에 빠지곤 한다. 가령, ‘어떻게 나만의 취향을 만들 수 있는가?’란 질문은 일단 들어본 음악의 수를 재빨리 늘리고 취향을 개인의 시그니처-소유물로 만들어 고정시키려는 마음, 또는 앎을 향한 타인들의 욕구와 다양한 탐색의 중요성은 부정하지만 자신의 쾌락과 취향은 아무튼 긍정하라는 방어기제를 낳기 쉽고, ‘이런 취향을 가진 나는 누구인가?’란 질문은 취향의 대상이 음악문화나 사회에서 갖는 위치를 자기 정체성과 곧바로 연결시키는 비약과 악질 팬덤으로, 또는 다른 취향을 가진 이들에 대한 몰이해를 정당화하면서 가상의 다른 집단을 향한 비난으로 이어지기 쉽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에 대해 침착하게 이야기를 꺼낼 수 있게 되는 것은, 몇몇 흑역사를 거치면서 ‘나’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 자신과 타인들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능력을 갖추고 난 후, 음악에 관한 취향의 윤곽이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힌 후처럼 보인다. 이때는 20대 중후반 이후, 그러니까 음악에 한창 몰두하던 시기가 지나고 나이가 들어 그 열기가 꽤 식고 난 후이기도 하다. 여기서 음악은 손쉽게 노스탤지어로 소환되곤 한다. 과거에 좋아했던 음악들과 그에 얽힌 추억이 우리가 우리 자신을, 또 우리의 감정을 거리를 두고 좀더 편안하게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한다. 그러고 보면, 음악 이야기란 과거형의 운명을 타고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공부나 일, 다른 무언가를 하고 있거나 이동할 때, 우리 곁에는 언제나 ‘동시에’ 음악이 함께하곤 했다. 음악 경험은 현재에 지나치게 가깝게 밀착해 있어서 그 지독한 탐닉과 함몰의 계절을 통과하는 도중에는 그에 대해 쉽사리 이야기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이 책으로 출판된 대부분의 뛰어난 음악 이야기가 개인의 추억담, 회고록(memoir) 형식을 띠는 이유일 것이다.
뇌과학자들은 ‘순수한’ 음악은 격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며, 이러한 사례들을 이해하려면 문화적 상황과 개인적 상황(개인적 기억, 일반적인 삶의 느낌이나 구체적 사건)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중 중요한 것이 개인의 기억이다. 즉, 우리가 수없이 경험했듯이, 지금 처음 듣는 음악이 과거의 특정 기억을 상기시킬 수 있지만 과거의 어느 순간에 들었던 음악들이 지난 흔적들을 생생하게 불러낼 수 있으며, 어느 경우든 그것은 축적된 시간과 무관하지 않다. 문제는, 이제야 음악 이야기를 편안하게 나눌 수 있는 최소한의 마인드를 갖춘 것 같은데 새로운 음악에 관심을 기울이고 음악 이야기를 환영하는 친구들의 수는 점점 줄어들며, 여러 이유로 음악 이야기를 할 의욕이 그다지 생겨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은 K-직장인의 휴가를 국내외 음악페스티벌에서 보내는 공연-여행 마니아로 음악 경험을 확장하거나, 사람들 대신 사물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조용한 음반 수집가의 삶에 다다른다. 또는 점잖은 클래식‧재즈 애호가, 음악보다 음향에 진심인 오디오필처럼, 중장년층이 주류이면서 다른 이야기의 규칙을 가진 세계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물론 대중음악 담론장에도 음악추천 원칙과 얽힌 취향 프레임이 아닌 다른 규칙들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취향 프레임을 벗어나면 무슨 이야기가 펼쳐지는가? 정보가 음악 이야기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일부는 저널리즘의 영역과 겹치며, 논란의 여지가 없이 깔끔하고 객관적인 사실의 영역이다. 정보가 거짓이 아니라면 이러한 음악 이야기는 유용하고 갈등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굉장히 무해하고 실용적으로 보인다.
한편, ‘단골 떡밥’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있다. 사람들은 몇 가지 한정되고 반복되는 주제들에 대해 자신의 주장을 펼쳐놓으며 ‘소신 발언’을 하거나 언쟁을 벌이는데, 음악 산업 전반, 트렌드, 특정 장르나 아티스트 팬덤 등에 대한 이야기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음악 또는 음악가, 장르의 가치가 탁월한지 아닌지 위계와 우열을 판단하는 작업들로 이루어진다. 음악에 대한 가치 평가는 언뜻 보면 평론의 언어를 모방하는 것 같지만, 리스너 대부분은 평론 내용을 읽지 않고 점수만 보기 때문에 판단의 근거가 실로 빈약해 그 근거에 대한 논의 자체가 어려운 개인의 취향 선언, 더 정확히 쾌/불쾌의 강도(強度)를 표현하는 놀이에 더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디깅 주체에게 스트리밍 서비스의 알고리즘 추천이 딱 들어맞듯, RYM의 유저 별점 시스템은 이러한 리스너들의 성향에 매우 잘 어울린다.
게다가 논쟁처럼 보이는 말들 역시 취향 및 정체성의 문제와 잘 분리되지 않는다. 리스너들은 ‘메인스트림’, ‘인싸’, ‘찐따’, ‘힙스터’ 같은 말들로 리스너문화의 외부와 내부를 가를 뿐 아니라 그 내부에서도 논쟁들을 펼치는데, 대표적인 것이 갈드컵이라고도 불리는 'VS 놀이'다. 이것은 오늘날 음악을 스포츠처럼 여기는 일부 10대들의 문제처럼 여겨지지만, 특정 시대나 국가, 연령에 국한되지 않는 현상에 가까울 것이다. 그것은 1960년대 영국 런던의 ‘비틀스 vs 롤링스톤스’의 10대 팬부터 시작해 그 역사가 유구할 것으로 짐작되며, 지금도 지구 어딘가의 인터넷 커뮤니티나 술집에선 중년들끼리 추억팔이를 하면서 ‘오아시스 vs 블러’, 또는 오디오 마니아로서 ‘진공관 앰프 vs 트랜지스터 앰프’의 문제를 놓고 일생의 자존심을 건 싸움을 벌이고 있을 것임에 분명하다. 원시-팬덤 또는 팬덤의 원형이라고 부를 수 있을 이러한 경쟁 붙이기 놀이로부터 이어진, ‘하위문화’라고 불리는 장르별 부족들의 형성과 ‘전쟁놀이’는 역시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면서, 2000년대 중후반 한국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힙찔이’와 ‘락덕후’의 분할선을, ‘(해외)락’과 ‘(국내)인디밴드’ 리스너의 경계를 만들고, 더 나아가 ‘메탈돼지’, ‘펑크멸치’, ‘브릿게이’, ‘얼터거지’ 같은 말들을 유행시켰다. ‘편견 없이 모든 음악을 좋아하는 나’를 자부하며 그러한 태도를 우월한 윤리적 자기정체성으로 삼는 사람들이 늘어났음에도, 부족들의 전쟁은 가장(假裝)과 진심, 무해함과 유해함의 경계를 오가며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정체성은 ‘이것이든 저것이든’이 아니라 하나의 음악가나 장르로 대표되는 ‘이것’에 닻을 내리고 헌신할 때 확실한 안정성을 갖기 쉽고 각 장르를 중심으로 형성된 문화에는 각자의 역사 속에서 형성된 고유한 태도와 미학과 스타일이 존재하기에, 10대 리스너들이 그에 대한 선호에 따라 쪼개져 소속감을 갖기 쉽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부족들의 형성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계속 반복되는 구도의 감정 분출에 피로감이 쌓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대립 자체가 악은 아니고 모든 가치가 존중되고 긍정될 필요도 없으며 가치들의 대립이 비판과 논쟁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지만, 갈라치기 사례들에서 보듯이 가치의 대립은 특정한 사람들의 ‘인격’을 향한 공격으로 엇나가기 쉬우며, 현실적으로 호오(좋아한다/싫어한다)와 가치 평가(좋다/나쁘다)만큼이나, 가치와 그 가치를 옹호하는 개인은 잘 분리되지도 않는다. 이 ‘유사논쟁’들이 일으킨 혼란이 한국의 음악문화에서 토론을 의견과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교류하는 일이자 다양한 의견들이 경합․갈등․대립하면서 시야를 넓히고 새로운 의제와 관점을 생산하는 작업이 아니라, 그저 분란이며 피하는 게 상책인 말싸움으로 인식되도록 했을 것이다.
