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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셀프 힐 링 Jan 11. 2024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읽고

길 잃은 뱃사람

 


  이 책은 뇌 손상을 가진 환자들에 대한 한 신경학자의 따뜻한 시선이 녹아든 임상기록지다.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와 무엇이 다르며 그 차이는 어느 정도인지, 그들이기에 가능했던 탁월한 능력은 언제 발휘되는지, 혼재된 마음이 빚어낸 다양한 증상들에 대해 의학적 전문가들은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사회는 그들에게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 우리의 태도는 어떠한지, 실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된다.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렴풋이 누군가에게 들었던 기억 하나가 떠오른다. “에꾸 나라에 가면 눈 두 개인 사람이 비정상이 되는 법”이라고 말이다. 이 책에서 가장 감명 깊었던 1부 상실에 수록된 “길 잃은 뱃사람”을 소개하고자 한다.


 “기억을 조금이라도 잃어버려봐야만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기억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기억이 없는 인생은 인생이라고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의 통일성과 이성과 감정 심지어는 우리의 행동까지도 기억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을.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내가 기다리는 것은 완전히 기억상실뿐이다. 그것만이 내 삶을 모두 지워버릴 수 있다. 내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루이스 부뉴엘


 "길 잃은 뱃사람(페이지 50)"의 서두에 걸린 문장이다. 우리의 기억이 인생이라고, 그것만이 존재의 가치라는 한 영화감독의 말이다. 기억의 완전한 상실을 기다리는 그의 열망이 어쩌면 무언가에 대한 두려운 마음과 맞닿아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삶의 편향과 욕망을 정면으로 반증해 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완전한 기억상실, 모조리 지워버리고 싶은 마음을 우리 역시 회피하는 것으로 두려움을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 출연하는 지미는, 이야기의 시재가 과거형에서 현재형으로 자연스럽게 옮겨지는 것을 지각하지 못한다. 직전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도 기억을 하지 못하는 기억상실증 증세(유두체의 신경세포가 알코올 때문에 파괴되는 경우 즉, 코르사코프 증후군)를 보인다. 이러한 현상을 작가 올리버 색스의 노트에는,


"이처럼 기억이 끊겨서 연속성을 잃어버린 존재를 과연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야 했다. 나는 이 때도 그리고 나중에 노트에 적은 내용 속에서도 이 '잃어버린 영혼'에 대해서 생각을 거듭했다. 어떻게 하면 연속성을 그에게 돌려줄 수 있을까? 그는 뿌리가 없는 인간이었다. 아니 먼 과거의 일에만 뿌리가 남은 사람이었다. “연결”, 하지만 그가 어떻게 뿌리를 연결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해야 그가 뿌리를 연결하도록 도울 수 있단 말인가? 대관절 연속성이 없는 인생이란 어떤 것일까?"(페이지 62)


 환자를 바라보는 올리버 색스의 안타까운 마음이 그대로 전달되는 대목이다. 여러 가지 검사를 해 보았으나 지미는 일부의 신경세포만 파괴되었으므로 심각한 뇌의 장애는 없었다고 한다. 올리브 색스는 지미의 기억이 중단된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상징적 해와 연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며, 당시 사건이 지미에게 어떤 영향력을 행사했을까를 또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1965년까지 해군복무에 유능한 군인으로 복무를 마쳤음을 확인하였고, 이후 알코올로 인한 뇌증후군이 진행되어 1971년까지 병원치료를 받았다는 일련의 삶의 여정을 지미의 형에게서 듣게 된다.


지미는 결코  '한 곳에 엉덩이를 붙이고 꾸준히 있는 성격'이 아니고 '낙천적인 성격'에다가 늘  '술독에 빠져서' 살았던 모양이다. 형이 기억하기로 지미는 해군에 있을 때는 아주 안정된 생활을 했지만 1965년 제대한 다음부터 약간 이상해지기 시작되었다고 한다. 생활에 안정을 주던 구조이자 닻의 역할을 하던 것이 없어지자 무기력해지면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폭음을 하게 된 이유도 거기에 있었던 것 같다 (페이지 66)


올리브 색스는 지미의 형에게서 지미의 기억단절에 대한 근거를 찾을 수 있었다. '과연 지미는 해군을 제대한 것이 삶에 대한 무기력감과 안정된 생활을 산산조각 낸 원인이었을까? 제대하기 직전 지미에게 일어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건은 없었을까? 무섭고 끔찍한 일련의 사건을 강하게 억압한 채 기억 속에서 지워버린 건 아니었을까?'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심리치료사가 하게 되는 건  결국 방치하는 것 이상의 유효한 치료 방법을 찾지 못하는 의학의 한계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의사나 치료자의 시선으로 지미를 바라본다면 기억을 상실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 불행일 수 있겠으나 상실은, 지각할 때만 아픔이 된다는 전재가 따른다면 지미가 불행한 삶을 살아간다고 누가 단정할 수 있을까? 지미는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존재의 뿌리가 될 수 있고 삶의 연속성은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하여 나는 환자와 의사 둘 중 누구를 위로해야 하나를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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