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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하루 Jun 24. 2024

너를 통해 내 안의 다정함을 짓다

내가 잃어버렸던 것

"다정하다"를 사전에 찾아보면 한자로는 "多情", "정이 많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정(情)"은 어떤 것일까. 사전을 찾아보면 "사랑이나 친근감을 느끼는 마음"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대상을 다정하게 대하기 위해서는 어떤 것들이 필요할까. 우선 어떤 대상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 어떤 종류든 마음이라는 싹이 돋아날 수 있을 것이다. 관심을 통해 그 대상에 대한 다양한 데이터가 쌓이고, 그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그 대상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다 보면, 공감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지고 자연스럽게 그 대상이 그만의 편안한 상태에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게 된다. 이 단계에 이르게 되면 정이 생겼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마음이 내 내면의 방을 비집고 나올 수밖에 없을 정도로 커져서 말이나 행동으로 드러나게 되면, 내가 다정하다고 상대방도 느끼게 되는 것 아닐까.


부끄럽지만 고백하자면, 나는 정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다. 최근에 깨달은 사실이지만, 나는 친절, 배려, 공감을 다정함과 혼동하고 있었다. 나는 친절하고 배려심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을지언정, 많은 정을 가지고 살아왔는지를 스스로에게 묻는다면 자신이 없다. 나는 주변에 다정함의 출발점인 충분한 관심을 쏟고 살아왔는가를 스스로 질문해보면,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오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내가 해야 할 수백가지의 일들에 둘러싸여, 그 일을 어떻게 하면 다 해낼 수 있을지 고민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써온 사람이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나에게 주어진 일 이외의 것에는 관심을 크게 쏟지 않는 방향으로 나의 생각과 감정이 효율화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소외되고 있던 '나에게 주어진 일 이외의 것'에는 주변 사람들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주변에도, 나 자신에게도 다정하지 않고 있었고, 어느덧 내 마음 속 다정함이라는 집은 골조부터 썩기 시작했다. 어떻게 다정함을 줘야하는지 그 방법조차 모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뭘 원하는지, 뭘 좋아하는지, 나도 나를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정신차려보니, 숙제, 공부, 시험, 취직, 직장, 집안일, 엄마로서의 역할,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도리 등 나에게 주어진 일들 자체가 내 삶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일들은 언제나 그렇듯 해내고 나면 더 많은 일들로 가득 채워지기 마련이었다. 그 'to do list'의 네모칸을 문제 없이 체크하는 데 내 에너지를 모두 쏟느라, 주변 내 소중한 사람들을 포함한 나 자신에 대해서도 관심을 줄 시간도, 에너지도 별로 남아있지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나에 대한 깊은 관심이나 보살핌은 내 삶에 효율적이지 않다는 판단을 해왔던 것 같다. 나에게 주어진 과제를 처리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선택들을 해오다보니, 내 우선순위에 내가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정말 말 그대로 주객전도, 목적이 도구화된 상태다. 그렇다면 그 많은 'to do list'는 도대체 누굴 위한 것이었을까.


이렇게 내 인생의 주도권을 내가 아닌 외부로부터 물밀듯 들어오는 내가 해야 할 일들이 쥐기 시작하고 그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그때부터 인생의 방황과 권태가 시작되는듯하다. 나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주지 않았으니 나와 친하지 않게 되고, 그런 인생은 방황하게 된다. 그런 삶의 방식이 너무 익숙해졌기에 어디서부터 문제인 것인지, 어떻게 수정해나가야 하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


내가 내 인생의 방황이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아니 내가 방황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지한 것은 아이를 키우면서이다.


한 생명을 키우기 위해서는 그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그 아이가 어떤 것에 관심을 보이는지, 무엇을 할 때 즐거워하는지, 어디가 아픈지, 불편한지, 졸린지, 피곤한지, 무엇을 무서워하는지를 대부분의 부모는 지켜보고 있기에 알게 된다. 아이와의 대화를 통해서도 알게 되는 것도 많지만, 그보다는 아이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이 훨씬 더 많다. 그만큼 아이에게 엄청난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이다.


