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기획자이자 지휘자였다. 학창 시절 존경하던 담임선생님을 위해 반 친구들과 함께 아침 댓바람부터 스승의 은혜 떼창으로 선생님을 깨워 함께 등교하고 운동장 전교회의 때 옥상에서 선생님 사랑한다는 플랜카드와 교실 내 하트 도미노로 스승의 날 깜짝 이벤트를 했다.
카리스마를 뿜뿜 하는 사람보다 만만에 가까운 편안함으로 2대 8 가르마를 하고 교실 앞에서 설운도의 '다 함께 차차차' 열창을 하던, 수학여행 때 아파도 반 대표로 타이타닉 (친구 다리 위에 올라가 오래 버티기)을 바들바들 버티던 나는 자립심이 강하고 스스럼없었다.
고딩때 공부는 안하고 다이어리 꾸미기에 집착
세상 하나뿐인 고딩시절 내 다이어리 표지
고등학교 담임선생님이 친구 스펙트럼이 너무 다양하고 친구들이 많다는 걸 우려 섞인 톤으로 얘기할 정도로 난 친구 그룹이 소위 날라리 친구, 캐발랄 친구, 시니컬 친구, 범생이 친구, (체육 잘하는) 인기 짱 친구, 조용한 친구까지 다양했다.
시간이 흘러 불혹이 된 지금도 여전히 사람에 대해 다가섬에 스스럼이 없다. 딱딱한 갑각류보단 몰캉몰캉한 해삼처럼 호전적이기보다 다양성을 받아들이며 너와 나 다름에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랑 조화로운 시너지를 내는 사람이 있지만 사람은 누구나 장단점이 있으며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희로애락을 넘어선 복합적인 감정선을 거치면서 그리 섬세한 축에 속하지도 여성적이지도 않고, 회복탄력성과 파이팅이 넘치던 나는세상 사람들이 얘기하는 이분법적 옳고 그름, 좋고 싫음에 유연하게 대처하며 가스라이팅에 대응하며 살아왔다.
사람을 좋아하고 오픈마인드이다 보니 잘 믿고 은근 스쿠알렌, 모피 사기 같은 것 들도 당한 전력이 있다. 그리고 가스라이팅이란 개념이 없었을 때 그들의 말이 맞고 내가 이상한 걸까란 의심도 많이 들었다. 너와 내가 다르단 생각이 아니라 그들이 맞고 내가 틀렸나란 생각이 차츰 쌓여갔다.
가스라이팅은 뭘까. 가스라이팅 또는 가스등 효과는 심리적 조작을 통해 타인의 마음에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키고 현실감과 판단력을 잃게 만듦으로써 그 사람에게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패트릭 해밀턴의 연극을 원작으로 한 1944년 미국의 영화 〈가스등〉에서 유래한 말이다.
메뉴가 많은 분식점에서 '난 아무거나 괜찮아'를 되돌이표 붙은 거 마냥 말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떡볶이와 순대를 망설임 없이 외치던 나는 무언가를 결정함에 주저함이 없었고 독립심 강했고 자주성이 주어지는 것에 감사했다. 그렇게 씩씩하게 살던 나는 작년 의학적으로 조울증을 진단받았다.
지금은 감사하게도 건강해진 마음으로 돌아보면 쉽게 끊을 수 없는 사람들의 관계(구남친, 직장동료, 가족)에서 오는 가스라이팅 발언들, 감정 소모들로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는데 간과하고 삶은 계속 나아가야 하기에 몰아붙였다. 그 결과 난 늘 날이 서 있었고 쉽게 감정이 폭발했다가 작년 2월부터는 아무것도 결정할 수도, 결정하기도 싫은 상태가 되었다. 커리어상으로도 자신감이 그리 바닥을 친 시기가 없었다.
이제는 그냥 사람을 믿진 않는다. 가스라이팅인지 충고인지 구분하려고 의식한다. 삶은 누군가에게 의존하도록 만들어서도 의존해서도 안 되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