토론에 대한 이러한 반감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무시와 혐오가 잠복해 있는 공동체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단순히 음악문화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한국사회 전반에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대중문화 담론장 내부에서 작동하는 고유의 규칙은 전체 사회와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영향 속에서 협상한 결과물이다. 가령, 어느 인터넷 음악 카페에서 여는 모임을 떠올려보자. 사람들은 술자리에서 각자의 성향에 따라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가에 대해 열변을 토하거나 조용한 공감을 원하겠지만, 여기서 언급된 음악가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거나 하나의 사안에 대해 엇나가는 의견들이 부딪친다면, 그것이 잠깐 스쳐 지나가는 농담이더라도 많은 이들이 ‘분위기를 깨는 행위’거나 ‘공격적’이라고 여길 것이다. 우리 사회, 특히 교육과 대중문화는 집단에서 벗어나 고유한 개성을 가진 독립적 개인으로서의 ‘나’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점점 더 흘러가는 듯하지만, 사실상 저마다 다른 취향과 견해를 가진 개인들의 소통을 가능케 하는, 타인을 향한 이해와 표현 능력은 간과한 채, ‘나는 나’라는 동어반복 속에서 자기 자신의 ‘기분’이 제일 중요한 주체들을 생산해내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일부는 ‘프로불편러’를 자처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대면 접촉이 일어나는 곳에선 불편한 감정과 갈등을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 얄팍한 동조의 제스처를 취한다. 하지만 갈등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며, 이처럼 억압된 것들이 강하게 솟구치는 곳이 아마 인터넷일 것이다. 2000년대, 자극적인 발언을 통해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싶어하는 ‘어그로’와 ‘관종’의 출현에는 ‘튀는’ 존재를 용인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에 대한 반발의 측면이, ‘키배’에 헌신하는 ‘키보드워리어’의 출현에는 개인의 견해를 드러내는 일이 억압받는 현실에 대한 반작용의 측면이 있었다면, 현재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가운데, 이질적인 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유의 무능력과 자기 자신이 틀릴 리 없다는 자기애가 결합해 비슷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끼리 뭉치면서 이견 자체를 ‘삭제’ 또는 ‘차단’하거나 ‘마녀사냥’과 ‘조리돌림’을 하고, 자신의 무지나 잘못이 노출되는 상황조차 그걸 드러내도록 한 타인의 문제로 돌리는 경향이 강화되고 있다.
동시에,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음악을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해 들려주고 싶은 사람들만큼, ‘분위기’와 ‘기분’에 상관없이 음악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고 싶은 사람들이 적지 않게 존재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인터넷에서 제시되며 떠도는 의견들은 인터넷문화 특유의 자극적인 어휘와 과도한 일반화를 걷어내면 동의가 되는 사례가 드물지 않다. 사실상 소신 발언과 단골 떡밥들이 담고 있는 주제들은 대부분, 음악문화의 가장 민감한 부분들이며, 음악을 둘러싼 사회문화적 현상들, 또는 음악이 다른 존재들과 연결되어서 만들어내는 세계의 진실에 관한 것이다. 음악을 소리로 축소시키고 음악 이야기를 음원 감별로 한정지으려는 사람들 곁에서, 이들은 음악을 듣는다는 것이 음악이 놓여 있는 더 큰 세상에 귀를 기울이는 행위임을 역설한다. 음악의 안팎을 끊임없이 곁눈질하고 관찰하고 분석하고 질문하고 의심과 불만을 품으면서, 음악을 듣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궁금해하거나 무엇이 이러한 상황을 초래했는지 알고 싶어한다. 이와 같은 말들은 일방적인 소비자의 위치를 벗어나 실질적으로 음악문화에 참여‧개입하고 있다는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러한 ‘이해와 표현의 시도들’은 매우 자주, 모호한 감각 또는 강렬한 호오의 감정으로 존재할 뿐, 명확한 언어를 획득하는 데 실패하곤 한다. 지레짐작에 의거해 실제 현실과 괴리된 주장을 펼치거나, 최소한의 애정과 존중을 결여한 채 혐오감정을 표출하거나, 기성의 언어, 즉 낡은 상식과 통념들을 반복하며 편견을 강화하는 덫에 걸린다. 그곳에서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내려는 비판의 몸짓은 특정한 가치를 향하는 대신 특정한 사람들을 겨냥한 ‘깐다’나 ‘팬다’ 같은 폭력의 어휘에 갇히고 말기도 한다. 이러한 함정들은 피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반감을 불러일으키거나 오해에 파묻히기도 한다. 더욱 슬픈 것은, 유의미한 이야기가 이루어지고 광범위한 합의가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논의들이 모이고 축적되어 보편적으로 한 단계 상승된 인식을 만들어내지 못한 채 금세 휘발되어버린다는 점, 그래서 짧게는 몇 년, 길게는 몇십 년이 넘도록 같은 자리, 아니 문제의 원점을 맴돌면서 ‘단골 떡밥’로 불리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가장 슬픈 것은, 우리는 우리의 의견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타인들의 의견과 만나야 하는지 그 방법은커녕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태도 또한 배운 적이 없다는 점이다. 애초에, 음악에 대해, 또는 음악으로부터 생각의 폭을 넓히고 싶었던 우리의 선량했을 호기심은 길을 잃고 부서질 운명에 처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다시, 질문은 반복된다. 음악 이야기는 끊임없이 ‘나’로 회귀하려는 취향 프레임 바깥으로 어떻게 나갈 수 있을까? 또는 어떻게 취향 프레임 안팎에서 생산적인 토론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이에 대한 하나의 단초를 인접문화인 영화로부터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2000년대 초중반 이후, 한국의 온갖 문화를 ‘취향’이란 말이 점령했으나 현재의 영화, 더 정확히 예술‧독립영화는 그로부터 비껴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소위 마이너한 취향이더라도 리스너들은 자기 취향을 강하게 고집해서 선호하는 영역에서 잘 벗어나지 않지만, 예술영화 관객들은 좋은 영화, 중요한 영화, 걸작, 화제작이라고 알려진 영화라면 장르, 제작 시기, 국적, 소재, 주제 등을 가리지 않고 관심을 기울인다. 취향 프레임은 영화담론에서 득세하지 못하며, 관객들은 취향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그것으로 거의 모든 논의가 수렴되어버리는 대중음악에서처럼 취향이 절대적인 위치는 아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겨났을까?
