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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남세아 Oct 09. 2024

아버지 댁에 보일러 놔 드려야겠어요


퇴근길에 전화가 울렸다. 전화기 화면에는 아버지라고 찍혀 있었다. 순간 5년 전 아버지께서 암선고를 받았을 때와 재작년 폐수종으로 입원해서 사경을 헤맬 때가 떠올랐다. 그때 이후로는 집에서 전화가 오면 늘 긴장한다. 심호흡을 한번 하고 통화 버튼을 눌러서 끌었다. 화기 너머로 아버지 목소리가 들리자 우선 안심했다. 다음은 어조가 문제인데, 다행히 흥분된 상태는 아니었다. 다만, 시간이 좀 있냐라는 질문이 조금 거슬렸다. 차를 길가에 세우려다가 핸즈프리로 통화를 이어갔다.


"말씀하세요"

"내가 40만 원 밖에 없는데, 보일러가 고장 났다"

"그런데요?" (무슨 말씀이시죠?)

"네 엄마가 전화하지 말라는데, 보일러를 교체해야 해. 한 80만 원 든다는데, 더 싼 거 는지 알아봐라"

"어머니는요?"(어머니하고 상의해서 조치할게요.)

"몰러. 자는 거 같은데, 아무튼 알았지?"

"네"(제가 알아서  테니 걱정 말고 쉬세요.)

전화를 끊자마자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가 뭐라고 하시는 거예요?"

"보일러 고장 나서 새로 사야 하는데 84만 원이라고 하니까 비싸다고 너한테 말하면 중고로 40만 원 정도에 맞출 수 있을 거라고 큰소리치던데"

"보일러를 중고로도 사나? 알아볼게요."

"신경 쓰지 마. 알아서 할게"

"별거 없으시죠? 제가 알아보고 전화드릴게요. 운전 중이라서 끊을게요"




매달 50만 원씩 생활비를 보태드린 지 14년 째다. 게다가 목돈 두세 번과 자잘한 돈 쓸 일이 생길 때마다 매번 드렸는데, 비슷한 상황이 생겼다. 비상금은 다 썼고 아내에게 말해야 하는 상황인데, 불편하기 그지없다. 그렇다고 해서 아내가 불편한 내색을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라서인지 더욱 미안한 마음은 끊이질 않는다.

따지고 보면, 작은 집, 작은 차, 작은 가전제품 거기다 몇 푼 안 되는 적은 용돈이 모여 큰 산을 이뤘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아내는 매번 해드리자고 말했다. 불행 중 다행인모르겠지만 처가도 형편이 좋은 건 아니다. 두 집 격차가 없다 보니 오히려 마찰이 작을지도 모른다. 하튼 아내 덕분에 양가 부모님들께 지금까지 드린 자잘한 것들이 적당하게 효도로 포장되었다.


저녁때 어머니와 한번 더 전화를 주고받았고 퇴근 후 시간 날 때 인터넷으로 간단하게 시장조사를 했다. 보일러는 대략 70~80만 원 정도로 가격이 형성되어 있어서 어머니께 80만을 입금하며 알아본 곳에서 설치하라고 문자를 남겼다. 물론 아내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허락받은 다음에 진행했다.


이번 보일러 건 덕분에 좋은 점도 몇 개 있다. 산업통상자원부에서 일산화탄소 경보기를 의무적으로 설치하게 했다는 사실과 특정조건이 아닌 이상 환경부에서 인증받은 친환경 보일러만 설치토록 한 사실도 알게 되었다. 관사에서만 살다 보니 세상 물정 몰랐는데, 복잡한 세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더구나 보일러 시세도 알았고 늘 부모가 말하면 잘 들어준다는 착한 아들 코스프레도 이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보일러 설치하는 날 아침 다시 아버지가 찍힌 전화가 울렸다. 평소와는 다르게 불안감은 없었다. 부모님께서 고맙다고 말하는 상황은 여전히 불편했고 어색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화를 안 받을 수도 없고 부모에 대한 예절을 지키기 위해 잠긴 눈을 비비 통화 버튼을 눌러 끌었다.

"야! 인마! 넌 내가 한 말을 어찌 듣고 너네 엄마랑 니들끼리 뚝딱대면서 보일러를 맘대로 산 거야!"

잠결에 들은 아버지 불호령에 당황했다. 그러면서도 노쇠하신 아버지께서 대략 삼십 년 만에 혼신을 다해 어조를 높이고 거친 단어를 마구 사용하신 게 신기하며 반갑기까지 했다. 쑥스러움이 많은 분이라서 고맙다는 말을 자기 방식으로 표현했다고 치부하려 했으나 화기 너머로 들리는 아버지 거친 숨소리가 걱정됐다. 이유야 어쨌든 간에 뭔가 꼬인 듯해서 국군의 날 기념 아버지 구령조정을 요령껏 회피하고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덕분에 최근 20년 만에 가장 많이 그리고 길게 부모님과 통화했다.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어차피 보일러는 설치될 것이고 한두 달 지난 뒤 아무 일 없듯이 지나갈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내 입장과 부모님들 각자 입장에서 바라본 상황만 다를 것이다. 그래도 상황을 이해하려고 최근 며칠 상황을 복기해 봤다.


정리해 보니 내 잘못이 크다. 80만 원을 들여 생각 없이 보일러를 구매한 어머니 잘못도 맞다. 아버지께서는 전 재산 40만 원이 있었고 이번달 노인지원금을 받아서 60만 원 정도로 중고 보일러를 설치하고 싶었다. 오래된 집에 새 보일러를 설치하는 게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당신께서 오래 못 살 텐데, 자신이 죽으면 집을 이사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전 재산을 허투루 쓰고 싶지 않았다.


평생 한번 아들에게 용돈을 준 적이 없고 돈을 벌어 가사에 보탠 적도 없는 아버지는 노쇠한 지금 가진 모든 것을 긁어모아서 보일러 하나를 놓고 싶었나 보다. 칠십 평생 일만 하며 모든 생활비를 묵묵하게 번 어머니와 고등학교 때부터 제멋대로 돈을 벌며 대학 등록금과 생활비를 위해 남들은 2년 가는 군대를 20년이 넘도록 다니는 못난 아들놈이 짜고서 자기 자존심을 건드린 게 싫었나 보다. 어머니가 알아본 보일러는 비싸서 내키지 않았고 중고 보일러를 제대로 찾아보지 않은 게 싫었나 보다. 금액에 맞춰서 알아보고 연락만 하면 되는데, 자신을 배제하고 아무것도 물어보지도 않고 멋대로 보일러를 사버린 게 속상했나 보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아버지는 자존심이 많이 상했고 늘 미안하다던 아들에게 소리 높여 자기 존재감을 드러냈다. 어쩌면 당신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줄 수 있는 선물일지도 모르는데, 잘난척하며 제멋대로 사는 못난 아들놈이 넘겨짚고 실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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