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키를 찾아서
**셀키(Selkie): 인간과 바다표범의 모습을 오가는 스코틀랜드의 전설 속 생명체로, 하지절 전야에 털가죽을 벗어 던지고 자유로이 춤을 춘다고 한다. 이때 남자가 털가죽을 훔치면 셀키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아내가 되며, 가죽을 돌려받기 전까지 고향인 바다로 돌아갈 수 없다.
위치: 북위 51°, 북해 남단 진입
날씨: 흐림
바람: WSW, 7~10노트
정오를 기해 망할 '보물섬'으로 항해 개시. 이게 다 좆같은 여왕 폐하 덕분이다. 말이 좋아 해적이지, 아버지 때부터 자기들 필요할 때는 외국 놈들 배를 쳐부수라느니 설탕이나 담배를 가져오라느니 개처럼 부려놓고 이제 와서 교수형으로 협박질이라니. 아버지를 봐서 이 정도로 끝내는 거라는 혓바닥을 후려갈기고 싶은걸 수갑 때문에 겨우 참았다. 셀키 가죽을 가져오라고? 애초에 셀키라는 게 실존하긴 하는지? 그걸 고아 먹으면 죽은 사람도 벌떡 일어난다느니, 순종적인 처녀를 아내로 맞게 된다느니 하는 헛소리를 왕실에서도 믿을 줄이야. 왕자한테 들어오는 혼사가 왜 없는지는 동네 거지한테 물어봐도 알 텐데. 열 살 때까지 여왕 젖을 못 뗐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엄마가 망쳐놓은 그 성질머리는 셀키가 아니라 셀키 할아버지 가죽을 먹여도 가망이 없을 듯.
선원 총 20명. 인원이 적으니 배가 크게 느껴진다. 거들먹거리는 해군 새끼들이 그중 여섯이라니 믿기지가 않는다. 언제부터 영광스러운 해적선에 반짝이 제복들을 태웠냔 말이야? 그 섬에 들어갔다 돌아온 배가 한 척도 없는 걸 알면서도 왕립 해병대원들을 붙여준 건 감시 용도인지 미안한 마음에 저승길 동무라도 만들어주는 건지 모르겠다. 항해사는 롭 아저씨로, 조타수는 이안으로 지켜내서 그나마 다행.
아버지가 손수 그린 깃발을 내리고 왕실기를 걸려니 면목이 없다. 여왕 앞에서 길길이 날뛰며 차라리 목을 치라며 배짱을 부리셨을 게 눈에 선하다.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바로 은퇴했어야 하는데. 배운 게 이 짓거리뿐이어서 바다에서 버티고 버텼더니 결국 이 꼬라지다. 이번 항해만 끝나면 정말 접어야지. 여왕이 양심이라는 게 있다면 유령 섬에서 살아 돌아온 영웅을 빈손으로 돌려보내진 않을 것이다. 항구에 작은 선술집이라도 열어볼까?
9시경 황금과 오렌지 색깔로 해가 진다. 일몰은 갈수록 늦어지겠지. 하지가 가까워온다.
위치: 북위 53°, 노섬브리아 연안
날씨: 흐림, 가랑비 약간
바람: NNW, 12~15노트
이 새끼들이 날 좆밥으로 보는 게 틀림없다. 선원 루크랑 요리사 조엘이 서로 칼을 들었다. 이유는 고기 조리 순서. 안 그래도 여자 선장은 처음 본 멍청한 해군 놈들이 내가 명령할 때마다 멈칫하고 눈깔 굴리는 게 맘에 안 들었는데, 그 앞에서 쪽팔리게 싸움질을? 갑판에 데려다 놓고 어디 한번 죽을 때까지 싸워보라고 했다. 자칭 해적이라면, 칼을 뽑았으면 피를 봐야지.
그럴 의도는 없었던 것 같은데 루크가 조엘 허벅지 안쪽을 잘못 찔렀다. 찌른 놈 얼굴이 찔린 놈보다 더 새하얗게 질렸던데. 아무튼 이제 요리사가 없으니 육포나 씹고 살아야지, 뭐. 제복 입은 놈팽이들 중 멀대가 이제 선장님이 주방 담당이냐며 휘파람을 불길래 본보기를 보일 겸 조엘과 같이 묶어 바다에 던졌다.
