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백성은 7년마다 안식년을 지냈다. 그리고 안식년이 일곱 번 돌아오게 되는 50년째에는 '희년'이라고 이름 붙인 큰 축제를 성대하게 지냈다. 희년에는 안식년처럼 밭에 씨를 뿌리거나 포도원을 가꾸어 소출을 거둘 수 없다. 그뿐 아니라 빚 때문에 노예가 된 이스라엘 사람들이 풀려나고 그 이전 50년 동안 가난 등의 이유 때문에 팔린 땅이 제 주인에게 다시 돌아간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시작된 ‘희년’은 아직까지 가톨릭교회를 통해 이어오고 있다. 특히 가톨릭은 지난 2000년을 ‘대희년’으로 선포해 세계적인 축제의 장으로 만들기도 했다. 이스라엘의 희년에는 많은 의미가 있지만, 제도적으로는 “부채 탕감”이 가장 핵심적일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빚을 갚지 못하면 노예가 되어야 했다.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가진 재산을 모두 처분해서라도 빚을 갚아야 했다. 하지만 재산, 특히 땅까지 처분했는데도 빚이 남으면 결국 노예의 삶은 피할 수 없었다. 농사지을 조그마한 땅조차 없는 이가 빚을 갚을 방법은 없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난한 이들의 재산은 부자들에게 흘러 들어갔고 많은 이들이 노예로 전락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처럼 사회 전체의 부가 특정 부유층에게 과도하게 집중되는 현상이 국가에게는 매우 위험했다. 노예 층의 비대화에 의한 사회불안과 이에 따른 경제구조의 왜곡은 이스라엘 사회가 지속하기 위해 반드시 극복해야 할 문제였다. 이러한 불합리를 이스라엘은 50년마다 희년을 선포함으로써 극복했다. 노예를 풀어주고 억울하게 빼앗긴 땅을 돌려줌으로써 모순을 해결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희년은 수천 년 전 머나먼 이국땅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이 수천 년 전 이스라엘과 전혀 다르다고 하기는 어렵다. 대부업법에 따른 최고 이자는 24%다. 1,000만 원을 빌리면 매월 20만 원을 갚아야 한다. 대부업체를 이용하는 이들은 은행에 손을 내밀 수 없는, 신용도가 낮은 이들이다. 24%의 고율의 이자에도 불구하고 대부업체를 찾는 이들에게 다른 재산이 있을 리도 만무하다. 그리고 그런 이들이 생활비로 1,000만 원을 빌리고 다달이 이자로만 20만 원을 갚는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대부업법에 따른 최고 이자는 지난 20년 동안 꾸준히 줄어들어 겨우 24%에 이른 것이다. 대부업법이 제정된 2002년 상한이자는 무려 66%에 달했다. 이후 꾸준히 개정되어 2007년 49%, 2010년 44%, 2011년 39%, 2014년 34.9%, 2016년 27.9%를 거쳐 2018년 24%까지 낮아졌다. 그리고 2021년 7월 7일부터는 다시 4% 낮은 20%로 조정될 예정이다.
대부업체라고 하면 흔히 사채업자들을 떠올리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서민들이 이용하는 ‘저축은행’ 역시 매한가지다. 그리고 저축은행은 이름만 “은행”일뿐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은행과는 다르다. 저축은행의 원래 이름은 ‘상호신용금고’였다. 2001년 법률 개정으로 ‘상호저축은행’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처음으로 “은행”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7년에는 “상호”자 마저 떼어내고 명칭을 “저축은행”으로 바꾸었다.
저축은행에게는 이름의 변경 말고도 대도약의 기회가 한 번 더 있었다. 1년 동안 16개 저축은행이 영업정지를 당한 2011년 저축은행 사태가 그것이다. 당시 정부는 부실 저축은행을 정리하기 위해 대부업체에게 저축은행을 인수할 수 있는 길을 터주었다. 저축은행 인수가 가능해지면서 많은 저축은행이 대부업체에 팔려나갔다. 이후 대부업체들은 그들의 영업방식을 저축은행에 적용하면서 공격적 영업을 이어오고 있다. 그 결과 저축은행은 2020년 기준 총대출 규모가 무려 84조 원에 달할 정도로 거대화되었다.
재성씨의 채권자는 무려 12곳이다. 12곳 중 2곳은 카드사, 한 곳은 자동차 리스사고 나머지 9곳은 저축은행이다. 9개의 저축은행에서 빌린 돈만 5천만 원 가까이 된다. 재성씨의 재산은 살고 있는 집의 월세 보증금 1,500만 원과 출퇴근용 경차 한 대가 전부다. 급여는 세후 140만 원이다. 이런 재성씨가 어떻게 9개의 저축은행에서 5천만 원에 가까운 대출을 받을 수 있었을까? 아니 왜 그렇게 많은 대출이 필요했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아이고... 선생님. 무슨 대출을 이렇게 여러 군데에서 받았어요?” “아니... 전 그냥 전화가 와서요. 전화해서 돈을 빌려준다고 하니까...”