물론 영화와 대중음악은 생산의 조건이 상이하다는 점에서 이러한 비교는 부적절할 수 있다. 영화는 영화제, 평론계와 학계 등이 긴밀하게 연결된 제도를 통해 예술로서의 위치가 대중음악보다 훨씬 안정적인 편이고, 상대적으로 많은 인력과 자본을 필요로 하는 영화의 특성상 매년 제작되는 작품의 수에 한계가 있기에 OTT 서비스, 시네마테크, 영화제나 불법 공유 등 다양한 루트가 존재함에도 논의되는 영화의 범위가 한정되어 있으며, 영화잡지와 SNS에서 이루어지는 영화 이야기는 주로 개봉작에 집중된다. 영화에서는 ‘디깅’이란 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으며, 평론매체와 영화계 관계자들이 선정한 정전의 리스트 또한 상당한 권위를 발휘한다. 이러한 조건하에서 관객들 사이에서 공통적인 영화 경험이 광범위하게 형성되며, 부분적인 교집합 또한 다양하게 생겨난다. 단순 소비재에 더 가까운 위치에 있고, 앨범, EP, 싱글 등 다양한 음반 형태뿐만 아니라 매순간 무수한 아마추어와 신인 음악가들이 만들어내는 음악이 쏟아져나오며, 스트리밍 서비스 등을 통해 선택지가 무제한에 가깝게 주어지는 한편, 디깅과 개인의 취향에 의거한 편향적 듣기가 일반화되어 있어서 음악 경험의 접점을 찾기 어려운 대중음악과 그 상황이 다르다.
그럼에도, 이에 대한 하나의 대답은 평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007년, 영화 <디워>를 둘러싸고 올드 미디어에서 이루어진 논쟁으로부터 평론가를 향한 대중의 적개심이 인터넷에서 폭발했고 평론의 위상이 급격하게 하락하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해 3월 네이버 블로그에서 1인 미디어를 시작한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평론계의 아이돌’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동진은 전통적인 평론문보다 팟캐스트와 개봉작 GV, 유튜브 등을 통해 평론활동을 계속하면서 특유의 언어, 즉 한줄평과 소위 상징 분석 스타일을 확산시키면서 평론에 대한 대중적 인식을 바꾸어냈다. 그의 활동과 평론의 실질적인 내용에 대해 다양한 비판이 존재하더라도 이러한 셀러브리티의 탄생은 2010년대 중반 이후, 정성일 같은 기존 평론가들조차 GV에 뛰어들게 만들며 GV문화의 활성화를 이끌어냈고, 평론, 더 정확히 영화를 선택하고 영화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는데, 평론가의 브랜드화가 이미 그러한 관심을 바탕으로 출현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아마도 인터넷을 통한 영화의 불법 공유가 광범위하게 일상에 확산되는 한편, 극장 수가 증가하고 ‘다양성영화’(이 말이 영화진흥위원회에 의해 처음 사용된 것 역시 2007년이다)라는 말이 등장할 만큼 대중의 욕구 또한 넓어지며 영화 관람의 선택지가 늘어나던 시기, 영화에 대한 개인의 취향을 내세우기만 해서는 인정욕구의 충족이나 공감 이상으로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관객 스스로의 방책이었을지도 모른다.
지난 십몇 년간, 예술영화에 입문하는 많은 관객들이 ‘볼 만한 영화’에 대한 여러 선정 기준 중에서 ‘좋은 영화’에 대한 이동진의 ‘취향’을 신뢰하는 가이드로 선택했고, 그가 영화 작품에서 무엇에 관심을 기울이며 어떻게 이야기하는지에 집중할 뿐만 아니라 한줄평과 해석 방식을 모방해 영화를 이야기해왔다. 세상의 “수많은 좋은 것, 아름다운 것”을 위해 “의도적으로 취향을 넓히려 노력한다”는 이동진의 취향, 또는 취향에 대한 태도는 “특정 장르나 범주에 [대한] 호불호”를 지양하며 최대한 ‘중립’을 유지하려 한다는 점에서, 그가 자주 쓰는 말인 하나의 “입장”에 가까웠고, 이후로 다른 평론을 접하게 된 관객들에게 평론가 개인을 각각의 입장 또는 관점으로 인식하도록 만든 것 같다. 한 평론가가 다른 평론가와 구별되는 것은 그가 높게 평가하는 영화들의 리스트일 뿐만 아니라, 영화라는 큰 틀과 개별 영화를 아우르며 어떤 접근법과 스타일로 이야기하느냐의 문제인 관점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이동진의 최대 업적은, 2010년대 PC담론 및 페미니즘 리부트의 물결 속에서 그 흐름의 내부자는 아니었지만, 이와 함께 영화문화의 취향 프레임 약화에 기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의 영화 이야기 역시 영화에 관한 하나의 흥미로운 관점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취향'과 ‘관점’이란 말은 모두 개인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영화를 ‘통한’ 개인의 이야기로서 세련됨, 진실함, 독특함 등의 가치에 방점을 찍는 취향과 달리, 관점은 영화에 ‘대한’ 개인의 이야기이자 새로움, 다양함, 설득력 따위를 강조한다. 중심이 되는 어휘의 변화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프레임이 다른 이야기의 물꼬를 튼다.
평론들은 영화 이야기에서 최소한의 게이트키퍼이자 대략적인 가이드라인 역할을 한다. 이것은 평론가들의 감식안과 지식의 도움을 받아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를 선별하는 일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평론은 일종의 발제문이 되어서 소위 양질의 떡밥을 던져준다. 즉, 좋은 평론은 특별히 눈여겨볼 필요가 있거나 공공의 화두가 될 만한 의제, 또는 동시대의 쟁점을 선명하게 제시하며, 사회적으로 중요한 비평의 거점들을 만들어낸다. 또한 영화라는 세계에 입문한 사람들에게는 무엇에 관심을 기울이며 어떻게 논의를 전개하는지에 대해 참고할 수 있는 모델을 제공함으로써 감상을 구체화하고 표현하는 기술을 익힐 수 있는 장을 마련한다. 그렇게 해서 관객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이야기의 수준이 최악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하한선을 지켜준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대중음악에서 평론이 힘을 발휘했다면 우리의 음악 이야기는 어떤 모습일까? 관점이란 말의 언급 빈도가 높아진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렇다면 대중음악 담론장에서 취향 프레임의 힘은 약화되고, 논의의 질도 좀더 나아지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러한 가정은 무용하다. 분투하는 소수의 평론가들이 있지만, 그 영향력은 매우 미미한 것이 지금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이러한 현실을 만들어냈을까? 한국에는 유명한 평론가가 없거나, 읽을 만한 평론이 드물기 때문일까? 음악에 관한 좋은 리뷰들은 있지만, 엄밀한 의미의 평론은 왜 쓰이기 힘든가? 과연 평론가가 음악산업과 팬덤에 복무하지 않으면 밥줄이 끊겨 살아남기 어려운 탓일까? 이에 대해 나는 그것을 리스너들이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답하고 싶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특정한 취향 이야기의 규칙을 리스너들이 원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물론 리스너는 단일한 집단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유독 큰 목소리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지배적인 분위기가 있기 마련이며, 예술영화 관객들이 이루는 영화문화와 비교할 때 음악문화 특유의 성격이 두드러진다.