아버지 코트가 오늘따라 나한테 우스꽝스럽게 크게 느껴진다. 그분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금장 테두리가 다 해진 게 눈에 들어온다. 돌아가면 수선해야겠다. 단추 하나하나가 무겁다.
위치: 북위 55.5°, 달리스톤~노위치 성 앞바다 중간 해역
날씨: 흐림, 짙은 해무.
바람: N, 10노트
선내 반란 제압. 해병대원 위주. 우리 쪽 인원 중 잭과 로버트도 합세. 새벽에 기습. 베개 아래 총으로 반격.
해군 4명, 잭 포함 전투 중 8명 사망. 중상 입은 로버트와 해군 1명은 이후 바다로. 마지막 말은 "잡년."
남은 인원 8명. 부상자 다수. 상처 소독에 럼주 두 병 빼고 모두 사용. 롭 아저씨 자기는 팔 말고 입에 부어달라고 요청.
해무가 유독 강함. 바다에 갇혀버린 기분.
위치: 북위 58°, 섬 남동 연안 접근
날씨: 흐림, 해무 약간, 찬 바람
바람: NW, 8노트
보물섬이 보인다. 안개 사이로 돌출된 검은 절벽. 지도에는 없고 전설에는 나오는 목적지. 양피지에 대강 그은 X에 비해 작은 크기다.
이곳에 뭐가 있기에 죽음의 섬이 되었을까. 혹시 풍랑이 심해 배들이 뒤집히는 건지 추론해 봤지만, 파고는 이 근방에 비해 오히려 잔잔한 편. 이안이 밤에 기도를 올리는 걸 엿들었다. 바다 여신이시여, 이 섬에 제 발로 들어가는 미친놈들에게 축복을 주소서.
위치: 북위 58°, 섬 남쪽 해안
날씨: 흐림, 이슬비 약간.
섬 도착. 파도가 덜 거친 좁은 만에 정박. 오는 길에 버려진 선박 여러 척 발견. 해적선, 이국의 함선, 오래된 왕립 해군 군함, 알아볼 수 없는 깃발을 단 배들.
정오 한 시간 전 하선 후 탐험 시작. 짠 내와 축축한 이끼 냄새. 해안은 험준한 편. 솟아오른 암석 절벽 사이 동굴과 아치, 바위기둥이 빼곡. 섬 안쪽은 돌과 낮은 풀로 뒤덮인 완만한 구릉지. 중심으로 향할수록 질척한 늪지대에 발이 빠져 불평불만. 더 들어가지 않고 연안에 머무르기로. 어쨌든 셀키가 있다면 해변 근처에 나타나겠지.
위험 요소 탐색을 위해 조를 나눠 하루 종일 돌아다녔지만 수확 없음. 바닷새들 제외 동물 꼬랑지도 보지 못함. 막내 톰이 저 많은 배들이 여기서 최후를 맞은 이유가 분명히 있을 거라고 징징댐. 일리가 있어 교대로 취침하기로.
저녁엔 자욱한 안개가 심해지는 듯. 해는 이제 열 시 넘어 진다. 회색 하늘 사이 미세한 분홍과 보라가 비치더니 서서히 남색으로 짙어짐.
날씨: 흐림, 해무, 이슬비 가끔.
섬을 이 잡듯이 뒤졌지만 아직 셀키는 보지 못했다. 셀키가 진짜 물범의 형상이라면 썰물 때 바위섬이나 모래톱에 기어 올라올 테니, 새벽과 저녁마다 큰 돌 뒤에 숨어 기다렸지만 기척도 없다. 얕은 물가를 수색하고 바위 사이에 있는 그물이란 그물은 다 쳐 놨지만 계속 허탕.
선원들이 지쳐가는 게 보인다. 다행히 삼 일간 아무 일도 없었기에 유령 섬에 얽힌 공포는 사그라든 듯. 하지만 머리에 맴도는 궁금증은 여전. 그 많은 배들에 탔던 이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이 작은 섬을 아무리 싸돌아다녀도 시체는 고사하고 뼛조각 하나도 보지 못했는데. 전염병? 셀키 가죽을 둔 다툼? 식량 부족?
