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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셀프 힐 링 Jul 12. 2021

나의 노래

사회적 배려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되었다.

언제 쏟아질지 모르는 비를 피해 틈틈이 마당에 풀을 뽑는다.

거름 한 줌 주지 않았는데 얼마나 번식력이 강한지 잡초의 생명력은 증명할 길이 없다.

돌아서면 발목이 보이지 않을 만큼씩 자라니 말이다.

계속 살아도 되는 집이면 눈 질끈 감고 저절로 숨죽일 시간을 기다려도 되지만 이사를 해야 하니 남의집살이

주인 눈치 때문이다. 마당에 잔디가 없어 선택했던 집이었는데 풀밭이 돼버렸다.

그래도 풀을 뽑는 시간은 정신이 한가롭고 편하다.


오늘 아침에도 풀을 뽑았다.

녀석은 발을 더럽히면 방에 들어가지 못할 것을 아는지 앞발을 나란히 모은채 데크에 엎드렸다.

풀을 뽑는 날은 햇볕이 들지 않으니 덥지 않다는 걸 아는 게지.

대, 소변을 볼 때 외는 내려가지 않는다.   

  

비가 오지 않으면,

풀이 자라지 않으면,

간간이 세상을 말려줄 빛이 있다면,

진한 아메리카노 한잔이 있다면,     


아름다운 풍경이 되리라.

  




껌딱지 같은 녀석은 한 뼘 내 옆에 잠들어 있고 나는 축축한 머리를 빗어 넘기며 친구의 카톡을 확인한다.    


“친구야!  암세포가 더 이상 자라지 않았대. 그때 그대로래”  


흥분과 전율이 그대로 느껴졌다.

3개월마다 한 번씩 정기검진 날에는 핸드폰에 시선이 더 자주 간다. 소식이 언제 날아들까 기다리는 것이다. 얼마 전 우리가 겪었던 일이기에 더 마음이 간다. 이 친구는 우리 남편보다 훨씬 먼저 수술했지만 계속 재발이 되어 몇 년 동안 항암치료를 받았었다. 그리고 2년쯤 전부터 치료를 중단했다(지금은 나보다 더 건강하다).

암환자 엄마 때문에 결혼을 미룬 딸아이가 35살이나 먹었고 아들은 해외근무 기회를 포기했다.

가족이기에 잃어버리는 것들이 생긴다...



 이곳 양평은 공기가 맑기로 유명한 곳이라 암 환자들이 군락을 이루어 살기에 적당하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사이사이 암 환자들이 살고 있다.

열 평 남짓 되는 그곳에서 암과 치열한 전쟁을 한다.

암세포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산소라 숲 속은 그 농도가 도심보다 2%나 높다는 이유에서다.

그곳에서 한 소녀를 만났다. 벌써 5년이 지났다.

대학생쯤으로 보였으나 고2라고 하였다.

펜션 같은 4개의 방이 띄엄띄엄 떨어진 곳에 중간 방 두 개는 공실이었고 양쪽 끝방에서 소녀와 내가 환우 가족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소녀의 엄마는 간암 말기에다 조그마한 소리에도 신경 발작을 일으키는 병까지 있었다.

한 번도 밖을 나오는 걸 보지 못했다. TV를 본다거나 핸드폰을 사용한다는 얘기들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소녀는 설거지 그릇이 없었다. 항상 1회 용이었다.

나무젓가락을 사용했으며 핸드폰은 무음이었고 통화를 할 때는 먼 곳으로 달아났다.

그런 소녀와 나는 두 달 동안 진부한 싸움을 했다.  

   

소녀는 엄마를 위해서 나는 남편을 위해서였다.   


 미세한 소리에도 반응을 일으키는 엄마를 위해 소녀는 외부에서조차 들려오는 소음도 차단해야 했다. 나는 폐암인 남편을 위해 불쏘시게도 바삭 마른 참나무 껍질이나 잣송이 외는 사용하지 않았다. 냄새 때문이었다. 그런 다름이 싸워야 하는 분명한 명분이 되었다.


시골은 24시간 내내 정화조 배출기가 작동돼야 한다는 것을 군청 직원과 통화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종일 까끌거리는 소리 때문에 작동을 멈추면 냄새가 화장실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스위치를 꽂으면 빼놓고 꽂으면 빼놓고를 수없이 반복하던 어느 날, 전기선이 잘려 있었다. 가위가 지나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소녀는 자기가 한 짓이 아니라고 우겼다. 내내 돌아가지 않으면 위법이니 군청에 고발하겠다는 단호한  말에 주인은 그제야 정화조 배출 기기를 옮겨 주겠다고 했다.

어쨌든 그 계기로 서로의 상황을 공유하면서 소녀와 친하게 되었다.


엄마를 간호할 사람이 자신밖에 없어 학교를 휴학했다는 것이다.

경제적 여건이 되지 않아 간병인은 꿈도 꾸지 못하고 터울 큰 남동생은 작은아버지 집에 맡겨졌다고 했다.

아버지는 돈을 벌기 위해 주야로 일하시고 엄마의 형제들은 이미 단절되었다는 얘기까지 덤덤히 했다.

표정 없는 얼굴이었다. 당시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가끔 불러 밥을 먹이고 반찬을 나누는 것 정도였다.

내가 청소년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였다.

지금도 후회스러운 건 소녀의 연락처를 저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족은 유기적인 관계이므로 암환우 가족의 고통과 절망과 스트레스도 암환우와 다르지 않다.

암환우를 위한 정신적 치유 프로그램은 부족하나마 효과가 입증되고 있으나 암환우 가족들을 위한 사회적 배려는 아무리 찾아봐도 예가 없다.    


그 소녀는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학교는 졸업했을까?

뿔뿔이 흩어진 가족은 다시 한집에서 살고 있을까?

엄마는... 만약 엄마가 돌아가셨다면...

이별의 아픔과 피폐된 삶은 회복이 되었을까?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위한 노래를 불러야 한다. 우리 스스로 치유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




비가 오려나 보다.

널어놓은 빨래를 걷어들이고 있다.

장마철에는 수시로 밖을 내다보아야 한다.

그래야 빨래를 두 번 하지 않아도 된다고 남편은 빨래 담당의 생색을 내고 있다.

이제는 설거지 담당까지 자처하고 있다.

덕분에 나는 나를 위한 노래를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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