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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엠티의 추억: 누구세요?

by 유꼭또

26 년 전 이맘 때 겪은 일입니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아주 곤혹스러운 경험이었습니다. 제 일생일대 그야말로 역대급 해프닝이었죠. 그날을 함께 했던 영어과 동료들 사이에서 나를 제 자신이 놀림거리로 만든 그 사건.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그 사건. 다시 꺼내기도 창피해지는 제 인생의 가장 부끄러운 에피소드. 이제 그 일도 그리워지니 세월이 많이 흘렀네요.

1999년 봄학기가 시작되는 3월이었습니다. 저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지 거의 10년 만에 돌아와 지방의 한 대학에 조교수로 임용이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40 세를 훌쩍 넘긴 나이에 아무런 연줄없이 대학에서 자리를 잡는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원학교가 불교 재단이면 불자, 천주교 재단이면 가톨릭 신도, 개신교 재단이면 개신교 신자가 될 각오로 경기, 충청, 부산, 경북 등 종교 불문, 지역불문 전국을 돌아다니며 대학마다 개성 넘치는 별의 별 면접을 다 경험한지 2년. 그야말로 천신만고 끝에 얻은 자리였습니다.

대학을 졸업한지 16년 만에 다시 돌아온 3 월의 캠퍼스. 저도 대학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신입생들처럼 설레는 마음과 기대,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대학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다가 모든 걸 정리하고 한 학기 학비와 6개월치 생활비만을 들고 그때 막 결혼한 아내와 1987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일(주로 가사 도우미와 청소)과 공부를 병행하며 그 힘든 시간을 버텨 낸 것도 결국 이 순간을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더 이상 이곳저곳 돌아다닐 필요 없이 한군데에서 학생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마냥 행복했던 3월. 그러나 그 때 그 운명의 사건도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새 학기가 시작되니 신입생 엠티 소식이 들려왔고 교수들 참석은 필수라고 했습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는 맘 맞는 친구들끼리 각자 요리 재료 준비하고 간식, 버너, 카메라, 돗자리, 통기타 준비해서 경춘선타고 가평으로 일박이일 놀러 간적은 있지만 그걸 엠티라고 부르진 않았습니다. 이제 세월이 흘러 많이 바뀐 대학문화 중 하나가 엠티였습니다. 일단 과 학생 수만 삼백명 가량의 규모(지금은 인구 감소로 영어과가 아예 없어졌지만)이다 보니 관광버스 대절, 학생을 수용할 리조트 급 숙박시설 예약, 그리고 엠티 행사를 도와줄 기획사 (전문 엠씨, 음향장비 등 제공) 섭외 등 모든 일이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출발하는 날이 되어 저는 같이 임용된 신임 및 선배교수들과 함께 배정된 버스를 타고 충청도 지역의 한 리조트에 도착 했습니다. 이인 일실로 방 배정을 받았는데 방 키는 나의 임용동기인 임 교수가 맡았습니다. 서열을 따지는 한국 정서상 나 보다 어린 친구가 보관을 자처한 겁니다.

저녁 때가 되니 학생회 임원들이 우리가 있는 방을 방문하여 몇 시 몇 호실에 교수님들을 위한 조촐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는 공지를 하였습니다. 시간이 되어 학과 교수님들과 함께 출발했고 우린 빌딩과 빌딩사이를 연결한 통로를 따라 꽤 걸은 후에 학생들 숙소 동에 위치한 그 방에 도착했습니다. 약속된 시간에 방으로 들어가니 여러 개로 이어 붙인 탁자 위에 하얀 종이 테이블보가 깔려 있었고 그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매운탕을 중심으로 생선회, 낙지, 해삼, 멍게, 마른 오징어, 땅콩 등 각종 부속 안주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습니다. 물론 소주, 맥주도 있었는데 약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기독교 학교인데다 그 방에는 목사님도 계셨고 (임용조건에 따라 기독교 신자가 되기로 했습니다.) 저는 술도 약했고. . . 머뭇거리고 있는데 학생회 임원들은 반가운 얼굴로 웃으며 교수들의 팔을 잡고 한 명씩 자리에 앉도록 안내를 하였습니다. “한두 잔 만해도 얼굴이 빨개지는데...” 내심 걱정을 하며 나름대로 방어 전략을 세웠습니다. “무조건 세 잔만 마신다.” “그 후 단호하게 거절한다.” “눈치껏 있다가 빠져 나온다” 같은 거였습니다. 마이크 타이슨의 명언이 생각납니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이 있다. 링 위에서 쳐 맞기 전까진.” 딱 저한테 해당되는 말이었습니다.

