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을 다녀와야 할 일이 생겼다. srt를 타고 갈까 차를 가지고 갈까는 늘 고민하는 문제이다. srt를 타고 가면 지루한 시간에 어쩔 수 없이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다. 마음뿐이지 평소에 읽지 않는 책을 열차 안이라고 읽힐 리 만무하다는 걸 알면서도 이번엔 읽을 수 있겠지라는 마음으로 챙기게 된다. 될 수 있는 한 양장본의 얇은 책을 선택한다. 하지만 뚜껑도 열지 못하고 돌아오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러면서도 고민을 잠시 하게 되는 이유는 행여 책을 챙기지 못한 아쉬움과 후회를 미리 정리 해 놓기 위해서다.
이번엔 겸사겸사 어머님 댁에서 김치와 된장과 고추장 등 묵혀놓은 먹거리를 챙겨 올 욕심에 장거리 운전을 하기로 맘먹었으니 그따위의 정리가 필요치 않을 법도 한데 연신 책장으로 눈길이 간다. 뭐라도 챙겨 넣지 않으면 출발이 늦어질 것 같아 일단은 한 권을 빼 들고 집을 나서기로 했다.
가끔 장시간 집을 비우긴 하지만 그럴 때마다 순돌이가 보고 싶어 빨리 되돌아오는 편이다. 잘난 뒤태를 눈앞까지 들이밀고는 꼬리를 살랑거리며 무한 사랑과 신뢰를 보내오는 아이다. 한시도 곁을 비우지 않고 내 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는 녀석이 얼마나 이쁜지 모른다. 잘 다녀올 테니 잘 놀고 있으라고 단단히 일러둔다. 그런 내 모습이 남편도 우스웠는지 쓱- 쳐다보더니 씩-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설명이 길어진 이유는 평소보다 일정이 길어질 것 같아서다. 녀석을 만난 후, 그러니까 재작년에 발을 다쳐 병원에 일주일 입원을 했을 때 외는 오래 떨어진 적이 없었던 터라 혹시 녀석이 불안해할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이곳 집에서 울산까지의 거리는 약 350km이다. 최근 상주, 영천고속도로가 열리면서 3시간 반이면 도착할 수 있다. 특히 장거리 운전을 좋아하는 나는 휴게소를 들리지 않으면 3시간이면 족히 도착하는 거리다. 바삐 약속한 것도 아닌데, 급히 서둘러야 할 이유도 없는데 쉬지 않고 달린다. 당연히 휴게소는 들르지 않는다. 가만 생각해 보니 습관이었다. 목적지가 정해지면 쉼 없이 달려야 한다는 암묵적 규칙이 습관처럼 몸에 베여 저절로 작동되는 것 같다. 마치 잘 훈련된 병사처럼 습관이 시키는 데로 의심 없이 자연스럽다.
'만약, 시간 단위가 아니라 분 단위로 오가게 된다면 이런 낭만을 어디에서 보상받을 수 있을까.'
그러면 그러한 대로, 최고의 속력으로 달리는 사람처럼 나름의 여유를 부리는 방법이 따로 있겠지. 더러는 마음의 여유가 없는 팍팍한 사람들의 모습이라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역시 자신들의 경험치만큼 이 아닐는지. 세상 어디에도 정답이 없다는 걸 느끼는 요즘이다. 천천히 더디 가는 사람들에게도 우리는 똑같은 모습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오만 생각들이 꿀렁이는 사이 울산 근처에 닿은 것 같다. 울산은 내게 특별한 도시다. 제2 고향이기도 하지만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 희망과 좌절이 공존했던 곳이기도 하다. 다채로운 색깔들이 비빔밥처럼 한 몸으로 엉켜 본연의 제맛을 버리고 비빔 맛이란 새로운 이름으로 재탄생되었던 곳이었다. 습관도 습관이거니와 어쩌면 나는 그래서 단숨에 달려가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부산했던 날들이 인생의 역사로 이력 된 곳이며 다시 그 시절도 돌아갈 수는 없으나 추억만으로도 충분한 곳이기도 하다. 단단한 아픔들이 몽글몽글 구름처럼 피어올라도 괜찮노라고 굽은 등 토닥여 줄 수 있는 곳. 울산은 내게 그런 곳이다.
톨 게이트를 지나 비켜진 길 가장자리에 차를 세웠다. 시내로 불쑥 들어가기 전에 가끔 해보는 나만의 의식행위이다. 공기가 유별나다. 저절로 펴지는 어깨와 저절로 길어지는 호흡이 느껴진다. 그런 생각들이 생각 주변을 맴도는 것을 느끼며 다시 차에 오른다. 시내를 가로질러 동네로 들어섰다. 전국을 뒤흔든 자본주의 물결이 울산이라고 비켜 갔을 리 없다. 오래된 건물이 있었던 자리에 새로운 건물이 들어섰고 오전 10시가 훨씬 지났는데도 문이 닫힌 곳은 이미 재개발 협상이 끝나서 가게를 비운 상태라는 것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질러대는 이쪽의 목소리와 다 담을 수 없는 저쪽의 목소리가 팽팽한 기류를 타고 피부에 와닿았다. 가진 자들의 억지 논리가 정당화될 수 있는, 어쩌면 그것이 더 많이 가질 수 있는,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 믿기에 상식이 배제된 요구가 자행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저들의 눈에는 더 이상 버티기 조차 힘겨운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일까. 그나마도 없어 숨조차 쉴 수 없는 이들은 세상의 처분만 속수무책으로 기다릴 뿐이었다.
답답한 거리를 조용히 빠져나왔다. 약속 장소에서 볼 일을 마치고 친한 동생이 기다리는 곳으로 차를 돌렸다. 태화강을 따라 드문드문 낯익은 기억을 떠올리며 또 생각에 잠긴다. 인생의 가장 화려했던 한 날들이 이곳에 묻혀있다. 세상 어디에도 정답이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지라 그냥 묻힌 대로 묻어두기로 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만난 동생들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 꽃을 피웠다. 맛있는 밥을 먹고 늘 다녔던 찻집에서 걸쭉한 대추차를 스푼으로 떠먹으며 피운 이야기 꽃이다.
이십 수년의 도시가 만들어준 우정이니 얼마나 귀할까. 사람의 관계란 이리 오래도록 유지되어야 비로소 열리는 마음이었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 9시를 넘기기 못하는 착한 부인들 ㅎㅎ~~
우리는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피해 집으로 향했다. 그제야 순돌이 생각이 났다. 오늘 밤 우리 순돌이는 내가 비운 빈방을 잘 지키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