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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라게 May 18. 2021

나에게 원주란

운명적 끌림에 대하여

2017. 03. 17

내가 가족에게 양해를 구하고 집을 나와 원주에서 안식년 휴가를 누리고 있다고 얘기하면 주변 지인들이 하나같이 물어보는 말이 있다. 왜 하필 원주인가요?

자세히 설명하기 곤란한 면도 있고 해서 그냥 강원도에서 가장 살기 좋고 방 구하기 쉬운 곳이 원주였다고 대답하곤 했지만 사실 원주를 눈여겨 봐둔 건 오래전 부터였다. 친정 엄마가 원주에 방을 얻어서 2010년 부터 3년간 혼자 사신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난 원주를 점찍어 뒀었다. 


기억에 내 부모님은 사이가 그다지 좋은 부부가 아니었다. 갈등의 원인은 딱 두 가지 정도였는데 그 갈등은 아무리 싸워도 풀리지 않았고 두 분은 지치지도 않고 포기도 모른채 비슷한 싸움을 반복하셨다. 그렇게 오랜시간 싸우고 미워하면서도 헤어지지 않고 같이 사시는 게 신기했다.

자식들이 어렸다면 어려서 그랬다고 이해하련만 막내아들의 나이가 서른아홉이 될 때까지 함께 사셨으니 거의 45년을 부부로 지내신 셈이었다. 아빠가 끝까지 엄마를 붙들어 둔 데는 이유가 있었는데 남 보기에 이혼 가정이 부끄럽다는 이유가 첫째였고 또 다른 이유는 짐작컨대 재산분할이 아까워서였던 것 같다. 


아빠는 경북 깡촌에서 태어났지만 농사짓기를 거부하고 상경하신 할아버지 덕분에 서울에서 대학까지 나오신인물이었다. 가부장적 권위로 아내와 자식들을 꼼짝 못하게 하다보니 자식들은 셋 다 아빠와 다정하게 대화를 나눠본 기억이 없다. 아빠가 가정 경제를 책임지고 모든 선택권을 쥐고 계셨기에 엄마는 평생 아빠에게 생활비를 타서 간신히 생활을 꾸려나가셔야 했다. 

엄마가 막내아들 늦장가를 들이고 나서야 더 이상은 이렇게 안 살겠다며 집을 나와 황혼 별거지로 택하신 곳이 바로 원주였다. 당시 원주에는 이모네가 살고 있었는데 의지를 삼을 겸 원주를 택하신 것이다. 

명절이나 엄마 생신 때면 자식들이 엄마를 보러 원주에 내려갔다. 원주시의 도로는 넓고 한적했고 사람과 차로 붐비는 서울에 비해 정말 여유가 넘치는 곳이었다. 산도 가깝고 공기도 좋았다. 엄마는 근처 노인 복지관에 다니시며 이것저것 배우셨는데 노인복지시설이 잘 되어있다고 만족스러워 하셨다.

주거환경이나 교통면에서도 다른 강원 지역에 비해 원주가 우수하다고 판단한 나는 노후에 남편과 함께 귀촌할 곳으로 원주를 일찌기 점찍었었다.     


내가 일주일간 가출을 한 적이 있었는데 딸아이가 중2 겨울 방학 기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당시 딸은 그 악명 높은 중2병을 심하게 앓고 있었던 것 같다. 매사에 짜증이고 신경질이었으며 도무지 부모의 말이 먹히지 않는 시기였다. 스마트폰을 사주었던 게 그 즈음이었는데 아이는 방구석에 처박혀서는 하루 종일 폰만 들여다보았다. 아무리 설득하려고 해도 말을 듣지 않았다. 난 딸과의 갈등 끝에 결국 몸에 이상이 왔고 딸과 좀 떨어져 지내야겠다는 판단을 내리고는 원주 엄마의 집으로 갔다. 아이도 자기를 감시하고 닦달하는 엄마가 귀찮았는지 나를 붙잡지 않았다. 그 때 내가 겪은 지옥의 시간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고 잔인하다.     

일주일간 아이 혼자서 끼니를 해결할 수 있게 메뉴를 짜주고 장을 봐다놓고 남편에게 퇴근을 너무 늦게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고서야 집을 나왔다. 그리고 엄마와 함께 원주 엄마의 방에서 일주일을 보내며 상처받은 맘에 위로를 얻었다. 엄마는 다 지나갈 거라고 조금만 더 참으라고 다독여 주셨다. 난 그 때 작은 원룸에서 오롯이 혼자 보내는 엄마가 왠지 부러웠다. 일흔이 되어서야 내린 엄마 인생 최초의 큰 결단 앞에서 엄마도 분명 두려웠을 것이다. 집을 나왔을 때 통장에 돈 100만원도 없던 가난한 엄마는 자식들이 드리는 용돈으로 간신히 원룸 월세를 내고 근처 식당에서 시간제 근무를 하시며 그렇게 3년간 원주에서 사셨다.

평생을 가족을 위해 헌신하셨던 엄마가 왜 그렇게 가난하게 늙어가야 하는지 안타까웠지만 엄마는 웃음을 잃지 않는 매사에 긍정적인 분이셨다. 엄마는 다시 서울로 돌아와 지금은 아들 집에서 지내시는데 아빠와 가끔 왕래도 하시는 것 같다. 여전히 두 분이 따로 사시지만 부부 사이가 예전에 비하면 좋아진 건 맞다. 미워하고 갈등하는 관계에 잠시의 이별은 완전하지는 않지만 가장 접근하기 쉬운 해결책이 되지 않나 싶다.     


남편과 함께 노후를 보낼 곳으로 점찍어두긴 했어도 내가 혼자 이렇게 원주에 방을 얻게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엄마의 홀로살기에 비해 지금 나의 홀로살기는 경제적인 면에서 좀 더 여유 있고 가족과 상의 해서 이뤄진 만큼 맘도 크게 불편하지 않으며 엄마보다 내가 더 젊은 나이에 집을 나왔다는 면에서 다르다.어찌됐든 원주는 엄마에게나 나에게나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임에는 분명하다.


세상에는 우연처럼 보이지만 지나고 보면 깊은 인연이 깔려있었음을 깨닫게 되는 일들이 있다. 나에게 원주가 그랬다. 거부할 수 없는 강한 이끌림에 의해 난 다시 원주를 찾게 되었으니 말이다. 

어떤 사람이나 장소가 왠지 끌리고 좋아질 때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뭔가가 있는 거다. 그런 걸 운명이라고 불러야한다는 것에 난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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