어쨌든 빈손으로 돌아가 봤자 우릴 기다리는 건 밧줄뿐이므로, 물범이든 물개든 바다코끼리든 잡을 때까진 이곳에 꼼짝없이 갇혀있어야 한다. 소나기가 자주 와서 식수 걱정은 없지만 그물에 셀키는커녕 청어나 정어리도 안 잡히는 게 문제다. 육포와 비스킷은 열흘 치 정도 남아있다. 다 떨어지기 전까지 뭐든 발견할 수 있기를.
날씨: 흐림, 짙은 해무, 많은 비.
자정쯤 꺽꺽대는 울음을 들었다. 개 짖는 소리, 노인의 숨이 우렁차게 넘어가는 소리, 길고 고통스러운 하품 소리가 한데 섞인 듯한 불길한 포효. 헛걸 듣나 싶어 이안을 깨웠더니 자기도 들린다고 했다. 바로 해변으로 뛰쳐나가 봤지만 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연안에 비치는 달빛 사이로 검은 머리통 몇 개가 떠 있다가 사라진 것도 같았는데 안개가 짙어 시야가 수 미터에 불과. 확실하진 않지만 희망이 보인다.
낮에는 폭우가 쏟아졌다. 염기 가득한 바람과 비에 절여진 아버지 코트에서 사체 썩은 것보다 더 지독한 냄새가 난다고 롭 아저씨가 핀잔을 줬다. 나도 안다. 푹 젖은 코트는 더 이상 체온 유지에도 도움이 되지 않지만 그렇다고 벗을 수는 없다. 두꺼운 코트로 싸맨 몸을, 내가 그들과 다르다는 명백한 증거를 굳이 드러내서 좋은 일은 없을 테니까.
날씨: 간만에 햇빛.
어젯밤 울음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하다. 사냥에 박차를 가했는데 별 수확은 없었다. 지금까진 2인 1조로 다녔지만, 이제부턴 섬 둘레를 8등분하여 한 명씩 맡기로 했다. 톰은 무서워하는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 귀신한테 잡아먹히든 굶어 죽든 교수형 대에 매달리든 거기서 거기다.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발버둥 쳐 봐야지. 오랜만에 햇빛이 들어 수색이 맑다. 좋은 징조?
날씨: 흐림, 간간이 햇빛과 소나기
셀키를 발견했다!
섬 남서쪽 해안, 오전 여섯 시경 썰물 때 드러난 조수 웅덩이에서. 주변에 다른 개체는 없고 혼자 고립되어 있었다. 보자마자 그냥 물범은 아님을 알았다. 내 키 반 정도의 길이. 둥그렇고 통통한 몸통. 앞발처럼 보이는 짧은 지느러미와 거인의 두꺼운 손가락 여러 개가 달라붙어 있는 듯한 모양의 꼬리. 젖은 조약돌처럼 은광을 머금은 살갗은 희고, 등과 머리 위쪽은 푸르스름하다. 온몸에 새파란 반점이 군데군데 박혀있다. 수염은 이슬 맺힌 거미줄처럼 섬세하게 빛난다. 압도적인 아름다움. 온갖 기묘하고 진기한 바다 생명을 봐왔지만, 그중에서도 손꼽게 황홀하다. 먹먹한 구름의 반사 빛을 받은 피부가 호흡에 맞춰 미세하게 팽창했다 수축하는 광경에 홀려 한참을 바라봤다. 셀키가 왜 그토록 신비한 존재로 알려졌는지 단박에 이해될 정도.
정신을 차리고 그 자리에서 가죽을 벗길까, 다른 이들을 부를까 고민하다 목소리를 듣고 멈췄다. 인간 아이처럼 낑낑대는 소리. 얼마 전 들은 낮고 긴 괴성과는 확연히 달랐다. 새끼인가? 슬쩍 손가락으로 눌러봤더니 움찔하는 체온이 전해져 왔다. 보기엔 매끈해 보였던 외피는 젖은 솜털의 감촉. 아기가 맞는 듯하다. 갓 태어난 것들은 모두 따끈하고 말랑하다.