이는 평론, 더 정확히 글에 대한 태도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다. 어느 쪽이나 별점이나 점수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지만, 리스너들은 글을 읽지 않고 점수만 보는 관행이 유독 강하다. (리스너들이 글을 읽지 않는 것은 전세계적인 현상이지만, 한국은 유달리 심해 보인다.) 글을 읽지 않는 것은 당연한 규칙처럼 자리 잡고 있어서, 영어와 한국어를 모두 포함해, 평론 또는 논쟁점이 있는 리뷰를 읽는 사람들이 있어도 자기가 그 글을 읽고 어떤 생각이나 느낌이 들었는지 이야기를 꺼리게 된다. 어차피 혼잣말이 되거나 읽지 않은 사람들이 불필요한 시비를 걸 것이라 여기기 때문일 테다. 이러한 이곳의 분위기가 평론, 더 정확히 평론을 추동하는 조건, 즉 어떤 음악이 좋은 음악이고 왜 좋으며 어떤 점이 좋은지에 관한 가치 평가부터 음악을 둘러싼 문제적 현상들에 대한 진단을 불러일으키는, 음악이 던지는 질문들을 외면하고 일차적인 감각에만 집중하도록 몰아간다. 자기 자신의 순수한 주관과 감상이 제일 소중하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신념이 거의 종교적이라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거품’(하이프)이나 ‘취존’으로 방어하는 경향이 강화되고 있다. 음악은 자기 자신이라는 종교에 봉사하는 성직자이며, 취향이란 말은 자기 자신이라는 성을 지키는 문지기다. 다수의 리스너들은 음악은 직관적인 것이라는 이야기를 되풀이하면서 언어를 질식시킨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음악에 대해서는 ‘원래’ 설명하기 어렵고 자신의 느낌에는 이유가 없으니 더 구체적인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되며 말할 수 없다고 굳게 믿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신념을 타인들에게 전파하는데, 이러한 음악 듣기는 최소한의 노력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원하는 입문자들을 유인해 그들 사이에서 쉽게 퍼져나간다. 자기 자신에 대한 맹신만큼이나 ‘언어화하지 않기’란 규칙, 아니 태도는 매우 강고하고, 이를 체화한 리스너들은 스스로를 주체적이라고 여기지만, 이러한 신념들 자체가 음악을 듣는 다른 사람들의 영향을 받아서 폭넓게 공유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좋은 평론이 등장하더라도 화제가 되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 이야기의 가치를 알아볼 사람들, 더 좋은 방향으로 논의를 끌고나갈 바탕이 있는 사람들은커녕 끝까지 제대로 읽어낼 사람들이 드물고, 그들은 이미 주변부로 밀려나 있기에 말을 아낄 것이다.
반면, 관객들이 만들어내는 영화문화는 사뭇 다르다. 영화는 평론을 읽는 문화가 어느 정도 자리 잡혀 있다. 물론 평론의 내용 대신 평론가라는 캐릭터 이미지를 소비한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지만, 평론가의 권위에 의존하거나 평론가의 견해를 자신의 것처럼 되풀이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은 어쨌든 글이 읽히긴 한다는 증거이다. 긴 글을 읽고 핵심을 파악해내는 기본적인 문해력은 필수적이거나, 계속 읽어나가는 과정에서 나아진다. 또한 다수의 예술영화 관객들은 영화가 전해주는 감흥을 소중히 여기지만, 다른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어떻게 느꼈을지 궁금해한다. 자신과 비슷하게 느꼈을지, 아니면 자신이 보지 못하고 놓친 걸 봤을지, 또는 연륜과 감식안이 있는 평론가는 어떤 점에 주목했을지 의문을 품고 영화가 던지는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찾으려고 능동적으로 움직인다. 예술영화가 동시대 정치적‧윤리적 담론에 민감한 만큼, 최신 담론의 흐름과 영화사‧비평적 지식의 습득에 열려 있을 뿐만 아니라, 평론가든 다른 관객이든 타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줄 알고, 그것들을 바탕으로 자신의 감상과 생각을 정돈한다. 이들에게 영화를 본다는 건 자기 자신에게 빠지는 일이 아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야를 넓히고 영화의 안팎을 가로지르는 행위, 영화와 자기 자신과 세상과의 삼자대화다. 영화 관객들은 영화를 보고 생각하고 언어화하는 데 익숙해지려고 하고, 나아가 그로부터 얻은 것을 자신의 지식체계나 삶 속에 녹여내려고 애쓴다. 이러한 태도가 지배적인 분위기는 비슷한 성향과 지향을 가진 사람들을 영화문화로 손쉽게 끌어들이며 기존의 문화를 재생산해낸다.
평론 및 언어화를 둘러싼 이러한 태도 차이는 시각화 여부, 즉 매체의 근본적인 차이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이지만, 각각의 담론장 구성에서 나타나는 차이가 더 결정적인 것 같다. 사실, 음악이 보이지 않는 추상적 형식이기 때문에 언어화는 원래 힘들다면서 포기해버리는 것은 가장 저열한 핑계에 가깝다. 영국의 음악학자 니콜라스 쿡이 이야기하듯이 음악에 대한 언어는 어차피 ‘음의 높낮이’, ‘텍스처’와 같은 말처럼 ‘모두’ 은유를 수반하기에 “외적 실체에 얼마나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설득력 있게 와닿느냐”가 중요한 문제이며, 인상비평을 포함해 은유적 표현은 심각한 결함이 아니다. 게다가 음악학의 중요한 하위 분야로 역사적 음악학, 체계적 음악학, 민족음악학이 존재하듯이, 음악은 인간의 문화와 역사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에 체계적 음악학에 속하는 음악이론적인 의미의 소리에 국한되지 않으며, 비전공자인 일반 대중 대상의 잡지와 단행본이 읽히는 클래식과 재즈만 살펴보더라도 음악 이야기는 시각과 밀도 면에서 다양하게 존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담론장 구성에서 차이가 있다는 것은, 인터넷 공론장이 영화산업, 영화학, 영화평론계뿐만 아니라 다른 학문과 문화예술, 사회운동 등 그 밖의 다른 영역과도 꽤 긴밀하게 연결된 예술영화와 달리, 대중음악에서 주로 이야기가 이루어지는 곳이 ‘폐쇄적인 인터넷 공동체’라는 의미이다. 일반적으로 영화담론은 여러 영화잡지에 실리는 평론들과 극장 GV를 통해 생산된 이야기들이 인터넷에서 순환되거나 인터넷에서 자체적으로 이슈와 의제들을 만들어내는 양상을 띤다. 특히, 인터넷 공론장은 이곳저곳 다양한 형태로 흩어져 있지만, 1980,90년대를 지나온 윗세대 시네필들로부터 전승되어 심각한 단절 없이 재생산되는 특유의 공통된 ‘태도’가 있고, 세대 간 취향 차이가 크지 않기에 다양한 연령대가 공존한다. 이는 오랜 시간 시행착오와 검증을 거쳐 자리 잡은 시스템과 영화 이야기의 안정적인 규칙과 함께, 일종의 동료뿐만 아니라 선배와 어른들이 버젓이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반면, 한국에 살고 있는 리스너에게 음악이 이야기되는 곳이란, 사적인 대화들을 제외하면 인터넷 공동체의 유의어이다. 디시‧엘이‧펨코‧해연갤 등의 국내 커뮤니티, 블로그, 트위터, 인스타, 카카오톡, 디스코드, 유튜브‧멜론 등의 스트리밍 서비스의 댓글, 그리고 포챈‧레딧 같은 해외 커뮤니티와 RYM, 몇몇 음악웹진이라는 인터넷 공간의 외부를 찾기란 어렵다. 이곳에는 학계의 영향력이 없고 평론가들의 존재도 미미해서 그들은 언급되는 경우가 드물다. 음악잡지도 없고, 음악 감상 모임도 찾아보기 힘들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음악 이야기가 음악 추천이나 음악가 덕질의 바깥으로 나가는 일 또한 흔하지 않다. 크고 작은 각종 공연장, 음악페스티벌, 음반점, 레코드페어처럼 사람들이 실제로 모일 수 있는 장소가 존재함에도, 기억할 만한 이야기가 오가는 자리는 아티스트 토크처럼, 그나마 음반산업의 후원하에 열릴 수 있었을 서울레코드페어의 몇몇 부대 행사 정도인 것 같다.
인터넷 이곳저곳에 파편화되어 있는 공동체들을 공론장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분명히 존재함에도 목소리를 낮추는 사람들이 적지 않고, 목소리가 크고 자극적인 발언을 하는 이들에게 가려지거나 밀려난다. 대부분은 10대와 20대 초반인 이들이 익숙해 있는 것은 반권위주의와 반지성주의와 자기증명이다. 여기서 주류를 이루는 태도와 이야기의 규칙은 주류 인터넷문화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음악문화는 인터넷문화와 잘 분리되지 않는다. 이는 한국의 대중음악 담론장의 기원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특히, 한국의 인디록과 힙합은 애초에 한국의 시네필문화나 외국의 하위음악문화처럼 지리적으로 특정한 장소에서 모이는 사람들로부터 배태된 것이 아니라, 1990년대 PC통신과 이후의 인터넷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리스너들은 인터넷문화의 변화를 그 누구보다 빨리 받아들이거나 선취해낸 인터넷문화의 전위들이었다. 현재의 주류 인터넷문화를 완전히 체화한 오늘날의 리스너들은, 누군가의 과격한 표현에 따르면, “뇌 빼고 귀만 달린 바보들”, 또는 “머리 쓰기 싫어하고 복잡한 생각할 줄 모르고 글 못 읽고 뇌 텅텅 비운 채 매일매일 도파민 펌프질에 빠져 사는 대가리 꽃밭들”이다.
