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r 예담 Feb 07. 2022

약봉투는 안 가져갈게요

정신과에 처음 방문했던 10월

문항 9.
1) 나는 자살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 O )


그 밑의 보기들은 읽어볼 필요도 없었다.



나는 그동안 살면서

단 한 번도

삶을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그래서 난

내가 힘들다는 걸

아니

죽을 만큼 힘들다는 걸

인지하지조차 못했다.

읽지도 않고 쿨하게 넘어간 그 밑의 보기들 같이.



부쩍 쌀쌀해진 10월의 어느 날.


갑자기 나의 내면에서 모든 게 폭발해 터져 버려

이러다간 미쳐버릴 거 같다는 생각에 압도되었다.


내 발로 생애 처음 찾아 들어간 정신과에서

의사 선생님은 내 검사지의 점수를 보고 나서

내가 심각한 단계라는 설명과 함께

"이 정도인데 정말 자살 같은 거 생각해본 적 없으세요?"

나에게 한번 더 물어보셨다.


진료는 일사천리로 약 처방까지 이어지고

3-4일 후에 또 보자며

다음 진료일까지 타이트하게 잡고 나서야 마무리되었다.


약국에서 정신과 약을 처음 처방받고

항우울제라고 친절히 적혀있는 약봉투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약봉투는 안 가져갈게요.”라고 말하고

가방 안 깊숙한 곳에 약들을 구겨 넣었다.


정신과도

정신과 약도

우울증 진단도

이 모든 게 나에겐 익숙하지 않았다.


‘내가 괜한 짓을 한 건가?’

‘유난 떠는 거 아냐?’

‘하다 하다 이제 별 꾀를 다 부리는 건가.’


정신과 첫 진료 후 집에 가는 길.


나는 마치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처럼

머릿속이 혼란 그 자체였지만

나를 제외한 온 세상은

변함없이 해가 지고 있었고

사람들이 바삐 걸어가고 있었다.


* 이 글은 위윌 자조모임 정회원 릴라님이 작성하신 글입니다. 



https://lab.yetham.com/community


매거진의 이전글 내 백팩에 항상 들어있었던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