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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내 Jun 18. 2024

이탈리아 르네상스(1)

르네상스 3대 거장

15세기의 이탈리아는 천재적인 명장들로 넘쳐나던 시대였다.
르네상스 3대 거장이라고 일컬어지는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뿐 아니라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뛰는 예술가들이 동시대에 이탈리아에서 활동했다. 


이들이 기술자로 분류되는 장인 계급이다 보니 역사적인 기록은 많지 않지만 다양한 자료를 통해 꽤 재미있는 일화를 엿볼 수 있다. 

바사리에 <예술가 열전>에 의하면 베로키오(1435~1488)는 제자인 다빈치의 그림에 너무 기가 죽어 붓을 꺾었다고 한다.


이 시절 <비너스의 탄생>으로 유명한 보티첼리도 베로키오의 공방에서 한솥밥을 먹고 있었다.

베로키오는 의뢰받은 작품인 <예수의 세례>를 왼쪽 천사와 오른쪽 배경 일부는 다빈치에게 오른쪽 천사는 보티첼리에게 그리도록 했다. 


다빈치의 그림을 본 스승이 첫눈에 그 천재성을 알아보고 자신은 이제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고 선언했다는 것이다. 

이후 그림은 다빈치에게 맡겨버리고 베로키오는 작업실 경영과 조각 일에만 몰두했다.


또 하나, 천재적인 두뇌를 가지고 있던 다빈치는 7년쯤 선배인 보티첼리를 살짝 무시했던 것 같다. 

메디치 가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던 보티첼리는 당시 유행하던 회화 기법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중세적인 섬세하고 장식적인 선을 사용했다. 

다빈치는 그의 작품이 구태의연하다고 여겼다. 

과학적인 두뇌로 당시 새롭게 각광받던 원근법에 심취해 있던 그의 눈에는 구식으로 보였을 수밖에 없었다.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와 연관된 일화도 재미있다. 

피렌체에서 함께 활동한 시기는 짧았을 테지만, 손바닥 만한 피렌체 시내에서 이들이 마주치지 않았을 리 없다. 

세련되고 멋진 라파엘로는 다빈치 숭배자였다.


하지만 좀 꼬인 구석이 많았던 미켈란젤로는 다빈치를 뛰어넘고 싶어 했다.
미켈란젤로는 다빈치보다 스물세 살 아래이고 라파엘로는 미켈란젤로보다 또 일곱 살 아래였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미켈란젤로는 키가 크고 미남 스타일에 각종 재주가 많았던  다빈치를 은근히 싫어했다고 한다.

미켈란젤로는 체구가 왜소하고 추남인 데다가 자신을 꾸밀 줄도 몰랐다.


이런 미켈란젤로가 다빈치와 작품을 통해 정면으로 마주친 일이 있었다. 

피렌체 정부가 두 사람에게 동시에 베키오 궁의 대회의실 벽화를 의뢰해 전쟁의 승리를 그림으로 표현하게 했다. 

대회의실은 매우 커 길이가 53 미터에 폭이 22미터나 되었다. 


다빈치는 앙기아리 전투를 주제로 정했고, 미켈란젤로는 맞은편 벽에 카시나 전투를 그리기로 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다빈치의 그림은 완성되지 못하고 중단되었다.

다만 <앙기아리 전투>의 다양한 스케치만이  그의 자필 연구 노트에 남아 있을 뿐이다. 

훗날 바로크의 거장 루벤스(1577~1640)는 다빈치의 스케치를 바탕으로 <앙기아리 전투>를 그렸다.


경쟁자가 없어지자 맥이 빠졌는지, 끝을 보는 성격인 미켈란젤로마저 다른 조각 일들에 바빠  이 프로젝트는 완성을 보지 못하고 흐지부지 되었다. 

현재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앙기아리 전투> 초벌그림 위에는 바사리의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다빈치 그림의 가치를 알던 바사리는 원작 손상을 최대한 막기 위해 중간에 공간을 두고  새로운 벽을 만든 다음 자기 그림을 그렸다. 

얼마 전 원적외선 카메라 등으로 연구한 결과 이 말이 사실이라는 것이 증명되기는 했지만, 바사리의 벽을 부수지 않는 한 다빈치의 그림은 볼 수 없다.


어쨌든 천재들은 서로 견제하면서도 존경했던 것 같다. 

미켈란젤로는 다빈치의 <앙기아리 전투> 일부를 모사했고, 다빈치는 그의 <다윗>을 모사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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