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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롤라 May 23. 2023

펀칭 레이스 원피스

영화 <미시즈. 해리스 파리에 가다>를 보고

 1957년 런던의 청소부 에이다 해리스는 일하는 집에서 고용주의 옷장에서 디올 드레스를 보고 한눈에 반한다. 디올 드레스 한 벌 가격은 거금 500파운드. 에이다는 청소부 일 외에 옷 수선일을 늘리고 복권까지 도전하며 계획을 세우지만 드레스 값 모으기는 만만치 않다.

 그러다 길가에서 주운 다이아몬드 반지를 찾아주고 사례비를 받는다.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후 행방을 알 수 없던 남편이 돕기라도 하듯 전쟁미망인 연금도 받게 된다. 마침내 현금 582파운드를 들고 파리 여행길에 오른 에이다, 디올 드레스가 무엇이길래 그녀는 전 재산을 바치려 할까. <미시즈. 해리스 파리에 가다>라는 영화를 보고 옛 기억이 떠올랐다.

 2007년, 조리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차 안에서였다. 항상 앉던 조수석이 아니라 뒷자리에 앉으니 어색했다. 나는 연분홍색 포대기에 감싸인 신생아를 안고 있었다. 아기의 볼은 찜기에서 갓 꺼낸 찐빵처럼 무르고 연해 보였다. 따끈한 김이 솔솔 올라와도 이상하지 않을 듯했다. 곤히 잠들어있는 모습은 평화로웠지만 내 마음은 초조하기만 했다. 아직 우는 아기를 달래 진정시켜 본 적도 없었다.

 병원에서든 조리원에서든 지금까지는 도와줄 사람이 있었다. 이제부턴 다 내 몫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버거운 일에 뛰어든 기분이었다. 아기는 두 시간마다 젖을 먹여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은 곧 나도 한 번에 두 시간 이상은 잘 수 없다는 얘기였다. ‘그런 일이 가능할까’라는 질문을 해 볼 여유도 없었다. 아기는 금방이라도 눈을 뜨고 울지도 모른다.

 잠시라도 여유를 느끼고 싶어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트렌치코트 차림의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반 팔 옷을 입고 아이를 낳으러 병원에 갔는데, 어느새 찬 바람이 분다. 거리를 걸어 다니는 이들의 모습이 생경하게 다가왔다. 언제 다시 혼자서 거리를 걷게 될까. 한동안은 아기와 한 세트가 되리라. 이 곱고 귀한 것을 떼어놓고 나가서야 마음이 편치 못할 것 같았다.

 그렇게 육아의 길로 들어섰다. 요령 없이 서툴고 열심인 시절이었다. 하루하루 달콤한 꼭 그만큼 처절했다. 바깥 공기, 밤거리와는 멀어졌다. 긴장을 푸는 술자리, 화려한 네온사인에 취하는 시간도 끝이었다. 재즈와 보사노바가 흐르던 흥겨운 플레이리스트는 클래식과 자장가가 차지했다. 토사물, 배설물을 다루는데 전문이 되었다. 끝나지 않는 마라톤에 기진맥진한 나날이 이어졌다.

 그러길 2년쯤 허덕이던 어느 날 남편이 오아시스 같은 제안을 했다. 여름휴가로 부산을 다녀오자는 말이었다. 세 살배기와 함께 가려니 고생길이 뻔하지만 무려 ‘부산’이 아닌가. ‘해운대’라는 말이 꼭 ‘하와이’처럼 들렸다. 일상에서 벗어나 부산에 가면 뭔가 해방감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일과표 위에 군림하는 아기님을 모시고 간다 해도 말이다.

 승용차로 다섯 시간이 걸리는 여행길은 예상보다 힘들었다. 차에 오래 타는 것 자체가 어린 몸에는 무리였다. 틈틈이 내려야 해서 휴게소마다 들렀다. 숙소에 도착하고 나니 벌써 어둑해졌다. 세 식구 모두 지칠 대로 지쳤다. 꼼짝없이 쉬어야 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아이 먹을 곳이나 놀러 나갈 곳이 여의치 않아 숙소에만 머물렀다. 부산에 와도 실내에만 있는 건 똑같았다.

 안겨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였지만 유모차에 태워보기로 했다. 바깥을 걷고 싶었다. 제주도에는 가 봤지만 부산 여행은 처음이었다. 해운대를 따라 고층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1층에 있는 음식점이나 카페는 바깥에도 테이블을 두었다. 공기까지 자유롭게 술렁이는 듯했다. 여기가 한국인지 파리인지 헷갈렸다.