음악에 대한 사유와 언어를 추방해냈을 때, 그리고 음악의 장소를 오로지 ‘나’로 채우려 할 때, 이것은 크나큰 자유와 해방감을 선물한다. 마치 권위와 관습과 전통이 존재하지 않는 듯한, 명령과 간섭과 규제가 사라진 듯한, 고전과 정전에 개의치 않는 듯한, 공식적인 문화와 제도로부터 멀어진 듯한, 역사로부터 단절되고 사회로부터 고립된 듯한 아이들의 공간은 청년 하위문화로서 오랫동안 음악문화가 가진 매력이기도 했다. 하지만 반권위주의와 반지성주의와 자기증명이 결합한 인터넷 공동체가 여러 유해함이 파묻혀 있는 지뢰밭이라는 사실 또한 명확하다. 적어도, 자기표현이 중요했던 과거의 청년 하위문화에는 언제나 새로운 언어와 스타일의 발명이 함께했다. 이곳에는 다른 언어를 찾아내려는 노력이 부재하며, 결정적으로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의 부족함과 모자람, 수치심과 열등감을 느낄 필요가 없고, 선입견과 편견과 무지를 돌아볼 필요도 없으며, 변해야 할 필요도 없다. 피곤해질 일도 없고, 부정도 비교도 충돌도 갈등도 없다. 더 알고자 하는 호기심, 지식욕, 탐구심, 상상력, 상향심은 물론 배움과 성장도 없다. 자기 자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만 요구하는 세계, 다른 것들과의 부딪힘이 없는 세계에서 깊이 있는 감정과 새로운 앎이 싹틀 수 있을까? 그러므로 더 중요한 질문이 있다. 우리가 이것을 원하고 이것이 지배적인 음악문화로서 앞으로도 계속 남아 있다면, 좋은 평론가는 차치하더라도 좋은 음악가들이 나올 수 있을까?
미국의 문학비평가 윌리엄 데레저위츠는 2023년 「문화가 너무 따분해졌다」라는 글에서 우리 시대의 예술이 왜 지루한지 질문하며, 청중들의 나르시시즘을 지적한 바 있다. “예술은 우리를 안심시켜야지 결코 우리를 위협하거나 우리가 모자라고 무지하고 미숙하다고 느끼게 만들어서는 안 되고, 우리의 소중하고 졸렬한 자아를 반사해 보여줘서는 안 된다는 요구”가 번성하고 있다고 말이다. 이것은 음악을 포함한 예술만이 아니라 오늘날 인터넷에서 오가는 음악 이야기에 딱 들어맞는 비판이기도 하다. 그는 “위대한 예술을 창조하는 데 위대한 청중이 위대한 예술가보다 더 중요하다”라는 프랜 리보위츠의 말을 인용하며, 리보위츠가 염두에 두고 있던 전후 세대 청중들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전후 세대의 문화에 대한 열망을 두고 비웃기는 쉽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은 열의가 있었다. 적어도 그들은 결여를 느꼈다. 그때 당시 열망은 적어도 어떤 영역에선 의무였다. 나는 1960년대와 70년대의 대학생들을, 보다 높은 의식 차원에 다다르려 했던 대학생들의 진지함을 생각한다. 많은 대학생들이 카프카와 사르트르를 읽고 유럽 영화를 보며 현대 미술을 감상하고 조니 미첼, 패티 스미스, 밥 딜런, 루 리드의 노랫말에 담긴 메시지를 읽어내려 골몰했다. [평론가] 수전 손택이 문화의 상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런 삶의 자세를 체화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젠 그런 종류의 열망, 우리가 불완전하다는 갈급한 감각, 보다 높은 차원의 타자에 대한 갈망을 보기 어렵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인다. “사람들이 보다 높은 교양을 갖기 위해 경쟁하면 예술가가 승리한다. 그럼 우리 모두가 이긴다.” 우리는 정말 이기기를 원하는 것일까?
나는 음잘알이 되고 싶은 아이였다. 성급하고 게걸스럽게, 디깅을 멈추지 않았다. 웹진의 평론가와 블로그의 음잘알들이 언급하는 음악을 따라 들었다. 짧은 일본어 실력으로 번역기를 돌리면서 일본어 웹사이트를 뒤지고, 피투피 프로그램에서 사용자들에게 무작정 메시지를 보내 추천을 구하면서 엠피쓰리를 긁어모았다. 빨리 나만의 근사한 취향을 완성하고 싶었고,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지우고 싶었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의 취향을 훔쳐서 지금의 내가 되었다. 인터넷에서 알게 되어 도시 이곳저곳을 함께 돌아다녔던 친구들이 있었다. 취향은 서로가 신뢰할 만한 동족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용도로 쓰였다. 좋아하는 인디밴드 공연을 보고, 카페에서 요즘 들을 만한 음악 이야기로 시작해 한국에서 달달한 인디팝이 유행하는 현상을 비난하다가 헤어지곤 했다. 음악이 아닌 다른 이야기가 훨씬 많이 오갔다. 영화, 문학, 미술, 맛집, 정치, 사회운동, 가족의 상처, 망한 연애, 우울증까지 우리들의 대화 소재는 마르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정말 좋아했다. 거짓말이다. 가끔은 지겨웠다. 우리는 다른 것을 듣기 바랐지만, 말할 때는 규칙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음악 이야기는 자주 겉돌고 헛도는 기분이었다.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했다. 사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도, 그것을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인터넷의 불특정 다수와도, 취향이 맞는 사람들과의 대화에서도 답답함은 해소되지 않았다. 그것은 언제나 찜찜한 흔적처럼 나를 따라다녔고, 여태까지 나를 음악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이 글은 스무 살 무렵의 나를 위해 썼다. 그 아이에겐 이러한 설명이 가장 절실히 필요했다. 이 글은 미숙하고 어리석었던 나 자신에 대한 반성이자 너무나 뒤늦은 이해의 시도이다.
