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하다 깨달은 사실 하나
나는 평소에 백팩을 꽤 좋아한다.
큰 짐이 없을 때도 백팩을 자주 멘다.
그냥 웬만큼 필요한 거 다 넣어두면
큰 생각 없이 일단 매고 나가면 되는
그 편의성이 너무 좋다.
다른 사람들도 그런지 모르겠는데
내 백팩 주머니는 마치 보물창고 같다.
볼펜, 포스트잇, 수첩, 조그만 자…
핸드크림, 립밤, 가글액, 섬유탈취제…
USB, OTP, 충전잭…
종류별로 다양한 주머니에 담아둔다.
그 주머니들 중에 제일 깊숙한 곳을
정신과 약이 오랜 시간 동안 단독 차지하고 있었다.
그날은 오랜만에
내 방 대청소를 하는 날이었다.
청소하는 김에 백팩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주머니들을 뒤져보다가 정신과 약을 보았다.
잠시 주머니를 바라보다가 잠잠히 생각해보았다.
‘내가 이 약을 이제 굳이 갖고 다닐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이내 알았다.
내 안에 그 생각이 들었다는 건
이제는 약을 갖고 다닐 필요가 없다는 걸!
자격증을 꼭 따야 한다는
스스로의 압박을 내려놓았었다.
그래도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고 보기는 했다.
큰 압박 없이 내가 하고 싶은 만큼 준비한 시험을
다 끝내고 나오는 순간,
이미 안될 거를 알고 있었고
역시나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근데
그래도 괜찮았다.
애초에 나는
우울증이 남긴 무기력함이란 상처에서 벗어나
뭐든 새로운 삶을 살아보고 싶어서 한 거지.
꼭 자격증을 따기 위해서 한 거는 아니었다.
그 시험을 통해서
나는 혹시 나중에 이 자격증이 진짜 필요해지면
어떻게 준비해야 합격할 수 있을지를 알게 되었다.
난 그걸 배운 거로 충분하다.
자격증 시험 떨어진 후에 내 주변에 말하자
바로 다음 시험 보라고, 하던 김에 해야 한다고 등등
역시나 예상한 반응들이 나왔다.
물론 내가 듣고 싶던 말들은 아니었지만
이제 그런 말들이 압박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냥 상대방의 말속에 담겨있는
날 위하는 마음까지는 감사히 받고,
어쨌든 나는 언제든 나를 위해서,
내가 원하는 어떤 선택이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를 위해
편의점 아르바이트도 그만두게 되었다.
이전에 갖고 있던 부담감을 내려놓고서는
일 자체가 어렵거나 부담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내가 새롭게 배우고 싶은 게 생기면서
거기에 집중하기 위해서 아르바이트를 그만뒀다.
대신 그 당시에 받고 있던 취업지원금에 맞춰서
내 지출을 줄이는 방법을 택했다.
한창 우울증으로 힘들 때에는
난 뭐든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없고
날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근데 사실은
난 꽤나 할 수 있는 게 많은 사람이었고
날 위한 선택지도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약도 마찬가지다.
난 나를 위해서 백팩에 약을 넣고 다닐 수도 있고
또한 나를 위해서 약을 내 방에 둘 수도 있다.
그리고
난 백팩의 활용성을 위해서
약을 내 방에 두는 선택을 했다.
그냥 버릴까도 생각은 했지만
아직은 내 아픔을 아예 잊어버리기보다는
관리하는 시기라고 생각해서
굳이 버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순간 알았다.
병원에서 말해주는 치료 종료가 아닌
내가 나에게 말해주는
치료 종료가 드디어 왔음을
.
.
.
!
내 인생 가슴 뭉클한 대청소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 이 글은 위윌 자조모임 정회원 릴라님이 작성하신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