난생 처음 갖는 학생들과의 술자리. 20세 초반의 학생들이 얼마나 이쁩니까? 아이들이 또 얼마나 공손하고 상냥한지. 사실 전 술도 먹기 전에 이미 무장해제 상태였습니다. 학생들이 두 손으로 소주를 따르며 교수님들께 인사를 하는데 어찌 예의가 바른지. 아무리 보아도 세 잔으로는 해결이 될 것 같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아니야 거기까지만 다짐 하며 한 잔을 받아 들이켰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날따라 내 몸과 술이 서로 헤어져있다 오랜 만에 만난 친구 같았습니다. 게다가 학생들이 잔을 권할 때마다 “교수님” “교수님” 하는데 물론 교수님 소리를 듣기 위해 그 긴 시간 공부한 건 아니지만 그날 저녁 “교수님” 소리가 내 귀에 어찌 그리 단지 “내 귀에 캔디”였습니다. 무장해제 된 상태에서 최면까지 걸렸으니 결과는 뻔 했습니다.

얼마나 마셨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이 희미해지기 시작했고 방 안에 같이 왔던 교수님들이 아직도 있는지 어쩐지 조차도 모를 정도가 되자 갑자기 졸음이 엄습했습니다. 저는 술을 많이 마시면 조용히 잠자는 타입입니다. 그러나 학생들이 있는 그 자리에서 잘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그 방을 나가야 했습니다. 같이 왔던 교수님들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습니다. 아무데나 쓰러지면 잠에 빠질 것 같은 상태였으니 무조건 나가서 내 방으로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내게 방 키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차 임교수! 지금처럼 스마트 폰이 있었던 시절도 아니었고. 임교수가 어디에 있는지, 내 방 호수도 모르는 상태에서 점점 더 무거워지는 눈꺼풀과 싸우며 복도를 따라 걷는데 정말 난감했습니다. 학생들이 왔다 갔다 했고 혹시 알아 볼까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그러다가 한 층을 내려갔고 돌아서자 방이 하나 있었습니다. 혹시 문이 열려있는 빈방이면 여기서 자야지 하는 생각으로 문을 열었는데 그 방안에는 여학생들이 이리저리 섞여서 자고 있었습니다. 얼른 문을 닫았습니다. “신입생 엠티 때 여학생 방에 잠을 잔 정신 나간 신임교수!” 아휴. 생각만 해도 끔찍했습니다. 10년 공부, 귀국 후 보따리 장사 2년, 개고생 끝에 자리 잡은 학교에서 시작하자마자 쫓겨나는 코스입니다. 그때 마침 여학생 누구 한명이라도 깨서 나를 보고 소리라도 질렀다면? 난 해명해야 하고, 강의 배제되고, 변호사 선임에, 다행히 해명이 통한다 해도 변태교수로 찍힐 것이고. 무조건 학생들 숙소에서 최대한 멀어져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복도를 걷는데 도무지 어디가 어디인지 감이 오지를 않는 겁니다. 건물과 건물을 연결해주는 그 통로만 찾으면 되는데 눈은 자꾸 감기고 정신마저 오락가락했습니다. 그래서 포기하고 이제 다시 아무 방이나 열리면 들어가서 무조건 자리라 맘먹었습니다. 그 당시 꽤나 추웠던 봄 날씨에 복도에서 자다가 얼어 죽기라도 한다면 같이 10년을 미국에서 고생한 아내는 또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래서 방마다 방문 손잡이를 돌려보기로 맘먹었습니다. 혹시 실수로 열어 놓은 빈 방이 또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돌려보며 지나 가다가 드디어 방 하나가 철컥하고 열렸습니다. 아이고, 살았다!

살며시 들어가는데 어두 컴컴한 입구에 어지럽게 뒤섞여 있는 신발들이 제 발에 걸렸습니다. 이 방에도 여러 사람들이 자고 있나 생각하며 신발을 벗은 후 뒤꿈치를 들고 불꺼진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들어가 보니 여러 사람들이 뒤섞여 자고 있었는데 가까이 보니 대부분 4-50 대 정도로 보이는 여성들이었습니다. 아이고 맙소사! 그러나 이젠 방을 다시 나갈 기력도 의지도 상실했고 내일 일은 내일 맡겨야 했습니다. 그래도 최소한 여학생보다는 낫지 않나 생각하며 살펴보다가 벽 가까이에서 자고 있던 한 여성분 옆에 누울 수 있는 자리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냥 쓰러졌습니다. 죽음보다 깊은 잠이 있다면 바로 그날 제가 경험한 바로 그 잠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눈이 부시기 시작했고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때 막 깨는 순간 공교롭게도 내 옆에서 자고 있는 그 여성분도 막 잠에서 깼습니다. 말하자면 둘이 동시에 깬 거죠. 나도 놀랐지만 그분도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저를 보더니 “어머 어머 누 누 누구세요?”

그때 제 동료들은 저를 찾는다고 잠도 안자고 밤새도록 리조트를 뒤지고 다녔다고 하네요. 해마다 3월이 되면 생각나는 엠티의 추억. 벌써 26년 전의 일입니다.


그리고 교수님들이 생각하는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음을 다시 한 번 밝히며 1999년부터 함께 한 사랑하는 교수님들께 이 부끄러운 에피소드를 바칩니다. 지금은 대부분 은퇴를 하신 영어과 교수님들 언제나 제 마음 속에 함께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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