하지만 이 글을 쓰게 된 더 중요한 계기가 있다. 차이와 갈등이 피곤한 탓인지 나만의 플레이리스트에서 안식을 찾거나 정보와 음악 추천, 가볍고 얕은 농담에 만족하는 2020년대에도 그 이상을 바라는 사람들이 보였다. “뇌 빼고 귀만 달린 바보들”을 향한 디시 유동의 ‘깊은 빡침’, “매우 젊고 강박적인 리스트 마니아”부터 해외 리뷰‧인터뷰를 꾸준히 번역하는 블로거까지 리스너들의 “교양의 양극화”에 대한 한 영화평론가의 냉정한 지적, “음덕 정체성이 전면화된 사람들 특유의 냉소주의”에 대한 또 다른 영화평론가의 의문, “보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은 계속 발전하면서 듣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은 계속 퇴보한다. 이제 보는 것은 듣는 것도 보이게 만들라고 한다”는 음악가‧사운드아티스트의 근심, 그리고 “음악은 들어서 좋으면 그만이지 뭐가 더 필요하냐고 묻는 사람”에게 자신이 번역한 이 책(『음악에 대한 몇 가지 생각』)은 “내가 꺼내들 수 있는 최고의 무기”라는 음악책 전문 번역가의 결기 등등 현재의 지배적인 음악문화에 의심과 불만을 품는 사례가 계속 눈에 들어왔다. 내 무의식을 통해 걸러지고 포착되었을 이 목소리들은 그동안 내가 느꼈던 답답함의 발원지를 가리키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음악을 듣는 사람들, 그리고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라는 문제를 향해 있었다. 그곳에는 애증, 더 정확히 기대, 실망, 체념, 회의, 다시 기대가 한없이 교차하는 나의 마음이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음악을 좋아하게 된 것은 음악이 지닌 힘 때문이었다. 음악에는 여러 마법 같은 힘이 있다. 지금 여기를 채우는 공기와 우리의 기분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고, 뻣뻣한 몸조차 들썩이게 하는 능력도 있으며, 경험해본 적 없는 음악 속 풍경을 내 것처럼 느끼게 하는 능력도 있다. 시대의 마음을 가늠하게 하는 능력도, 용기 부족으로 회피해온 우리의 감정과 기억을 대면하게 하는 능력도 있다.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신기한 것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따라나서도록 만든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음악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사람들을 실제로, 동굴 속으로 아니면 저 멀리 어딘가로 움직이게 한다. 음악이, 또는 특정 음악가나 장르나 신(scene)이 구심점이 되어서 이끌어내는 특정한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문화가 있다. 어느 순간, 내게 음악 듣기라는 행위가 주는 자극과 도피의 감각, 음악이 펼쳐지는 추상의 세계에서 느끼는 짜릿함과 아늑함보다 구체적인 것들, 즉 놀라운 재능을 지닌 음악가란 존재, 그리고 특정 음악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연결된 사람들과 음악을 둘러싼 문화에 대한 매혹이 더 크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음악이라면 모두 무차별적으로 좋아하지 않았고, 음악을 좋아한다는 사람들에게 무조건 호감을 보내지도 못했으니까. 이것은 작품이나 사람에 대한 호불호라기보다 차라리 어떤 가치에 대한 호불호라고 말해야겠다.
청각을 비롯해 오감을 민감하게 타고난 사람들, 소리로부터 감각적 자극 이상의 많은 것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 주로 음악에 끌리고 푹 빠지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특히, 내가 좋아했던 ‘일부’ 비주류 대중음악 리스너들에게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이 있었고, 이러한 성향을 가진 이들이 비주류 대중음악이 만들어내는 문화 속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들어왔던 것 같다. 이들이 비주류 또는 인디 음악에 애착을 갖게 된 건, 그저 무한하고 다양한 음악들의 세계를 알아나가는 과정 중에 어쩌다가 걸치게 된 하나의 취향이라거나, 남들이 모르는 음악을 듣는 자기 자신이 멋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결코 아니었다. 주류 음악으로 상징되는, 주류에서 지향하는 가치와 삶의 방식이 자신에게 안 맞는 옷이거나 입고 싶지 않은 옷이라는 자각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기에는 새로움, 자유, 자기다움 따위의 가치를 좇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제도가 정의한 것과는 다른 의미의 실험성‧혁신‧운동을 ‘우리’가 만들어내고자 하는 열의 또는 과욕, 여러 종류의 진실에 대한 집착, 섬세하거나 깊거나 그 둘 다에 해당되는 취약한 감성, 다양한 스펙트럼의 반골기질과 이상주의 같은 단어들이 이곳저곳에 흩뿌려져 있었다.
자기가 느꼈던 무언가가 어떤 음악가와 그것을 듣는 사람들 사이에 비슷하게 공유되고 있다고 상상하는 과대망상자들, 음악이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더 큰 세상으로 향하는 비밀스러운 문이라고 생각하는 몽상가들, 음악에 대해 제어하지 못하는 호기심에 사로잡혀 있거나 과도할 정도로 탐구심을 발휘하는 과몰입의 달인들, 새롭게 쏟아져나오는 음악들 속에서 현재의 감각에 집중하고 동시대성을 만끽하면서 미래 또한 선취해내고 싶어하는 진보주의자들, 타고나거나 가꿔진 성향이 지금 여기의 지배적인 사회‧문화적 ‘대세’에 어긋나기에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한 불만을 오가는 투덜이들, 정신적인 허기와 결여에 끊임없이 시달리는 권태롭고 우울한 문제적 인간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에 의구심을 품고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예감하는, 그래서 이 세상에 더 나은 것 또는 다른 것이 있다고 믿는 낭만주의자들, 데레저위츠의 표현을 다시 한 번 빌리면 “보다 높은 의식 차원에 다다르려 했던” 진지한 “열망, 우리가 불완전하다는 갈급한 감각, 보다 높은 차원의 타자에 대한 갈망”을 지닌 이들이 음악, 나아가 다른 문화예술에 홀리고 소위 ‘홍대병’, ‘힙스터’, ‘예술충’이 된다.
하지만 이들의 목소리는 점점 희미해지는 것 같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정보와 추천과 납작한 취향이 중심이 되는, 나아가 반지성주의적이고 유희적이며 폭력적인 경향이 강화되는 음악문화에서는 선택적인 참여도 한계가 있다. 이들은 자기 자신을 숨기거나, 먼저 달아나거나, 밀려나고 쫓겨난다. 대중음악 담론장이 10대와 20대 초반이 중심이라고 하더라도, 이미 지배적인 규칙에 동의하지 않는 10대와 20대 초반은 발붙일 곳을 허용받지 못한다. 이러한 규칙을 무시한 채 자신이 동원 가능한 모든 언어를 사용해 음악에서 비롯된 감흥과 의문을 나누고자 하는 이들은 별난 사람 취급에 상처받거나, 음악을 좋아하는 다른 이들과 대화가 통하지 않음에 답답해하거나 실망하고 이 총체적 난국에 체념한다. 음악은 어차피 혼자 듣는 것이고 음악 이야기는 별 쓸모가 없다고 냉소하거나, 자신의 기질과 성향에 좀더 맞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다른 분야와 영역으로 중심 관심사를 옮기기도 한다. 이와 같은 배제와 동질화가 반복된다면, 민감하고, 파고들고, 갈망하는 이들이 더 이상 음악에 오래 머무는 일은 없을 것이다. 현재의 음악문화는 점점 더 수많은 폐쇄적 공동체로 조각나고 있지만, 어디서든 사람들은 그 이상의 무언가를 기대하는 마음을 잊어버린 것 같다. 이 기대란, 음악에, 다른 리스너들에게, 그리고 음악의 동의어이기도 할 세상에, 결국은 자기 자신에게 놀라운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란 믿음이다. 기대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이러한 기대가 희미해져 소위 ‘쿨’함이 잠식한 이곳에서 여전히, 과거의 나와 내 친구들과 내가 좋아했던 사람들과 비슷한 마음을 품은 듯한 사람들을 본다. 기대라는 감정이 삐져나오는 걸 난처해하면서 실망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본다. 실망하지 않으려면 기대를 하지 않으면 되고, 냉소와 체념과 약간의 위악으로 자신을 감싸면 된다. 그럼에도 기대를 완전히 버리지 못한 채 지금 10대나 20대 초반의 시간을 지나고 있을 이들이 있다. 이들은 내가 있었던 그곳으로 모였다가 동료들을 만나지 못해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이들이 안쓰럽다. 이 불안정한, 이해하고 싶고 이해받고 싶어하는, 헤매는 이들이 자신과 비슷한 마음으로 비슷한 꿈을 꾸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현실을 확인할 수 있기를, 그리고 함께 더 멀리 갈 수 있기를 바란다. 이들이 덜 외롭기를, 덜 속상해하기를, 덜 방황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썼다.
