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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준수 Oct 07. 2023

돋보인 공포감 빌드 업

영화 읽기: 잠

몽유병은 영화보다 다큐멘터리 소재로 적합하다고 인식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심어놓은 선입견이었다. 그런 이유일까? 유재선 감독은 영화 ‘잠’을 영화적 방식이 아닌, 연극처럼 세 개의 장으로 구성했다. 마치 정신과에서 행하는 연극치료(Drama Therapy)를 연상시켰다. 연극의 장이 바뀌면 극의 흐름이 달라지듯, 이 영화도 미묘한 변화를 보였다. 무엇보다 영화를 세 장으로 구성한 효과는 이야기의 빠른 전개였다. 장 마다 에피소드를 갖는 구조가 되도록 이야기가 간결해졌다. 중요도 낮은 요소에 대한 논리적 설명을 과감히 삭제했고, 관객이 상상력으로 채우도록 여지를 두었다.



잠은 필수적인 생리 활동이며 불가피한 생존 욕구다. 욕구를 충족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긴다. 주변에 잠을 제대로 못 자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남녀노소가 스트레스, 질환, 긴장, 음주, 약의 내성 등 다양한 원인으로 잠 못 들고 있다. 수면 장애나 수면 부족을 겪으면 일상생활이 힘들어진다. 따라서 첫 번째 피해자는 본인이다. 잠이란 누구나 매일 경험하는 일이다.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을 때는 대부분 그 상태를 개선하려고 노력한다.

영화의 1장에서 주인공은 수면문제의 당사자인 현수(이선균 분)였다. 몽유병의 피해자로서 일상을 유지하지 못하는 순간이 늘어났다. 본인의 문제를 인지하고 증상을 개선하고자 병원에 다녔다. 병원 치료를 받으며, 의사의 지침대로 생활했다. 그렇지만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상횡이 이쯤 되면, 몽유병은 본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수면장애의 다음 피해자는 배우자였다.

의도하지 않았어도 첫 번째 피해자인 현수는 동시에 아내에게 가해자가 되었다. 사랑하기에 절대 피해를 주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가해자가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빚어진다. 그래서 영화는 이 지점에서 2장을 시작했다. 이야기의 흐름이 바뀐 것이다. 장의 변화는 미묘하게 두 주인공 간의 무게 중심을 바꾸어 놓았다. 주인공은 아내인 수진(정유미 분)이 되었다. 남편의 몽유병을 걱정하느라 아내는 잠을 못 잤다. 잠 못 드는 나날이 쌓이면 몽유병에 못지않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아내도 다른 유형의 환자가 되어갔다. 자연스럽게 잠이란 주제도 진화하듯 변해갔다. 마치 잠을 못 자면 미치듯, 남편의 몽유병은 잠의 문제를 넘어 미친 증상의 영역이 되었다. 이 시점부터 아내는 과학적 접근 대신 주술적 접근을 시작했다.

아내가 돌변한 이유는 확실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부부의 난관을 부부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가훈의 실천이었다. 내재된 이유는 스스로 생존하려는 노력이었다. 갓 출산한 딸을 지켜야 하는 엄마의 입장에서 딸의 생존은 숙명이었다. 아내가 선택한 주술적 수단도 이러한 목적성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평범한 일상 안에 내재한 위험을 확인하고 마주하는 상황은 공포였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수면 상태의 남편을 사랑하며 보호하고, 동시에 스스로를 지키는 처지의 심적 부담은 공포의 수준을 능가했다.

잠을 자면서 움직이는 남편의 행동은 통제할 수 없었다. 멈추지 않는 자동차가 공포의 대상이 되듯, 영화에서 현수가 그랬다. 무엇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사이에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수진에게 집은 더 이상 보금자리가 아니었다. 집을 공포의 공간으로 만들었던 대표적인 영화로 ‘숨바꼭질’을 꼽을 수 있다. 안심할 수 없는 집이 얼마나 무서운 곳이 될 수 있는지 제대로 보여준 작품이었다. 영화 ‘잠’은 가족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공간이 그 어느 장소보다 불안하고 위험하고 공포스러운 장소가 될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갖게 만들었다.


이 영화를 통해 유재선 감독이 뛰어난 재능을 지닌 신예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장편 영화를 연출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공포감을 쌓아가는 연출력이 탁월했다. 장이 바뀌면서 관객이 느끼는 공포의 강도와 크기가 커졌다. 그를 봉준호 키드로 지칭하는 평론가도 있다. 그는 봉감독의 ‘옥자’ 제작에 참여하면서 거장과 함께 작업하는 기회를 가졌다고 했다. 영화 속의 디테일한 고민의 흔적들은 봉감독에게 배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내가 사랑하는 남편을 기절시키는 장면에는 어떤 도구가 적합할까? 단단하지 않으면서 충격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너무 위험하지 않지만 효과가 있어야 한다. 그 상황에서 쉽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몇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는 도구를 선택해서 사용했다. 적합한 도구는 영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디테일의 노력이 영화 곳곳에 흔적처럼 담겨있었다. 끝으로 관객에게 결말에 대한 판단의 기회를 빼앗지 말라는 봉감독의 지침까지 놓치지 않았다. 결말을 제시하되 감독의 의도를 명확히 드러내지 않았다. 결말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으면, 영화는 풍부한 논의를 재생산하는 법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인 수면 장애가 배우자의 공포와 가정의 위험으로 확대되는 이야기는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스릴러 장르에서 한국 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미 유럽인들이 한국의 스릴러에 신선한 충격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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