흰자 없이 검은자로만 가득한 눈이 나를 바라본다. 지성체와 눈을 마주하는 듯한 착각이 인다. 개나 말 같은 짐승과는 다른, 그렇다고 사람도 아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어떤 존재와 대화하는 기분. 맨들한 눈동자에서 불안함과 호기심이 고스란히 읽힌다. 그러나 두려움은 무리와 떨어진 것에서 기인했을 뿐, 내가 자신을 해칠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 것 같다.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한 번 얇고 앳된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손에 쥐었던 칼을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어차피 가죽이 효능이 있을 만큼 성숙하지도 않은 듯. 다섯 시간 후면 밀물이다. 바닷물이 다시 웅덩이를 메꾸면 알아서 헤엄쳐 가겠지. 운이 좋으면 살려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성체 무리를 불러올지도.
선원들에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줄어가는 식량을 걱정하는 그들을 보니 죄책감이 들기도 했지만, 얘기해 봤자 긁어 부스럼일 것이다. 감정적이거나 동정적이라는 의심은 선장에게 최악의 독이다.
날씨: 흐림, 안개
새끼 셀키가 돌아왔다. 처음 만난 해안 모래톱에 홀로 앉아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듯이. 꼬리를 바닥에 깔고 등을 쭉 눕힌 모습이 사람 같아 깜짝 놀랐다. 물로 돌아가라고 휘휘 손짓했지만 오히려 내 쪽으로 다가오더라. 자꾸 미끄러지며 뒤뚱대는 움직임이 걸음마 하는 아이 같다.
동그란 자갈을 하나 주워 멀리 던졌더니 그쪽으로 배를 밀며 기어갔다. 앞발로 한참 굴리며 놀더니 다시 나에게 가져다줬다. 얼마나 오랜 침식을 거쳤는지 반지르르한 돌과 셀키의 눈 색이 비슷하다. 몇 번 더 공놀이? 돌놀이?를 하다가 내가 더 이상 던지지 않으니 손에 머리를 콕콕 부딪친다. 오늘은 뭍에 오래 있어서 그런지 보송하게 마른 털이 배냇머리처럼 부드럽다. 혹시 이 아이가 지금껏 이곳을 찾아온 이들을 흔적도 없이 먹어 치워 버린 걸까? 방심하면 안 되겠지만, 적어도 지금까진 나를 공격할 의사는 없어 보인다.
셀키의 가죽은 산해진미다, 발기부전 치료제다, 영생의 약이다, 미모의 여인과 백년가약을 맺는 주술의 핵심 재료다… 어려서부터 들어온 소문들이 사실일까. 손에 굴러들어 온 보물을 취하지 않는 것과 무방비의 어린애를 도축하는 것 중 무엇이 더 해적의 도리에 어긋날지?
나는 나쁘지 않은 싸움꾼이지만, 좋은 사냥꾼은 못 되는 듯하다.
날씨: 흐림, 강한 바람, 소나기
새끼 셀키가 내 해안 감시의 동반자가 되어주고 있다. 어제는 먹고 남은 조개껍데기를 주니 캐스터네츠마냥 딱딱대며 놀더라. 장난감 값으로 네 언니들이나 데려오라고 일러봤지만 무시당했다. 오늘은 소낙비를 피하러 들어온 동굴에서 흥얼거리고 있으니 어디선가 나타나 내 옆으로 기어 왔다. 음악을 좋아하는 걸까? 얼룩덜룩해진 아버지 코트의 질감이 맘에 드는지 자꾸 얼굴을 부빈다. 내 옷을 욕심내기 전에 자기 가죽이나 잘 간수해야 할 텐데. 이쯤 되니 셀키에 뒤엉킨 그 많은 전설이 다 헛소리라는 생각이 든다. 불로장생이든 뭐든 이 경이로운 생물의 일부를 합법적으로 소유하기 위한 핑계 아니었을까.
오늘 눈치 챈 건데, 셀키에게선 심해가 아닌 고여 있는 물의 퀴퀴한 냄새가 난다. 왜 바다로 돌아가지 못하고 웅덩이에 몸을 적시며 사는 거지? 무리에서 떨어져 길을 잃은 걸까? 나머지 가족은 어디 있는 거야? 아무리 물어봤자 으엉, 읏, 깍, 하는 불가해의 언어만 되돌아올 뿐이다.
