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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셀프 힐 링 Sep 16. 2021

화려한 외출이될 뻔...

집 떠난 자유로움이 여행의 목적이어야 한다.



 

 바람은 낮은 목소리로 완연한 가을을 알리고 있다. 한때 무성했던 들이 빨갛게 물든다는 건 이내 떨어져 땅에 묻힐 낌새라는 거겠지.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배추와 무와는 반대의 길을 가는 저들의 목소리도 질서를 지키기 위한 소리일 것이다.



점점 알몸이 되어가는 가지를 같은 자리에 앉아 지켜본다는 건 나 쓸쓸한 일이다. 커튼을 드리운다. 애써 외면하지 않으면 수시로 포착되는 저들의 몸짓이 애처롭기 때문이다. 아침 산책길에 밟히는 도토리도 한껏 숙성된 밤송이도 제철의 왕성한 활동을 잊지 않은 듯하다. 각자는 그렇게 신이 창조한 질서의 세계를 아낌없이 미련 없이 입고 벗음을 수없이 반복하고 있다. 나 역시 거대한 자연 체계의 일부이기에 숙연해지는 아침이다.    



 


실로 오랜만에 벗들과 여행을 다녀왔다. 청주호를 거쳐 단양팔경의 비경을 눈에 담고 마음에 담고 싶어서다. 시골 아낙들이 뭉쳐 어디론가 여행을 한다는 건 집을 떠난다는 것에 더 큰 의미는 두는 듯하다. 모두가 시름시름 앓는 병든 닭 같았다. 어디든 낯선 곳에서의 새로운 에너지의 충전이 필요했었나 보다. 번번이 거절했으나 이사를 하고 보니 이번에 거절을 하면 완전 절교라는 벗들의 공갈 협박이 감사해서 따라나섰다. 코로나로 인해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한 탓인지 평일인데도 소문난 곳은 회원권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숙박이 힘든 지경이었다. 다행히 벗의 회원권으로 우리는 안락한 곳에 여장을 풀었다.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첫 코스로 결정한 제천 의림지에 당도했다. 의림지는 신라 진흥왕 때 우륵이 개울물을 막아 둑을 쌓아서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로 700년 뒤 현감 박 의림이 다시 견고하게 둑을 쌓아 그 이름을 따서 의림지라 했다는 것이다. 웅장하거나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정갈하고 다정한 배경이 여행객의 발길을 이끌기에 충분했다. 첫눈에 들어온 것은 촘촘히 정박해 있는 오리배였다. 타고 싶었나 보다. 4명이 이구동성으로 타자고 했고 순식간에 배에 올랐다. 간간히 띄워 놓은 건 홍보용이었고 다행히 우리 외엔 아무도 없었다. 굳이 힘들게 밟지 않아도 바람 따라 저절로 떠다니는 것이 얼마나 한가롭고 좋았는지 모른다. 시골 아낙 4명은 그냥 자지러지게 웃기만 했다. 마치 괴성과도 같은 폭발적인 웃음이었다. 비늘처럼 물 위로 툭툭 튀는 물빛과 섞여 어디로 달아나는지 알 필요가 없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남편 없이 여행을 다녀본 기억은 세 손가락을 벗어나지 않았던 것 같다. 이번이 딱 세 번째인데 이렇게 즐거울 줄 예전에 미처 몰랐다??? 이 나이에 이러고 살았으니 나 원 참...   


 




 


여행은 아름다운 경치를 보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내면에 숨겨진 자신과 만나는 기회라고도 한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아니기를. 견고한 나의 틀을 느슨히 하고, 조금 풀어지면 어떠랴 허물없이 편한 벗들이니 최대한 풍요로운 햇빛과 자연의 아름다움과 헤친 머리와 목선을 타고 넘는 바람과 손가락을 빠져나가는 공기를 맘껏 마시며 취하고 싶을 뿐이었다. 내겐 몇 년만의 화려한 외출이 아니던가.     






 옛 에 눈을 감는다. 목적지 없이 먹을 양식을 가득 싣고 사람이 북적대지 않는 곳을 피해 다니며 여름휴가를 보냈던 기억이 난다. 잠자리도 먹거리도 정해진 것이 없었던 시절. 봉고차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했던 날들이 아련하기만 하구나. 후드득 소나기가 지나갈 때는 한적한 곳에 차박을 하고 남편이 끓여 주는 라면 맛이란 가히 일품이었다. 그렇게 정처 없이 다녔던 풋풋한 여행을 이제는 그리움으로만 접어 두어야 한다. 선명한 들이 투명한 물살 위에서 채색되어도 건질 수 없는 시간 이리라.    


 



우리는 맛있는 점심을 먹기 위해 예약된 곳으로 옮겨갔다. 본시 함께하는 여행이란 그런 것이다. 몇 번의 감탄과 몇 번의 환호와 수십 번 눌러대는 폰의 포토샷과 맛집을 검색하는 등... 배가 고프지 않아도 때가 되면 먹어야 할 것 같은 것. 잠시 정지한 채 낯선 향기에 몰입하고 싶어도 일행을 생각하며 마음 단속을 해야 하는 것. 계획보다 조금 서둘러 숙소에 들고 싶어도 가고자 했던 곳을 건너뛰면 안 될 것 같은 것. 일찍 자고 싶어도 집 떠난 시골 아낙들의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려야 한다는 것에 장단을 맞춰야 한다는 것. 비단 나만이었을까. 어쩌면 4명이 전부 그런 생각을 배려로 둔갑한 채 즐겁기로 작정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함께하는 여행의 묘미일 것이다.    






 하루를 자고 보니 우리 순돌이 생각에 맘은 이미 집에 도착해 있었다. 충주 호도 단양 팔경도 이미  지워졌다. 어제와 오늘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아침 산책은 잘 갔다 왔는지, 행여 산책하다 줄을 놓치는 불상사는 없었는지, 당황한 남편의 얼굴을 떠올리며 스스로 불안을 조장하는 건 빨리 집으로 가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사 후 아직 환경의 변화에 적응 못한 녀석이 본격적으로 걱정되기 시작했다. 눈치 빠른 일행이 모를 리 만무하다. 태연한 척했으나 이른 아침 남편과의 전화 내용이 순돌이 얘기인지라 모르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도착 예정시간이 오후 7시였으나 서둘러 준 탓에 오후 2시에 집에 도착할 수 있게 되었다.    


 

 급한 일로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면 여행은 이미 내게 별 의미가 없었다. 원래 좋아하는 여행은 아니었으나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집 붙박이로 살아온 몇 년이 나의 모든 삶의 패튼을 바꿔놓은 것 같았다. 맥없이 단조로워진 생활. 우리의 공간에 아무도 들이지 않았던 지난날들. 마음이 움직이는 자리가 비좁고 단단했었다는 걸 목적 없는 여행을 해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집 떠난 자유로움은 목적이 될 수는 없었던 일까? 다음에는 정말이지 제대로 된 화려한 외출, 그런 여행을 해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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