오늘날 음악을 듣는다는 건 혼자 꾸는 꿈이 되어버린 것 같다. 특히, 알고리즘에 기반을 둔 음악 듣기는 표현과 소통의 필요성을 지워버리며, 음악을 매우 사적이고 고독한 행위로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런 흐름이 못마땅한 이들이 분명히 존재하기 마련이다. 비주류 대중음악에 끌리는 어떤 사람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의심과 불만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이들이 음악을 이야기하는 언어에 대한 고민을 시작할 것이다. 크고 작은 공연, 음악페스티벌, 감상 모임 등을 통해 음악을 함께 듣는 것으로 복원해내고, 팬덤과 다른 방식으로 음악가들의 이름을 사용하며, 사회의 다른 영역들과의 연결을 살려낼 것이다. 함께 꾸는 꿈으로서의 음악에 빛을 비출 것이다. 이 모든 곳에서 새로운 음악 이야기가 자라날 것이다. 내게는 그런 기대가 있다. 대화가 통할 것이라는 기대를 불러일으키며 진지하게 듣는 사람들, 안전한 관계와 집단을 찾아내자. 냉소와 체념에서 벗어나 좀더 욕심을 부리자. 기대와 설렘을 되찾자. 우리는 만나고 모여야 한다. 당신이 지금 10대거나 20대 초반의 시간을 지나고 있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한국의 음악문화는 축적이란 말을 모른다. PC통신에 있던 음악 동호회와 소모임들로부터 웨이브 자유게시판, 사케르, 프리챌‧싸이월드의 클럽들, 이글루스, 그리고 가슴‧보다‧아워타운‧스캐터브레인 등 몇몇 웹진과 최근의 인디포스트까지, 인터넷에서 음악 이야기가 오가던 장소들은 그렇게 사라졌다. 과거의 말들은 ‘꼰대’, ‘틀’, 낡은 것으로 치부되지만, 이미 망각과 단절뿐인 이곳에선 매번 또 다시 똑같은 이야기가 되풀이된다. 유의미한 통찰들은 다른 곳으로 확산되지 못하고, 어느 곳에서 운 좋게 비판적 논의를 거쳐 공동의 새로운 합의가 형성되더라도 연속성을 지니고 이후에 전해지지 못한 채 증발되었다. 모든 말들이 일시적이고, 산발적으로 흩어지고, 잊혀진다.
다시 쓴다. 20년이 넘게, 음악에 대한 말들의 주검 위에 굳어져버린 이 변하지 않는 세계가 나는 좀 두렵다. 앞에서 언급한 지배적인 듣기 방식이자 이야기의 규칙들은 내가 처음 이런 음악을 듣기 시작한 10대 시절부터 강고했으며, 이를 둘러싼 다양한 비판들이 수없이 제기됐지만, 사람들은 한 번도 접한 적 없는 듯이 초보적이고 기본적인 이야기부터 매번 다시 반복한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의 음악문화 또는 한국의 대중음악 담론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2000년대부터 지속된 현상에 대해, 특정한 규칙과 프레임에 갇혀 매번 동일한 곳으로 돌아오는 유령 같은 생각들에 대해 기록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여기 너무 오래 머물렀던 사람이 기억의 잔해들을 뒤져 쓰는 일이기도 했다. 내가 반복적으로 느꼈던 현기증을 또 누군가는 겪고 있으니, 이 역시 겉돌고 헛도는 이야기일지라도 쓸 수밖에 없었다. 의문만 끊임없이 증폭되고 같은 장소를 계속 맴돌고 있을지라도. 현실과 괴리된 ‘뇌피셜’ 해석을 피하지 못하고 과격한 편향적 표현들이 돌출되는 이 장황한 글은 이러한 상황이 때로는 불편하고 슬프고 실망스러운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음악 이야기의 규칙에 의심과 불만을 품는 이들, 음악에서 타자와 사유와 언어를 제거해내는 흐름에서 벗어나고 싶은 이들에게 힘을 보탤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이 글에 대한 어떤 의견이라도 좋다. 한국의 음악문화와 대중음악 담론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기다린다.
많은 사람들이 반문할 것이다. 음악 이야기가 굳이 필요한가? 음악은 애초에 언어화하기 어렵고, 그냥 자기가 들어서 좋으면 되는 것이며, 이 정도 이야기면 충분하지 않냐고. 그리고 덧붙일 것이다. 진실된 표현과 소통은 음악 이야기가 아니어도 가능하다고. 모두 옳다. 이 말들은 틀리지 않았다. 음악에 관해 더 정확하거나 깊이 있거나 다채로운 이야기에 욕심을 내지 않아도 되고, 음악을 듣는 다른 사람들과 음악이 자리한 더 큰 세상에 관심을 갖지 않아도 되며, 음악을 아예 듣지 않아도 삶은 지속된다. 인생에는 더 중요한 일과 시급한 이야기가 많다. 하지만 당신이 음악을 특별히 소중히 여기는 리스너라면, 그것은 당신이 음악에 많은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들이는 만큼 음악 이야기가 열어줄 새로운 지평, 새로운 인식, 그 이상의 무언가에 닿을 가능성들을 접어버리는 일이다. 지금의 세계를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현실의 승인이다. 언어와 함께 사유와 타자가 희미해진다면, 그것은 음악 이야기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다른 것에 대한 이야기들로부터, 또는 이야기들로 번져나가는 과정일 것이다. 당신이란 세계는 변하지 않거나 더욱더 축소되고 얄팍해지는 방향으로 흐를 것이다.
그러나 음악 이야기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한국사회에서 말들의 가치가 쇠락하는 역사적 흐름 속에서 생겨난 것이기도 할 테다. 그러니까 30여 년간 지속된 군사독재하에서 일상적 억압과 물리적 폭력 속에서 살아온 한국인들은 1987년 민주화 이후, 이제는 말이 통하고 대화로 해결할 수 있는 세상이 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1990년대는 각종 사회‧문화 담론들이 매우 활발한 시기였고, 음악에 관한 이야기도 가장 뜨겁고 심지어 잘 팔리기까지 했다. 취향으로서의 음악 담론이 도착하기 전, 대중음악은 영화와 함께, 학계 바깥에서 온갖 담론들이 교차하는 인문학적 교양의 중심이었다. 이 시기 창궐했던 온갖 잡지들에 실려 음악에 대한 여러 관점과 태도, 스타일의 글들이 쏟아졌고, 각지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리스너들은 PC통신 음악 동호회‧소모임으로 모여들었으며, 지적 허영과 스노비즘 그리고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의 실험이 만연했다. 여기에는 말글을 통한 자유가 가능하고 언어를 도구로 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광범위한 믿음이 존재했던 것 같다. 독일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의 공론장과 의사소통이론이 도입돼 유행했던 것도 이 시기다. 이러한 믿음은 인터넷이 대중화된 200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는데, 인터넷이야말로 진정으로 자유로운 토론 공간이라는, 지금 보면 헛웃음이 나오는 유토피아론이 그 시절에 여전히 유통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의 유효기간은 딱 여기까지였던 것 같다. 도대체 2000년대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사람들은 더 이상 말에 기대를 걸지 않게 된 것처럼 보인다. 아무리 말을 해도 통하지 않는 상황이 누적되면서 무능한 말의 현실에 실망했기 때문이었을까. 언어에 대한 신뢰는 급격히 무너졌다. 사람들은 언어가 표현과 소통의 수단이자 문제를 제기하고 공론화해서 해결할 수 있는 도구라고 더 이상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 밈적 언어, 감정의 양극화(갈라치기, 팬덤, 혐오), 쿨찐의 심플한 어휘 사전(‘누칼협’, ‘알빠노’, ‘긁’)으로 소통하는 시대가 열렸고, 무성의하게 내뱉은 말들이 인터넷에 무성하다. 말 자체가 무용해진 시대에 음악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소용일까?