 야외테이블에 앉아 얼음 든 아메리카노 한 모금 들이켜면 천국이 따로 없을 것 같았다. 그건 그 순간 내가 이 세상에서 바라는 유일한 호사였다. 그때 유모차에 있던 아이가 칭얼대기 시작했다. 아이는 안아 올리라며 버둥거렸다. 불청객 같은 아이 울음소리로 다른 이들이 가진 휴가지의 낭만을 깰 수 없었다. 냉큼 몸을 기울여 유모차에 달린 안전벨트 버클을 풀었다.

 “여보 빨리 커피 좀 사 와 봐, 아이스, 아이스!”

 안겨 있던 아이는 그새를 당연히 못 참고 걷고 싶어 했다. 그럴 수 없었다. “여기 좀 봐라, 예쁜 꽃이 있네, 나비 찾아보자.” 안은 채로 아이 관심을 딴 데로 돌려야 했다. 아이 발을 땅에 내려놓는 순간 어느 테이블로 가서 잔을 엎을지 몰랐다. 그때였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와장창 소리가 났다. “꺅-!”

 두 칸 건너 테이블에서였다. 거기도 아이를 데려온 사람이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몇 분 후 내가 겪을 일이 미리 펼쳐져 있었다. 잔은 엎어지고 테이블과 바닥으로 얼음과 커피가 쏟아졌다. 잔이 투명 플라스틱이라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얼마나 무안할까 싶어 눈길도 주지 않고 카운터로 향했다. 길바닥에 요란하게 넘어진 사람은 보고도 못 본 척하는 것이 매너 아닌가.

 “여보, 테이크아웃으로 해.”

 남편에게 속삭였다. 차마 실현하지 못한 나의 로망을 그렇게 황급히 마무리해야 했다.

 카페를 나서며 아쉬운 마음에 뒤편으로 곁눈질했다. 유행하는 밀짚모자를 쓴 두 여인이 카운터 앞에 서서 주문하고 있었다. 하늘하늘한 차림이 여행지와 퍽 잘 어울렸다. 둘 다 흰색 펀칭 레이스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옷감은 살짝 비침이 있고 움직임에 따라 뚫린 무늬 사이로 언뜻언뜻 속살이 보인다. 테를 두른 레이스가 여성스럽다. 청순하면서도 매혹적이다.

 아이와 함께 다닐 때 입기에 적합한 옷은 아니었다. 아이에게 몸을 숙이거나 안고 있을 때 옷깃이 벌어질 위험도 있다. 린넨 소재가 많아 구겨지기도 쉽다. 흙바닥을 짚은 작은 손이 닿을 수도 있고, 아이가 울거나 침을 흘리거나 토할 때 흰옷은 자국이 남는다.

 그때 다짐했다. 좀 더 여유로워지면, 나도 다시 자유가 생기면 저런 옷을 꼭 사 입으리라. 둘 사이는 친구나 자매로 보였다. 내가 챙길 필요가 없는 사람과 여행을 떠나서 홀가분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한가로움, 편안함, 가벼움, 관능과 휴식, 말이 통하는 상대와의 친밀한 대화. 펀칭 레이스 원피스 안에 그 순간 내가 간절히 원했던 모든 욕구가 오롯이 들어있었다.

 그래서 에이다가 디올 드레스를 원하는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사람이 선택하는 옷차림 속에는 많은 이야기가 들어있다. ‘이건 재봉이 아니라 달빛을 만드는 거군요.’ 에이다의 말에서 그녀가 사치나 낭비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님을 안다. 먼지와 그을림과 오물을 그 누구보다 오랫동안 마주했던 그이기에 한 편의 시 같은 달빛으로 자신을 두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최선의 내가 되어 삶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던 에이다의 마음에 그날의 나를 겹쳐 본다.

 작년에 드디어 하얀 펀칭 블라우스를 샀다. 원피스는 아니지만 그런대로 만족스럽다. 지금 내 옷장에 얌전히 들어있다. 꺼내어 입을 계절이 성큼 다가와 있다. 일주일 후에 친구들과 덥고 밝은 곳으로 여행 가기로 했다. 출발하는 날에 입고 갈 생각이다. 오래 품은 꿈은 이렇게 현실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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