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월트 휘트만이 1856년 에 발표한 「열린 길의 노래」 시작부분 4 연만 읽어봅니다. 시는 자유시(free verse) 즉 전통시에서 요구했던 라임, 리듬, 미터를 무시한 (그렇다고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시로 사람의 자연스러운 스피치를 연상시킵니다. 시어는 일상적인 단어들이며 한 두 단어 정도를 제외하고는 굳이 부연 설명이 필요가 없을 정도로 평이합니다. 그러나 그 자연스럽고 평범한 단어 뒤에 숨어 있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이 시를 읽을 때 염두에 둘 사항입니다.
나는 두발로 가벼운 마음으로 열린 길로 나간다
건강하고 자유로운 내 앞에 세계가 있다
내 앞에 놓인 긴 갈색 길은 나를 내가 원하는 곳으로 이끈다.
Afoot and light-hearted I take to the open road,
Healthy, free, the world before me,
The long brown path before me leading wherever I choose.
그러므로 나는 행운을 빌지 않는다. 내 자체가 행운이니
그러므로 난 더 이상 투덜대지도, 지체도 없으며, 필요한 것도 없다.
실내의 불평, 책, 그리고 짜증 가득한 비판들은 이제 안녕.
강하고 만족한 나는 열린 길로 여행한다
Henceforth I ask not good-fortune, I myself am good-fortune,
Henceforth I whimper no more, postpone no more, need nothing,
Done with indoor complaints, libraries, querulous criticisms,
Strong and content I travel the open road.
지구, 그거면 충분하지
나는 어떤 별자리들도 더 이상 가까이 있기를 바라지 않으며
그들은 그들이 있는 곳에서 빛을 발하니
그들은 그들만을 위해 족한 존재들임을 잘 안다.
The earth, that is sufficient,
I do not want the constellations any nearer,
I know they are very well where they are,
I know they suffice for those who belong to them.
아직까지 나의 오래된 달콤한 짐을 지고 있는 나.
나는 남자와 여자들을 어디를 가던 그들을 안고 간다
맹세컨대 그들에게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한 일.
내 마음은 그들로 가득 차 있고 그리고 그 대가로 나는 그들의 마음을 채울 것이다.
(Still here I carry my old delicious burdens,
I carry them, men and women, I carry them with me wherever I go,
I swear it is impossible for me to get rid of them,
I am fill’d with them, and I will fill them in return.)
이 시는 “그들”로부터 해방된 “나”에 대한 노래이지만 나는 결코 그들로부터 벗어 날 수 없음을 천명합니다. 시의 시작은 자유로운 나,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나를 노래합니다. 그리고 덧붙입니다. 나에게 행운이 있다면 그건 "나 자신" 자체라고. 두 번째 연을 채운 단어들-- “투덜” “지체” “불평” “짜증” “비판”--은 그들과 있었을때 내모습. 이제 그 스트레스도 안녕입니다. 세 번째 연. 나는 걸을 수 있는 “지구”만 있으면 만사 OK. “별자리”도 지금 있는 자리에만 있으면 된다고 말합니다. “지구”와 “별자리”는 약간의 부연 설명이 필요합니다. 표면적으로 지구는 땅을 그리고 밤하늘에 떠있는 별자리들은 여행자의 길잡이를 의미합니다. 지구와 별자리는 은유적인 표현이기도 합니다. 지구 즉 땅은 평민 계층이며 하늘은 귀족 계층입니다. 특히 특정 별들이 모여 있는 별자리는 하늘같이 높고 별처럼 반짝이는 고귀한 분들의 모임을 의미합니다.
요즈음 우리나라 미디어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로 설명하면 “상류층 카르텔”입니다. 전두환 시대의 군대 카르텔 하나회, 체육회에 존재하는 하는 고대, 용인대, 한체대 카르텔, 사교육 카르텔, 기업 카르텔, 교육부나 보건 복지부 카르텔 등 수없이 많은 카르텔이 우리 주위에 존재합니다. 이런 카르텔을 타파하자는 대한민국 대통령. 그러나 그의 권력기반도 검찰을 비롯한 법조계 카르텔입니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뉴라이트도 사실상 카르텔아닌가요? 1850년 대 미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카르텔이란 단어는 없었지만 서로 끌어주고 땅겨주고 눈감아주고 빼주고 하며 지내는 상류층 그룹이 존재했습니다. 시인은 그들을 밤하늘에 모여 서로의 힘으로 서로를 밝게 빛나게 해주는 별자리에 비유합니다. 저 아래 보통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저 높은 곳에서 위세를 부리는 그들은 그들만을 위한 족속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 별자리들과 가까이 지내는 걸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그들이 있는 곳에서 빛을 발하니
그들은 그들만을 위해 족한 존재들임을 잘 안다.
아픈 국민들을 “개돼지”로 부르며 고생을 해봐야 의사 고마운 줄 안다고 말하는 일부의 우리나라 의사들. 그러나 “부탁한 환자 수술 중”이란 문자를 받는 높으신 한 국회의원. 모두 2024년 대한민국의 밤하늘에 높이 떠있는 “별자리” 멤버들입니다.
그들로부터 영원히 벗어나 이제 자유로운 길을 가고자 길을 나선 시인. 그러나 우리의 삶은 그리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몸은 있던 곳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우리의 마음은 “그들”에게서 결코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와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결코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네 번째 연을 마무리합니다.
맹세컨대 그들에게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한 일.
내 마음은 그들로 가득 차 있고 그리고 그 대가로 나는 그들의 마음을 채울 것이다.
시인에게 “그들”은 “달콤한 짐”입니다.
에밀리 디킨슨과 함께 19세기 미국 시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월트 휘트만은 1819년 가난한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나 가족의 생계를 돕기 위해 11살에 정규 학교를 중퇴하고 법률사무소에서 심부름 일부터 하기 시작한 종이수저(paper spoon)입니다. 그는 미국이 노예제도와 남북의 분리문제로 둘로 쪼개져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기인 1840년부터 1859년까지 미국의 정치판에서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대개 없는 사람들이 그러하듯 민주당 성향으로 보통사람들을 경멸하고 대중의 지능과 진정성을 의심하는 보수당 (그 당시 휘그당)의 집권을 막기 위해 신문에 글을 쓰며 열정적으로 투쟁하였습니다. 그러나 20년간 늘 실패한 후보들만 지지했던 휘트만. 그는 마침내 정치계를 떠나 시인의 길을 가기로 결심합니다. 상기한 시는 정치계를 떠나기 3년 전에 쓴 시로 그가 이루지 못한 정치적인 이상—더 많은 개인의 자유(more freedom and more liberty)—에 대한 노래입니다. 이 시에서 거의 매 라인마다 “I” 그리고 “me” 와 “myself”가 등장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시는 “나”의 완벽한 자유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나”를 옭아맸던 “그들”로부터 분명히 벗어났는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