더군다나 음악은 언어에 대한 불신이 오래된 관습으로 자리 잡은 곳이다. 음악을 이야기하는 언어에 대한 뿌리 깊은 냉소, 그리고 언어를 무력하게 만드는 신비의 영역에 음악을 가둬버리는 믿음의 기원은 유럽의 낭만주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언어를 거치는 소통은 불완전하지만 음악을 통해서는 마치 텔레파시처럼 온전한 감정을 손상 없이 전할 수 있다고 믿는다.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음악을 들으면서 어떤 종류의 쾌감 또는 감정의 움직임을 경험하지만 그 이상으로 파고들지 않는다. 보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언어화를 고민하고 지속적으로 언어를 다듬어나가지만, 듣는 것에 대해선 말하기 어렵다는 핑계로 말하지 않는 걸 당연하게 여긴다.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 건 은연중에 구차하거나 피곤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SNS에 음원 링크만 달랑 남기면서 남들이 자기의 느낌, 아니면 자기의 감식안을 알아주길 바란다. 또는 그 음악을 그대로 들이밀면 알 사람은 알겠고 모를 사람은 모를 거라고 여기면서 소통의 기대를 최소화한다. 철학‧문학에 익숙한 사람들조차, 언어를 통한 탐구 활동을 좋아하면서 음악은 그러한 활동의 긴장을 푸는 영역, 언어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검은 대륙으로 남겨두는 사람이 대다수다. 하지만 우리의 음악 경험을 표현하고 소통하기 원한다면, 우리가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면, 결국 가장 흔하며 손에 잘 닿는 방법은 언어를 통한 것이다. 음악을 언어로 옮긴다는 건 건축을 춤으로 옮기는 것만큼 부조리한 일이며 계속 지는 게임이라는 생각이 들더라도, 불완전한 언어의 힘을 믿어야 한다.
이 망가지고 불완전한 언어의 세계에서, 음악은 다른 언어를 개시할 수 있도록 돕는 가장 유력한 후원자이다.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시대의 마음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우리가 지금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지 이해하는 일이다. 대중음악은 음악가가 만들어낸 음악이라는 공간에서 사람들이 반응할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우리 사회 전반에 흐르는 공기를 그대로 복사해내는 작업이거나 그로부터 빠져나가려는 움직임일 수도 있고, 그동안 들리지 못했던 소수집단이나 새롭게 등장한 집단의 목소리, 감성, 감각, 욕망일 수도 있다. 사실상 앞서 여러 번 이야기했던 타자는 세상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음악은 세상을 향한 접촉면을 한없이 늘림으로써 기존의 방식을 넘어 세상을 새로이 듣는 법을 배우도록 한다. 또한 음악이 매개자 또는 보호자가 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말들도 있다. 언어로 명확하게 설명되지 못하는, 그러나 분명히 음악 속에서 내적으로 경험했던 기쁨, 슬픔, 경이로움 같은 것들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내밀한 기억 및 소망과 쉽게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우리의 진심과 바람들을 대면하는 일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음악이 이끌어낸 이야기들은 결코 꺼낼 수 없는 건 아니지만 음악이 아니라면 꺼내기 어려웠을 말이기에, 이것이야말로 ‘자기 언어’이기에 더욱 소중하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공유와 증폭, 즉 다각도의 공감이 덧붙여지거나 거친 논의가 다듬어지는 과정을 거치면서 공동의 자원으로 사용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왜 음악에 끌렸는지, 음악에서 무엇을 느끼고 경험하는지, 음악에서 무엇을 기대하는지, 아니 듣는다는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이야기에서 다시 시작해보자. 사람들이 음악에 대해 어색하지 않게 이야기하는 문화가 정착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사람들이 음악을 듣고 느낀 감흥과 의문들을 진실하게 풀어낼 수 있다면, 다시 말해 우리 모두가 자신의 음악 경험을 포착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최소한의 언어를 갖출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놀라운 공론장의 개시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음악은 우리 삶과 이 세상에 대해 소중한 이야기를 가득 품고 있으며, 음악에 대해 할 수 있는 이야기의 범위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고 깊을 것이다. 현재 음악 이야기를 지배하는 규칙들을 따르는 일이 진짜 재미있는가? 건조한 정보 전달, 기계적인 음악 추천, 피상적인 취향 타령, 논쟁을 가장한 하나 마나 한 주장들, 그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그 사실 자체에 만족하는 말들, 이제는 이러한 언어들조차 힘을 잃어가는 상황이 진정으로 재미있다면, 이런 글을 읽지도 않았겠지만, 한 번쯤은 고민해주기를 바란다. 사실, ‘음악에 관한 어떤 이야기가 재미있는가?’란 질문은 우문이다. 우리는 아직 그런 재미를 느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 재미는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하고 나서야 바로 그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기대를 품고 아직 오지 않은 재미를 찾아내야 한다. 그러므로 아주 희미한 씨앗을 붙들고 그것이 싹을 틔울 수 있는지 실험하는 것, 즉 이야기해보는 수밖에 없다.
편협한 사회성에 기반을 둔 회피적 공감, 취향의 표면만 핥는 자기과시, 혐오발언과 허튼 밈, 익숙한 음악 이야기의 규칙 바깥을 상상해보자. 서로를 향한 기대와 믿음을 담아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자. 들은 것에 관해 서툴러도 진심인 말들을 꺼내자. 적절한 근거와 이유를 들어 어떤 사안‧현상에 대해 의견을 밝히거나 일말의 의문을 표명하는 이야기, 다양한 질문을 던지며 함께 답을 찾아가는 이야기, 새로운 아이디어와 몰랐던 사실과 참신한 관점과 다른 의견들을 적극적으로 주고받는 이야기를 해보자. 취향에 관한 것이라면, ‘나는 왜 이 음악에 끌리나?’, ‘나는 왜 이 음악이 싫은가?’, ‘나는 왜 이 음악이 불편한가?’ 같은 질문에 대해, 자신을 사로잡았던 이상한 감정으로부터, 가사, 사운드, 앨범 아트워크, 뮤직비디오, 마케팅, 음악가의 캐릭터, 팬덤, 자신의 사적인 경험과 기억, 미감과 윤리, 세계관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든 동원해 그 이유를 향해 진지하게 파고들어 논의의 장에 올리자. 음악을 둘러싼 이야기라면, 여러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질문들(가령, 이 음악은 무엇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가, 어떤 맥락에서 왜 이런 음악이 부상하고 왜 이와 같은 평가를 받는가, 이 음악은 어떤 장르와 무브먼트 안에 속하며 다른 음악, 예술, 정치, 철학, 소비문화 등과 관련해 어떤 더 큰 사회‧문화적 흐름 속에 위치하는가, 여기에 특정한 경향이나 흥미로운 지점이 보인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현재 음악의 지형도는 어떤 모습인가, 어떤 사람들이 저 음악을 좋아하는가, 그 음악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이 음악은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흔드는가, 이 음악은 음악의 역사 그리고 음악산업과 리스너문화와 기술과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영향을 주고받고 있는가 등) 속에서 사람들의 호기심과 탐구심을 건드리고 생각을 보태고 싶은 충동을 자극하는 이야기를 나누자. 언어를 더 풍부하게 만들자. 음악을 듣듯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듯이 음악을 듣자. 음악, 우리 자신, 다른 사람들, 세상을 향한 이해를 깊게 하고 시야를 넓혀주는 이야기로 나아가자. 우리의 음악 이야기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를 어디까지 데려갈까. <끝>
+이 글을 쓸 수 있도록 도움을 준 M과 N에게 특별한 감사를 전한다. M은 오픈채팅 뮤트 모임의 존재에 대해 알려주고, 자신의 취향에 대해 솔직해지지 못하는 현상과 그 이유에 대한 분석을 들려주었다. 또 N은 음악 이야기의 주요 소재들과 단골 떡밥들에 대해 정리된 의견을 전해주었고, 대중음악 담론의 중심이 10대와 20대 초반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소란이 생겨난다는 사실을 지적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