재성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양돈장에 취업했다. 자동화 시스템이 적용되지 않은 곳이었기에 손 가는 곳이 많았다. 일은 고되고 월급은 적었다. 하지만 기숙사가 있었고 삼시 세끼가 제공되었다. 모든 생활을 양돈장과 기숙사에서 하다 보니 따로 돈 쓸 일이 없었다. 월급은 그대로 차곡차곡 쌓였다. 다달이 계좌에 돈이 불어나는 재미에 돼지 키우는 일도 힘들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한쪽 눈이 침침해졌다. 병원에서는 포도막염이라고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쪽 눈을 완전히 잃었다. 양돈장의 비위생적 환경이 원인일 것 같았다. 당장 나머지 한쪽 눈마저 잃어버릴까 봐 겁났다. 재성씨는 양돈장 일을 그만두었다. 그 후 건설현장, 식당, 트럭운전 등등 닥치는 데로 일을 했다. 하지만 매번 장애가 있는 재성씨가 적응하긴 어려웠다. 그렇게 1~2년마다 직장을 바꾸며 살아야 했다.
그러던 중 한 레미콘 회사에 취업 할 수 있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열심히 일하고자 했다. 회사가 워낙 외진 곳에 있어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하기가 어려웠다. 고심 끝에 리스를 이용해 출퇴근용 경차 한 대를 샀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자동차 리스료가 빠져나가니 생활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담보도 신용도 없던 재성씨에게 은행의 문턱은 높았다. 생활비가 모자라 여기저기 대출을 알아보던 중 저축은행을 알게 되었다. 상담조차 하기 어려웠던 은행과 달리 저축은행은 전화통화만으로도 300만 원이나 대출해 주었다. 그런데 그다음부터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대출은행에서 돈을 빌려주겠다며 전화가 왔다.
대부분 저축은행은 대출중개업체를 이용해 영업한다. 중개업체가 대출을 소개할 때마다 일정액 수수료를 주는 방식이다. 수수료 수입을 올려야 하는 중개업체는 다양한 편법을 활용해 무리하게 영업하고는 한다. 대표적인 방법이 위법하게 수집된 개인정보를 활용하는 방식이다. 아마도 대출을 알아보는 과정에서 재성씨는 자신의 개인정보를 노출시켰을 것이다. 노출된 개인정보는 브로커들을 통해 수집되고 대출중개업체에까지 흘러 들어갔을 것이다. 이렇게 수집된 정보를 통해 대출중개업체는 무작위로 전화를 돌렸을 것이고 재성씨에게까지 전화가 간 것이다.
이렇게 재성씨는 돈을 부족할 때마다 저축은행에서 대출을 받았다. 나중에는 이자를 감당하기 어려워 대출을 받았다. 이른바 돌려막기다. 재성씨와 같은 저소득 근로자는 돌려막기를 하는 순간 빚의 수렁에 빠지고 만다. 이미 자신의 수입으로 빚을 갚을 수 없는 상태에 빠지고 말았을 것이고 돌려막기는 이러한 빚의 규모를 기하급수적으로 증가시키기 때문이다.
재성씨는 개인회생을 선택하였다. 월 변제금은 60만 원이 조금 넘었다. 9개의 저축은행을 돌아가며 빚을 냈던 재성씨가 과연 월 60만 원을 꼬박꼬박 갚아나갈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하지만 1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밀리지 않고 성실히 빚을 갚아나가고 있다. 만약 개인회생을 이용할 수 없었다면 아마도 재성씨는 지금까지 돌려막기로 연명했을 것이고 빚의 규모는 더욱 커졌을 것이다. 지독한 빚쟁이들의 독촉에 직장생활도 힘들었을 테다. 결국, 재성씨는 빚을 갚지 못했을 것이고 채권자들도 고스란히 돈을 떼이고 말았을 것이다.
개인회생은 돈을 떼먹는 제도가 아니다. 갚을 수 있는 만큼 갚고,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나머지에 대해서만 탕감해주는 제도다. 채무자가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해야 채권자도 돈을 회수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은 탕감해주어야 한다.
50년에 한 번씩 빚을 탕감해주었던 이스라엘의 ‘희년’, 개인회생을 ‘희년’에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갚을 수 없는 빚은 없애야 한다는 이스라엘의 고민과 개인회생의 취지는 큰 의미에서 같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