우리 아이는 아토피를 앓고 있다.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을 바르는 방법은 아토피 증상이 나타난 부위에 A나 B 약을 일주일 바른 후, 증상이 없어지면 증상이 나타났던 부위를 기억해두었다가 30일 동안 해당 부위에 C 약을 바르는 것이다. 처음 일주일 동안 A약을 발라야 하는지 B약을 발라야 하는지는 아토피 환부가 어떻게 생겼냐에 따라 달라진다. 환부가 작지만 더 붉게 큰 점처럼 부풀어오른 모양이면 A약을, 더 넓고 옅은 붉은 색을 띄는 경우에는 B약을 바른다. 이렇게 아토피를 치료하고 관리해주는 한 가지 일을 하기 위해서, 나는 아이의 몸 어디에 뭐가 낫는지, 그게 어떤 모양인지 열심히 관찰하기 위해 아이의 온 몸 구석구석을 살펴본다. 그리고 심지어 아이를 간지럽히던 그 발진의 형체가 모두 사라지더라도, 나만은 그 발진의 위치를 30일 동안 잊어서는 안 된다! 잠깐 숨었지만 다시 슬금슬금 고개를 내밀 수도 있는 발진을 완벽히 없애기 위해서는 그 부위에 C 연고를 30일 동안 발라야 하기 때문이다. 보통 새로운 발진은 한번에 2~3군데 정도 나고, 발진이 사라졌지만 약을 발라주어야 할 곳은 10군데가 넘지만, 발진이 있었던 위치, 언제 발진이 시작되었는지, 언제까지 어떤 약을 발라야 하는지 각 부위마다 기억해두고, 매일 아침 저녁으로 2번씩 약을 발라야 한다.


이건 아이를 키우는 일의 극히 일부분이지만, 이 한 가지 일만 보더라도, 내가 아이의 몸 구석구석을 얼마나 열심히 살펴보게 되고, 알게 되는지 알 수 있다. 이렇게 관심을 쏟고 정성으로 약을 바르다 보면, 아이의 몸에 대한 지식이 늘어나고, 아이의 간지러움에 대해 공감하게 되고, 얼른 완치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가 커서 스스로 이러한 수고로움을 매일 아침, 저녁으로 해내야 하는 것은 너무 안타까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이를 키우며 내 안의 다정함을 다시 짓기 시작한다. 잘 쓰지 않은 근육을 쓰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뻐근하듯이, 끊임 없이 특정 대상을 신경쓰고 이해하려 노력하고 공감하고 도움을 주어야 하는 육아가 처음에는 내 몸에 맞지 않는 듯 피로하고 잘하고 있는 것인지 불안할 때도 많았다. 하지만 계속해서 그 근육을 쓰다보면 어느덧 이전보다는 한결 힘들이지 않고 아이를 보살피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얼마 전, 남편이 내 얼굴을 보더니 거뭇거뭇한 사마귀가 얼굴에 많이 났다고 얘기해주었다. 찬찬히 얼굴을 들여다보니 얼굴 가장자리와 코 주변, 목 부분에 작은 사마귀가 엄청 많이 나 있었다. 사실 남편이 처음 얘기해주었던 시점은 몇달 전이었는데, 그 사이에 엄청 많이 번져있었던 것이다. 아이의 아토피는 그렇게 구석구석 열심히 살폈는데, 나는 얼굴 로션마저 허겁지겁 간신히 바르고 있었고, 선크림은 바르면 다행이었다. 다정함의 기본인 관심을 내 몸에 거의 주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아이를 키우며 아이에게 엄청난 관심을 쏟다보면, 내가 얼마나 나에게 무관심하고 무신경했는지를 깨닫는다. 아이 몸을 들여다보듯, 내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따뜻한 손길을 줄 수는 없을까. 아이가 울 때 왜 그런지 물어보는 것처럼, 마음이 답답하고 우울한 날에는 왜 그러냐고 나에게 물어봐줄 수 없는걸까.


보이지 않았던 내 방황의 시작점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나의 건강을 전혀 우선순위에 두지 않았던 생활들, 나의 생각과 감정을 들여다볼 노력조차 하지 않았던 순간들, 일단 이 일만 끝내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안일했던 마음들이 차곡차곡 쌓여 그 시작점을 만들었다는 것을 지금의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여전히 바쁜 일상이겠지만, 그래도 나로부터 내가 소외되며 살고 싶지는 않다. 아이를 통해 다시 다정함을 짓기 시작했으니, 그 속에 나를 포함한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살뜰히 초대하고 싶다. 여력이 된다면, 더 소소한 것들까지 초대할 수 있으면 좋겠다. 가령 나를 설레게 하는 날씨와 자연, 7년 동안 함께한 우리집의 가구들과 식물들 같은 것들 말이다. 그렇게 안 쓰던 잔근육까지 열심히 쓰다보면, ‘내 삶이 'to do list'가 아닌 내가 애정하는 것들로 가득 채워질 수 있지 않을까?’, ‘진정하게 나다운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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