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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를주세요 Sep 02. 2022

Catch Me, in the Rye

J. D.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1951)

"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이 어떤 이유를 위해 고귀하게 죽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동일한 상황에서 묵묵히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 앤톨리니 선생님이 인용한 글 중에서, 민음사 번역본 기준, p.248.



성숙해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내면의 열을 다스려 갈무리한다는 것.

마그마가 화강암으로 굳듯이 마음은 단단해져

웬만한 비바람에는 끄떡도 않고

묵묵히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다는 것.



그렇다면 미성숙한 이들은 결단코 그럴 수가 없다.

가슴속에 말의 심장이라도 들어차 있는 것처럼

차분해질 수 없을 만큼 뜨거운 피가 온몸에 돌고 있으니,

제 삶의 열기에 취해 비틀거릴밖에.

이 상황에서 정신을 차리라는 건 어불성설이다.



이들에게는 이 삶이라는 게, 목숨이라는 게

무슨 깃털이라도 되는 것마냥 다 가볍고 하찮다.

독주에 취하면 몸이 하늘로 붕 떠오르는 것만 같듯이.

그래서 그들은 열에 달뜬 채

좌충우돌 머리를 벽에 박고 바닥을 기어 다니는 것이다.

멀쩡히 다니던 학교를 그만 두거나,

어쭙잖게 어른 흉내를 내면서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다니거나,

친구건 여자건 영화건 노래건 그냥 다 하찮고 천박하다고 깔보거나,

그 와중에 정작 자기는 진지한 얘기 한답시고 섹스가 어떻고 저떻고 섹무새질을 하거나,

미자인 거 티 다 나는데 어른인 척 바에 가서 술 시키다가 뺀찌 먹고 콜라와 함께 쪽팔림 한 모금 들이키거나,

돈으로 여자를 사서 총각 딱지를 뗀다는 걸 나중에 능숙한 연애를 위한 예행연습이라며 자위하거나,

두들겨 맞고 나서는 아 배때지에 총 맞은 것 같애 어쩌구 저쩌구

내로남불 자기합리화를 일삼거나,

그래도 가슴속에서 천불이 일듯 넘쳐나는 말을 견디지 못해, 아무나 붙잡고 상대는 관심도 없을 말을 기관총마냥 쏟아내거나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사랑스러운 홀든 콜필드처럼.



이 홀든 콜필드라는 샛기는 도무지 미워할 수가 없다.

우리 모두 한 번씩은 거쳐갈 수밖에 없는 인생의 그 단계,

중2병 찌질이의 화신과 같은 존재이므로

마치 옛날의 나를 보는 것 같아 몸서리가 쳐지곤 한다.

그렇지만 이놈을 미워한다는 것은 곧 과거의 나 자신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라 일종의 동족혐오와도 같은 행위다.

정직한 인간이란, 마치 그런 시간을 겪었던 적 없던 것처럼 시침 뚝 떼고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미움을 살 만큼 얘가 딱히 뭐 크게 나쁜 일을 하는 건 또 아니기도 하고...)


해서 홀든을 보다 보면...하 새끼 으이구 귀엽고 븅신같은 새끼 하다가도, 그럼 넌 뭐 대단하게 다르냐 하면 또 할 말 없게 만드는 참 복잡미묘한 감정을 느끼곤 하는 것이다.

야너두? 야나두!



그렇지만 이 정도에서 마무리된다면 이 책은 그냥 개폼 잡는 중2병 소년의 개소리를 집요하고 정성스레 적은 것임에 불과하겠지. (그리고 나는 읽으면서 신입 환영 회식자리에서 야 너도 신입 때 더했으면서 앞에서 뭔 잘난 척 하고 앉아있냐ㅋㅋㅋ라며 느닷없이 소환된 선배1마냥 대리 수치심을 느낄 것이고...)

그리고 고작 그 정도의 책이었다면 굳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 이 글을 적는 수고를 감내할 이유가 없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어 길 잃은 아이들의 손을 붙잡아주고 싶다던 홀든은

누구는 이래서 맘에 안 드니 누구는 저래서 싫으니 하며 투덜거리지만

정작 잘 읽어보면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소리치고 있다.



사라지고 싶지 않으니

누가 날 좀 구해달라고,

피비든, 샐리든, 제인이든,

죽은 동생 앨리든 누구든 간에

호밀밭에서 흔들리는 나를 붙잡아달라고.



이 얼마나 절박한 구조 신호인가.

닥쳐오는 미래에 대한 불안,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는 앞에서

어린 홀든이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고는

짐짓 세상 모든 것에 달관한 듯한 태도로 위악을 부리는 것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두려움에 정면으로 맞서기엔 홀든은 너무 어리고 유약했으므로.

하지만 속으로는 누군가에게 기대고 의지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펜서 선생을 찾아가고, 한밤중에 앤톨리니 선생님을 찾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실망한 채 다시 위악이라는 가면을 만지작거리며 돌아왔을 것이다.



이 책 내내 홀든은 반항기 넘치는 불량아(를 흉내내고 싶어 하는 아이)로서

일탈과 방황을 거듭하며 모든 규범과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 하지만,

정작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지는 않는다.

그리고 바로 그게 홀든의 진정한 매력이다.

마음껏 위태롭게 흔들려가며 자신의 삶의 방향을 찾아가는 것.

미성숙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황홀한 고통이다.



어쩌면 홀든이 '호밀밭을 걸어오는 누군가를 만난다면'을

'호밀밭을 지나가는 누군가를 붙잡는다면'으로 읽은 것은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 자신을 붙잡아주기를 원했던 것은 아닐까.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들으니까.



- 2022.09.02

#금요묵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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