거의 백야다. 열한 시 너머 태양이 수평선 아래로 내려가자마자 금방 다시 동이 튼다. 노을은 더 이상 타오르지 않고 연한 장밋빛으로 잠시 스쳐 지나간다. 짧은 밤하늘은 은빛과 희미한 푸른색. 내일도 셀키가 찾아올까. 경계가 많이 풀린 것 같던데 이번에는 어른들을 데려오려나. 아기의 엄마를 만난다면 망설임 없이 도살할 수 있을까.
날씨: 짙은 해무, 폭풍
롭 아저씨가 아기 셀키 발견. 정확히 말하면 아기 셀키와 함께 있는 나 발견. 맹비난. 발견하자마자 가죽을 벗겼으면 지금쯤엔 고향에서 맥주를 오크통째 들이키고 있었을 거라고 고함지름. 내 유약함이 모든 걸 망쳤다고 함. 아버지의 수치라고도 덧붙임. 다른 선원들 호출. 분노의 전염.
셀키는 밧줄에 묶여 야영지로 옮겨짐. 그때까지와는 다른 끼엑- 비명소리를 냄. 불길한 울음이라며 머리를 가격해 기절시킴. 야영지에서 의견 충돌. 차라리 아이를 미끼삼아 어미를 유인하자고 했지만, 격해진 선원들은 듣지 않음. 코트 주머니에서 총을 꺼내려 했지만 이안에게 제압당함. 코트 빼앗김. 손발이 묶임.
해 질 무렵 도살 시작. 고개를 돌리려 했으나 강제로 지켜보게 함. 롭 아저씨 칼은 너무 무뎌 잘 들어가지 않음. 셀키 깨어나 울부짖기 시작. 톰이 내 주머니에 있던 금박 단검 꺼내 아저씨에게 건넴. 복부를 길게 갈라 살갗을 열자 허옇고 끈적한 피가 몇 방울 떨어짐. 지느러미와 꼬리 쪽으로 칼을 밀어내니 마치 원래부터 떨어져 있었던 듯 표피가 쉽게 분리됨. 새파란 반점은 그 순간 검게 변색. 누런 지방층 한 겹을 벗기자 붉은 고기 대신 반투명한 젤리 같은 덩어리가 있었음. 야광충처럼 비현실적으로 파란 혈관이 얽히고 설켜 있는 몸이 경련. 선원들 몇 명 기도를 중얼거리고, 나머지는 구워 먹지도 못하겠다며 불평. 물컹거리는 살은 파도에 던지고 거죽만 돌돌 말아 챙김.
어린 선원들이 당장 떠나자 했으나 풍랑이 심해 배에 오를 수 없었음. 이안이 나를 들쳐 업고 근처 해안 동굴에 밀어 넣음. 한숨을 쉬며 손목 풀어주고 일지를 던져주고 떠남. 펜 끝으로 공격해 보려 했으나 똑바로 일어설 수 없어 뺨만 맞고 쓰러짐.
몰아치는 바람을 뚫고 저 멀리서 껄껄거리는 웃음과 힘찬 건배 외침이 들림. 박리된 몸뚱이에 박혀있던 열린 눈이 자꾸 나를 따라옴.
날씨: 맑음, 백야
추위에 이가 덜덜 떨려 눈을 떴다. 주변은 쥐 죽은 듯 조용. 귓전을 때리던 바람 소리조차 사라졌다. 어스름한 햇빛이 스며드는 걸 보니 분명 낮인데 아직 모두 잠들어 있나? 나를 두고 떠난 걸까? 소용없는 걸 알면서도 손톱이 다 뽑힐 때까지 발목의 밧줄과 씨름하며 몇 시간을 보냈다.
저녁 썰물 때 정도로 추정. 동굴 입구에 누군가 나타났다.
걷는 대신 기어서. 배를 바닥에 밀어서.
으억, 끄억, 하는 서툰 말을 뱉으며.
이안이다.
아니, 이안이 아니다.
최선을 다해 동굴 안쪽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금방 막다른 곳에 막혔다. 그것은 점점 다가온다. 가까워질수록 형체가 선명해진다.
