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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내 Jun 19. 2024

이탈리아 르네상스(2)

레오나르도 다빈치

2007년, <네이처> 11월 호는 지구상에 현 문명이 존재한 이래 인류의 역사를 바꾼 천재 열 명을 선정했다. 

이때 뉴턴(1643~1727), 미켈란젤로, 셰익스피어(1564-1616) 등 위대한 인물들을 모두 제치고 당당히 1위에 선정된 인물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500여 년 만에 환생해서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내가? 믿을 수 없도다!"라며 입을 다물지 못할 것이다.

당시 다빈치는 그를 알아보는 이들에게는 경외의 대상이었지만 지나치게 과학적으로 생각하고 몰두하는 형이라 사회성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워낙 오래 관찰을 하다 보니 작업 속도가 느려 소품 하나를 완성하는 데도 몇 년씩 걸렸다. 

손바닥 만한 <모나리자> 하나 완성하는 데도 수년의 시간을 들였다. 
그러다 보니 당시로서는 68년이라는 그리 짧지 않은 생애를 살았음에도 남긴 작품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적어 회화는 20여 점밖에 안 된다. 

조각은 아예 없다. 


거의 병적일 정도의 관찰력으로 인해 능력이나 지성에 비해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보다 의뢰인들에게 환영을 못 받았다. 

성격도 결벽스러워 시청 관리가 잔돈으로 대금을 지급하자 

"나는 잔돈푼이나 받는 화가가 아니다"라고 거절했다고 한다. 


성격은 좀 모났지만, 뚝심 있게 공기를 잘 맞추던 젊은 미켈란젤로나 귀족적인 면모를 갖추고 사교성이 좋았던 청년 라파엘로가 생전에 승승장구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하지만 3분의 1이 소실되었다는 데도 5,000매가 넘는 그의 자필 연구 노트에는 지금 보아도 놀랄 만한 발명품과 연구가 기록되어 있다.


당대에 그는 미술보다는 공학에 더 심취했던 것 같다.
한마디로 예술에 조예가 깊은, 발명과 실험에 매진했던 공학자라고 할 수 있다.
다빈치가 미술사뿐 아니라 역학이나 해부학 등 과학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이유다.


그런데 인간의 영혼을 뒤흔드는 이런 아름다운 작품에 예술이라는 지위를 붙여준 것은 도대체 언제부터일까?
이렇게 기라성 같은 거장들로 넘쳐나던 르네상스 시절 서서히 장인들의 사회적 지위에 변화가 일어났다.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문물의 교류로 점점 안목이 높아지는 후원자들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그 이상이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 시대의 예술가는 기술자이자 고전과 《성서》에 해박한 교양인, 정신적 부문까지 아우르는 철학자가 되어야 했다. 

이를 통해 명성을 얻은 거장은 여기저기 불려 다녔고 자연히 몸값도 올라갔다. 

비록 길드에 소속된 기술공의 신분에서 출발했지만 '귀한 사람'으로 대접을 받게 된 것이다. 


이제 예술가들은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벽에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하는 무지몽매한 일꾼이 아니라, 

점차 자신의 화풍과 개성을 갖는 그야말로 현대적 의미의 '예술가'라는 지위를 얻게 되었다.


결국 보헤미아 황제 로돌프 2세(1552-1602)는 1595년 4월, 프라하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이제 회화는 장인의 기술로서가 아닌 하나의 예술로 여겨야 한다."
유명 화가들의 지위가 향상되면서, 작품의 독립성도 중요시되기 시작한다. 

예술의 개념이 생긴 것이다.
공동으로 일하던 체제에서 벗어나 각자의 개성이나 자기표현 개념이 강해지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독자적으로 작업해 ‘자기 작품’을 남기려 한다.

이러한 움직임이 예술의 수준 향상과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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