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에 처음 방문했던 10월
문항 9.
1) 나는 자살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 O )
…
그 밑의 보기들은 읽어볼 필요도 없었다.
나는 그동안 살면서
단 한 번도
삶을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그래서 난
내가 힘들다는 걸
아니
죽을 만큼 힘들다는 걸
인지하지조차 못했다.
읽지도 않고 쿨하게 넘어간 그 밑의 보기들 같이.
부쩍 쌀쌀해진 10월의 어느 날.
갑자기 나의 내면에서 모든 게 폭발해 터져 버려
이러다간 미쳐버릴 거 같다는 생각에 압도되었다.
내 발로 생애 처음 찾아 들어간 정신과에서
의사 선생님은 내 검사지의 점수를 보고 나서
내가 심각한 단계라는 설명과 함께
"이 정도인데 정말 자살 같은 거 생각해본 적 없으세요?"
나에게 한번 더 물어보셨다.
진료는 일사천리로 약 처방까지 이어지고
3-4일 후에 또 보자며
다음 진료일까지 타이트하게 잡고 나서야 마무리되었다.
약국에서 정신과 약을 처음 처방받고
항우울제라고 친절히 적혀있는 약봉투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약봉투는 안 가져갈게요.”라고 말하고
가방 안 깊숙한 곳에 약들을 구겨 넣었다.
정신과도
정신과 약도
우울증 진단도
이 모든 게 나에겐 익숙하지 않았다.
‘내가 괜한 짓을 한 건가?’
‘유난 떠는 거 아냐?’
‘하다 하다 이제 별 꾀를 다 부리는 건가.’
정신과 첫 진료 후 집에 가는 길.
나는 마치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처럼
머릿속이 혼란 그 자체였지만
나를 제외한 온 세상은
변함없이 해가 지고 있었고
사람들이 바삐 걸어가고 있었다.
* 이 글은 위윌 자조모임 정회원 릴라님이 작성하신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