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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참고 사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by 휴지기

어제 법원에 다녀왔다. 벌써 네 번째 방문이다.


어렸을 적에 법원에서 일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잠깐 했어도 이렇게 내가 사건의 당사자가 되어 법원에 드나들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협의이혼을 사건이라 칭하는 건 너무 과한가 싶지만, 법원에서는 사건으로 분류하는 것 같았다.


물론 내 인생에서는 일생일대의 중대한 사건이기도 하고 말이다.


어제 법원에 간 이유는 의무면담을 받기 위해서였다. 만 15세(?) 이하 자녀를 둔 부모는 이혼숙려기간 중 1회 부모면담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이혼서류를 제출할 때 받는 부모교육 말고도 또 한 번의 의무면담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 번거롭게 느껴지다가도, 부모의 이혼이 아이에게 미칠 파장을 생각하면 이 정도의 안전장치는 해놔야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법원으로 가는 길은 차가 많이 막혔다. 법원 근처에 있는 고가의 아파트들을 지나가면서, 이런 데 살면 법원가기도 편하겠다는 의미 없는 상념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경기도에서 내려오는 남편은 면담에 10분쯤 늦을 것 같다고 했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남편은 언제나 늦었다. 이 하염없는 기다림도 내가 이혼을 결정하게 된 사유 중 하나였다.


면담실에 들어가니 상담사 선생님께서 서류를 챙겨 왔냐고 물으셨다. 아, 서류를 챙겨 오라고 했었나? 나는 챙겨 오지 못했다고 말씀드렸고 상담사 선생님은 나를 잠시 어이없게 바라보시더니 다시 창구에 가 서류를 작성해 오라고 하셨다.


나는 창구로 가서 사정을 말씀드렸다. 창구에 계셨던 분도 상담사 선생님과 똑같은 표정을 지으시면서 나를 잠깐 바라보시고는 서류를 다시 작성할 수 있도록 해주셨다.


서류 작성을 다 하니 남편이 도착했다. 남편은 그 사이, 또 10년은 늙어버린 듯했다. 말라비틀어진 고목 같았다. 내가 반했었던 샤프한 얼굴과 자신만만한 표정 같은 것은 어딘가로 급히 휘발되어 버린 것처럼, 온몸 어디에서도 생명력이라고는, 활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짧은 면담을 끝내고 나오면서 내가 말했다.


"오빠 왜 이렇게 그지같이 하고 왔어?"


농담이었다. 남편이 평소처럼 '나는 그지니까'와 같은 농담으로 받아주길 바라며 던진 질문. 짧고 희미하더라도, 잠시 웃기 위해 던진 말. 하지만 남편은 웃지 않고 말했다.


"일하다가 바로 나왔으니까. 너무 피곤하다."


남편은 급히 할 일이 있다면서 집에는 저녁때쯤 들어올 거 같다고 했다. 남편은 항상 바빴다. 그래서 나와 있을 때 항상 피곤했다. 자주 어딘가가 아프기도 했다.



부모 면담을 할 때 서류를 챙겨가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나는 원래 덤벙거리고 잘 잊어버리며 뭔가를, 또한 누군가를 챙기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친정 엄마는 종종 나에게 도대체 정신머리를 어디 놓고 다니는 거냐면서 타박을 하곤 했다.


그래서 그랬나? 이렇게 중요한 서류를 챙기지 못한 것은, 다른 사람은 아무도 하지 않을 실수를 한 것은 원래 내 성격 때문이었나?


아니면, 혹시나 나는 사실은 이혼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닐까?



부모 면담을 할 때 상담사 선생님께서 우리의 이혼의사를 물어보셨다.


"남편분은 이혼 의사가 몇 퍼센트쯤 있으세요?"


남편은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60퍼센트요."

"아내분은요?"


나는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뜸을 들였다.

나는 얼마나 이혼을 하고 싶을까? 나는 말했다.


"70퍼센트요."


상담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60퍼센트, 70퍼센트.... 이 정도면 참고 사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내가 대답했다.


"너무 오래 참아서요....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된 거 같아서..."


상담사 선생님은 내 대답을 듣고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셨지만 다른 말씀은 없으셨다. 다른 사람들은 얼마만큼의 확신으로 이혼을 할까? 나의 이혼 의사는, 얼마만큼일까? 혼란스러웠다.



급한 일을 끝내고 온 남편은 저녁으로 김치찜을 만들었다.


남편이 요리를 할 때 나는 옆에서 무를 채 썰고 있었다. 남편은 채 썬 무를 작은 그릇에 담았다면서 웃음기 가득 담아 나를 구박했다.


"내가 아까 그릇 작을 거라고 했잖아. 왜 이렇게 생각이 없냐?"


나는 당연하듯 대답했다.


"야, 내가 생각이 있었으면 너랑 결혼했겠냐? 생각이 없으니까 너랑 결혼했지."


남편은 또 바로 수긍했다.


"그렇네. 맞는 말이긴 하다."


나는 남편이 속죄의식으로 만든, 천만 원짜리 김치찜과 소주를 먹고 바로 잠이 들었다.



이틀 전, 남편이 경기도에 첫눈이 온다면서 눈 맞고 있는 셀카를 하나 찍어서 보냈다.


내가 꿈꾸던 삶이 그런 거였다. 첫눈이 오면 '첫눈이 와'라고 말하며 같이 설레는 마음을 나누는 삶. 따뜻하고 조금은 낭만적인 삶.


하지만 남편에게 첫눈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남편은 눈이 와서 작업장 정리를 하러 다시 일터에 갔다가 밤늦게야 숙소에 들어왔다고 했다. 주차하는데 길이 미끄러워 애를 먹었다고도 말했다. 나는 첫눈 사진을 보낸 남편에게 약속한 돈을 보내라고 재촉했다.



내가 일주일에 한 번씩 와서 글을 쓰는 카페에는, 계속 캐럴이 울려 퍼진다. 이곳 카페에 와야 곧 크리스마스라는 게 실감이 난다.


크리스마스 다음날은 나와 남편의.... 결혼기념일이다.

우리의 결혼은 기념할 만한 것이 되지 못되지만....

이번에는 뭔가 다르지 않을까, 어쩌면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배신당할 줄 알면서도 또 한 번, 이번이 분명히 마지막이라고 마음먹으며 슬며시,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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