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모습 내 모습 #자연의 순환 #삶의 반복
아주 오랜만에 딸아이하고 목욕탕을 갔다.
사우나도 찜질방도 아닌 그냥 동네 목욕탕. 오래전부터 낡은 시설 그대로
오래된 건물 지하에 자리한 작은 목욕탕.
워낙 뜨거운 것을 싫어하고, 낯선 사람과 같이 물에 잠겨 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탓에
목욕탕과는 거리가 있었던 나.
또 코로나 시절이어서 몇 년 동안은 목욕탕을 출입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따듯한 물에 몸을 담그고 싶은 생각이 났다.
봄을 맞을 무렵이면 느껴지는 으스스한 냉기 때문이기도 했고,
모처럼 집에 있는 딸아이하고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불쑥 올라온 탓이기도 했다.
목욕탕이라야 딸아이들 어렸을 때 그저 편히 씻길 겸, 놀이 겸 다녔던 것이 전부인데
느닷없이 그 푸근한 느낌이 되살아난다.
딸아이도 좋아라 하며 따라나서서 둘이 팔짱을 끼고 목욕탕을 향했다.
생각보다 많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딸아이와 서로 등을 밀어주고 마주 보고 물도 끼얹고 웃으며
목욕을 마치고 나오다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졌다.
목욕탕 큰 거울에 느닷없이 친정엄마가 서계신 게 아닌가.
순간 너무도 놀라 가슴이 뛰었다.
돌아가신 지 벌써 여러 해인 그 엄마가 거울 속에 서계시다니!
연세 드셨지만 거동이 자유로우셨던 어느 날인가 엄마와 같이 목욕을 왔을 때의 그 모습인데!
아, 그 거울 속의 엄마는 바로 나였다.
어쩜 그렇게 똑같을까... 배만 볼록하고 가는 팔다리, 구부정한 어깨며 주름진 피부까지.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엄마의 모습이 그 거울 속에 그대로 있었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가슴에 안개처럼 피어오른다.
그렇구나. 이렇게 대를 물려가며 젊었던 딸이 늙어서 엄마의 모습이 되고
그 딸의 딸은 젊은 시절 내 모습을 똑같이 닮아 예쁘고.
세월이 가면 그 예쁜 딸이 또 늙어서 지금의 쭈굴쭈굴한 내 모습이 되겠지.
그렇게 사람도 흘러 흘러가는구나. 엄마는 늙어서 먼 길 떠나가고 그 자리를 젊었던 내가 채우고,
젊었던 내 자리는 어렸던 딸이 또 채우고.
그렇게 우리도 자연의 섭리를 따라 순환하고 있구나...
새삼 가슴이 찡하며 눈물이 난다.
젊은 시절 엄마는 시시때때로 아들은 빼놓고 딸 둘을 데리고 목욕탕을 가셨다.
추운 날씨에는 집에서 목욕을 하기 쉽지 않은 시절이라 목욕탕을 가는 것이 고정 행사였다.
젊은 엄마는 딸들이 목욕 가기 싫다고 몸을 뒤틀어도 억지로 데리고 가
빨간 이태리타월로 살이 벌겋게 되도록 우리의 팔다리, 등을 밀어대셨었다.
아프다고 몸을 빼면 팔을 잡아 다녀 더 가까이 끌어 앉히고 벅벅 문지르셨다.
그렇게 엄마는 나와 동생이 중학생이 될 때까지 우리를 씻기셨었다.
한 꺼풀 벗겨져 발그레해진 어린 딸들을 요구르트였던가, 달콤한 음료수 하나씩 사 먹이시고
홀가분한 듯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말리시던 엄마.
그때는 젊고 탱탱한 몸의 엄마였었다.
어린 내 눈에는 나이 많은 아줌마의 모습이었지만 지금 내 나이로 보면 젊디 젊은 아이 엄마였었다.
그 젊었던 엄마의 나이를 한참 지나 할머니 소리를 듣는 나이가 되었으니 내 신체의 변화도 당연한 것이겠지.
잊고 있었던 엄마의 기억들이 조용히 솟아난다.
나는 오래전 그 기억들을 가슴 시리게 마주하며 잠시 앉아서 숨을 고른다.
목욕탕 거울 속에서 마주한 엄마의 모습.
그것은 내 모습이고 또한 먼 훗날 내 딸의 모습이리라.
그렇게 돌아가신 엄마의 모습은 내 모습으로 남아 있고, 나 또한 내 딸의 모습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엄마의 모습이 내 안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처럼
나 또한 엄마가 살아온 길을 똑같이 가고 있음을 느낀다.
오랜만에 딸과 함께한 목욕탕 거울 속에서 나는 자연의 순환을, 돌고 도는 삶의 수레바퀴를 보았다.
그리고 그 순환은 끝없이 되풀이됨을 또한 깨달았다.
목욕탕 거울은 요술 거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