푸대자루를 뒤집어쓴 듯 쭈그라든 얼굴은 분명 이안의 것이지만, 눈구멍과 입안은 텅 비어 있다. 붉게 젖어 초라하게 달라붙은 머리카락. 가슴과 배까지는 땡땡하게 부풀었고, 하반신과 팔은 뱀 허물처럼 축 늘어진 채 질질 끌려오고 있다. 바람 빠진 인간의 껍질 안에 모양 맞지 않는 살점을 억지로 밀어 넣은 것처럼. 마치 터지기 직전의 소시지처럼.
그것은 무언가를 전하려는 듯 계속 끓는 가래와 구역질 중간의 소리를 반복한다. 심하게 어긋난 목울대가 불가능한 위치까지 오르내린다. 어딘가 익숙한 패턴. 아.
그제야 그것 뒤쪽에 따라오는 실루엣 두 개가 보인다. 성체 셀키들이다. 새끼와 달리 흑진주처럼 빛나는 새까만 외피. 나의 두 배쯤 되는 거대한 몸집. 관통하는 듯한 깊은 눈동자. 피비린내에 가려지지 않는 해수의 냄새. 너였구나. 부모를 데려왔구나.
셀키들은 입을 쩍 벌리더니 톱니바퀴 같은 이빨로 밧줄을 물어뜯었다. 덕분에 나는 몸을 간신히 일으켜 동굴 밖으로 향한다. 저절로 끄응, 소리가 나고 허벅지부터 발바닥까지의 근육이 온통 마비된 듯 저려오지만 멈출 수 없다. 몇 걸음이나 옮겼을까.
쏟아지는 햇살에 시린 눈을 힘겹게 뜨자마자, 나는 그 자리에 얼어 붙는다.
해안을 가득 채운 셀키 떼. 그중 수십 마리는 인겁을 쓰고 있다. 미라같이 바싹 마른 가죽, 닻 모양 문신이 가득한 가죽, 젊은 가죽, 늙은 가죽, 땋은 수염이 남아 있는 가죽, 군데군데 찢어진 가죽, 바닷물을 오래 먹어 녹아내린 가죽.
모닥불의 흔적이 남아있는 자리에는 갓 벗겨내 따끈한 피부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롭 아저씨, 톰, 에디, 샘, 알렉스, 레온. 검붉은 피와 내장과 뼛조각 사이에 깔끔하게 발라진 거죽들. 푸르스름한 점액질 덩어리가, 살갗을 잃어버린 셀키들이 그 안으로 들어가려고 꿈틀대고 있다. 이안의 껍데기를 입은 아기가 내 옆에서 끙끙댄다. 무언가를 찾아달라는 듯. 돌려달라는 듯.
나는 조심스레 셀키들의 회오리 사이로 발걸음을 옮긴다. 롭 아저씨의 것으로 추정되는 갈비뼈 옆에 굴러다니는 익숙한 코트. 안주머니에 손을 넣자 돌돌 말린 지도 옆에 익숙한 보드라움이 느껴진다. 반쯤 마른 물범 가죽을 꺼내 모래밭 위에 조심스레 펼치자, 어디선가 조그만 셀키 한 마리가 비틀거리며 기어온다. 마치 이르게 세상 빛을 본 태아처럼 보호막을 잃고 속살만 남은 모습으로. 연약한 몸이 가죽 위에 포개지자 겉과 속이 서로에게 서서히 스며든다. 나는 벌거벗은 마지막 셀키가 새로운 외피를 얻어 다시 온전해지는 광경을 숨 죽이고 목격한다.
각자의 몸을 되찾은 셀키들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세이렌의 비명처럼 혼란스럽고, 곡소리처럼 처량한 화음. 그들은 천천히 하나둘씩 바다로 향한다. 나는 이들이 고향으로, 심해로 돌아간다는 걸 직감한다.
텅 빈 해안엔 살점과 옷가지와 보물들이 흩뿌려져 있다. 버려질 배를 열어줄 번쩍이는 열쇠들, 이국의 화려한 보석들, 목걸이와 반지와 단검들. 나는 뭘 해야 할지 몰라 그것들을 줍기 시작한다.
백야다. 밤이 되어도 하늘엔 빛이 머무른다. 짙은 회청색을 뚫고 내려오는 태양이 바다를 비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