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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롤라 May 03. 2022

내 행복을 방해하는 것들

705호 활동 기록2

내 행복을 방해하는 것들을 이야기하려면 일단 내가 어떨 때 행복한지를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그것이 불가능한 이유를 탐색해 볼 수 있겠다. 나의 행복이라고 말한다면 새로운 삶을 꾸리고자 했던 그 때가 떠오른다. 어떤 조건에도 구애받지 않는다면 나는 어떤 생활양식을 선택하고 싶을까? 일상을 어떠한 형태로 구성하고 싶어 할까. 회사생활을 정리했을 때 시도해보고 싶은 생활이 있었다. 일찍 일어나서 새벽의 공기를 쐬고 팔다리를 움직이며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신선한 하루의 시작을 맞이한 다음 집으로 돌아와 글을 쓰는 삶이었다. 낮 동안은 글을 쓰고 오후 네 시부터는 자유 시간을 보내는 생활. 그런 일상을 살 수 있다면 세상에 부러울 게 없을 것 같았다. 충만한 삶을 누리려면 시간이 드는데 나 같은 경우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기록을 해 두어야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경험하는 일만으로는 조금 부족하다고 느꼈는데, 경험을 되돌아보고 기록해두고 의미를 파악해서 소화하는 일까지가 삶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상 속에서 경험 이후에 내가 원하는 것들을 실행하려면 늘 여분의 시간이 필요했다. 시간은 남기는커녕 모자라기 일쑤였고, 여분의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남는 시간을 쓰는 게 아니라 의지를 가지고 비워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막연히 수도사의 생활처럼 규칙적이고 번민하지 않는 단순한 삶을 꾸릴 수 있다면 그 안에 행복이 있을 것 같았다. 내 안에서 항상 무언가 꺼내어야 할 것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깊이 들여다보고 집중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또 이생에서 내가 만난 행운들, 작은 행복과 기쁨들을 기록해두고 싶었는데, 윤이 나게끔 보석을 닦는 일처럼 이런 기록이 곧 삶을 찬미하는 일로 여겼다. 빠르게 흘러가는 삶, 정신없이 지나버린 일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소화하는 시간이 필요했던 걸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느린 사람인가보다.

예정보다 이른 출산으로 그런 생활을 시도할 기회는 없었고 글을 쓰는 일상은 어떤 이상향으로만 내버려둔 채 세월을 보내왔다. 벌써 큰 아이가 열여섯 살. 자질구레하든 굵직하든 두 아이를 키우는 일로 하루 스케줄이 빼곡한 나날들이었다. 살림과 육아를 완벽하게 한다는 문제가 아니다. 그저 생활을 ‘유지’하는 것만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십오 년 정도를 가족들에게 중점을 두고 헌신한 셈인데, 한정된 시간과 에너지를 기꺼이 가족들의 시간표에 맞추어 일상을 꾸려왔으니 이제 우선순위를 차차 내 쪽으로 가져와도 좋지 않을까. 어떤 분야라도 십년을 채우면 전문가가 된다는데 살림과 육아도 이쯤이면 은퇴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나만의 희망사항은 아닐 텐데, 이미 경험해 오신 살림육아 업계 선배님들은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으시지만 - 독립시키기 전에는 끝이 없다는 말씀 - 그래도 지난 헌신의 시간을 되돌아볼 때면 이제는 조금씩 줄여도 된다는 생각에 상대적으로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부분이 있다. 아이들이 많이 자랐기 때문이다.

취침 시간을 조금 당길 수 있다면 – 이 부분이 가장 어렵다 – 일찍 일어나서 아이들 등교를 시키기 전 새벽 산책이 가능할 여지가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등교를 준비하며 아침을 같이 먹고 아이들을 보내고, 글을 쓰고 점심을 간단히 먹고 마저 쓴다면? (지금 그런 시간대에 이 글을 고쳐 쓰고 있다!) 오후 시간대의 자유 시간은 아직은 요원해 보이긴 하다. 아이들이 학원 가기 전 간식을 주고 저녁 식사 준비를 하고 먹은 것을 치우고 정리한다. 4시부터 8시 정도까지는 가정생활을 유지하는데 반드시 품이 든다. 누가 대신해 주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 일은 다른 모든 집안일과 마찬가지로 미룬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고스란히 남겨져 다른 시간대를 침범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브리짓 슐츠의 <타임 푸어>에 의하면 미국의 주부들에게는 ‘마녀의 시간’이라 지칭하는 시간대가 있는데, 바로 저녁 여섯 시부터 밤 아홉시까지라고 한다. 주부가 가장 바빠지는 시간, 그녀를 방해해서는 안 되는 시간이다. 스트레스가 가중되는 이 시간대에 그녀를 자극한다면 엄마 또는 아내 역할을 수행 중인 그녀가 마녀로 돌변하는 모습을 빠르고 쉽게 접할 수 있다. 아마도 하루 중 결혼하고 가정을 꾸린 것을 후회하는 실감이 드는 주된 시간대가 아닐까 한다. 모성에 대한 부정적인 발언은 사회의 금기에 해당하므로 이 글을 읽으면서 불편한 마음이 드는 사람이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마녀의 시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건 가정생활의 반쪽만을 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는 네 시부터 여덟시까지이다. 이 시간을 할애하지 않으면 내 '가정' 생활을 지탱할 수 없다.

개인으로서 습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어떤 식으로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을까. 철옹성처럼 가두어진 네 시부터 여덟 시까지의 시간대에 틈을 내어 자유를 꿈 꾸어본다면? 한 주에 한 번이나 한 달에 한 번쯤은 주부로서 주도하는 마녀의 시간을 남편이 책임지는 악마의 시간, 하이틴인 딸이 대충 차려보는 좀비의 시간, 십대 초반인 아들이 애써보는 도깨비의 시간으로 정해보자고 제안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가족 구성원이 한 달에 한 번씩만 시도해 준다면 나는 총 세 번의 자유 시간을 맛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자유 시간이 생긴다는 아이디어만으로도 홀가분해지는 걸 보면 이 시간대에 대한 압박감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내 행복을 방해하는 게 시간 부족이라면 기꺼이 도움을 요청해 볼 일이다. 같은 문제가 행복을 방해하는 요소가 아니라 행복에 보탬이 되는 존재로 탈바꿈하게 된다니 역시 역설은 언제나 삶 속에 내재되어 있음을 실감한다.

지난주는 갑작스러운 일정이 계속 생기고 주말까지 여행을 다녀오는 바람에 일상의 리듬이 다 흐트러졌다. 하지만 다음날 예정했던 책뜰에서 만날 705호 모임 준비물을 꾸리고 있자니 그 리듬이 회복되고 연속성을 지님을 느꼈다. 글쓰기가 나에게 안정감을 준다는 사실은 틀림이 없다. 굳어진 사고의 틀에 갇혀서 고통 받을 때 글을 쓰면서 틈새를 찾고 숨을 쉬어나간다. 복잡하게 엉킨 털실타래를 풀어 예쁜 스웨터를 짜고 싶은 마음으로 계속 글을 써야지. 옳은 길을 가고 있는 확신으로 글쓰기 자리가 내 일상의 한 칸에 굳건하게 채워져 있기를 소망한다. 705호를 함께 만든 지 100일이 지났다. 뭐든 습관이 되려면 100일 동안 지속해야 한다고 한다. 일상이 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는 믿음으로 그간 705호가 견고히 자리잡았음을 느끼며 누비이불 속에 채워진 솜이 겉감과 안감에 고르게 누벼지듯 내 생활의 누빔점이 되어줌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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