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딸을 기다린 이유
배아가 엄마의 몸에 안전하게 착상되고 난 뒤 난임병원에서 출산병원으로 병원을 옮겼다. 그러고 임신한 지 어느덧 18주의 시간이 흘렀다. 18주부터는 초음파로 태아의 성별을 확인할 수 있다.
어느 주말 태아의 건강상태와 성별 등을 확인하기 위해 병원을 찾았다. 주말이라 역시 오랜 대기 시간이 있다. 병원에서도 인기가 많은 선생님이 봐주시는 진료라 늘 1시간 이상의 대기가 기본값이다. 원장님 특유의 친절함과 산모에게 포용적인 자세가 돋보였는데, 산모가 걱정스러운 질문을 할 때면 늘 불안한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답변을 잘해주신다. 예를 들어 임신 중 가려야 할 음식이 무엇이 있는지 묻는 질문에 ‘땡기는 게 있으면 무엇이든 다 먹어도 좋아요. 라면이라도 드세요’라고 답변해 주신다. 임신 중 산모는 자신의 행동이 아이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의 하루를 보내는데, 이럴 때 선생님의 ‘해도 된다’식의 답변이 산모의 불안한 마음으로 인해 생긴 행동의 제약을 조금씩 풀어주게 한다.
우리 아이의 성별을 알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대기실에서 차례를 기다리던 중 아내와 대화를 나누었다.
아내 l 여보 홀리가 어떤 성별이었으면 좋겠어?
거북이 l 이전엔 항상 아이를 가지면 딸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지금은 성별이 그다지 중요치 않아. 홀리가 우리에게 찾아온 것만으로도 감사해! 여보는 어때?
아내 l 응 나도 첫째는 딸이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이제는 상관없어! 나도 마찬가지야!
시험관을 통해 우릴 찾아온 홀리는 이미 어떤 조건 없이 소중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아직 얼굴도 대면하지 않은 그가 이처럼 우리 마음에 커다란 영역을 차지할 수 있다니..! 피를 나눈 공동체의 끈끈한 연대감이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듯했다.
대화 도중 진료실에서 산모 이름을 불러 원장실의 문을 열고 선생님을 마주했다. 간단한 인사를 마친 뒤 초음파를 보았다. 초음파에 나와 있는 그림을 마우스로 측정하며 머리의 둘레도 보고 몸통의 길이도 재어본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로 아이기 생식기 부근을 확인한다. 자세히 살펴보던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선생님 l 축하드려요 공주님이네요 예쁜 옷 많이 사셔야겠어요?
선생님의 말을 듣는 순간, 전율이라는 감정이 나를 찾아오며, 발끝부터 머리까지 소름이 끼쳤다. 그날 나는 딸의 아빠가 되었다. 주변 딸 가진 지인들이 아이와 함께 조잘조잘 대며,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마음속 잠재했던 소망 꿈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왜 딸을 바랐을까?
어느 날 장난감 가게를 갔는데 딸과 아들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을 지켜볼 수 있었다. 한 가족의 아들은 장난감 앞에서 ‘아빠 나 이거 사줘’라고 말하는 반면, 다른 가족의 딸은 장난감의 주인공에 대한 스토리를 아빠에게 들려주었다 (조잘조잘).
딸도 성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자신의 감정과 상황을 말로 유쾌하게 말로 표현하는 게 웃기고 재미있었다. 딸의 그런 조잘거림이 좋았다. 말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딸과 유치한 농담을 주고받고, 딸에게 잔소리도 들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딸을 갖고 싶어 했다.
그리고 아마도 내가 부모님에게 무뚝뚝하고 가끔은 냉혈한 아들이기에 나와 자식과의 관계에서는 반대를 꿈꿔왔을지도 모르겠다. 집안에서 외동으로 자라 이렇게 하지 마라 저렇게 하지 마라는 나의 인생에 대한 간섭이 심했던 부모님의 잔소리가 나의 입을 꾹 다물게 했었다.
(이제 와서 부모님의 가르침을 원망하는 건 아니지만, 홀리의 인생은 홀리가 스스로 정답을 찾게 하리라..!)
어서 빨리 시간이 흘러 딸을 만나고 싶다. 우리 딸은 엄마를 닮았을까? 아빠를 닮았을까? 캠핑을 좋아할까? 벌써부터 딸에게 묻고 싶은 질문을 한가득 안은채 태어날 딸을 기다린다.
홀리에게는 미안하지만, 내가 가장 애정하는 존재는 아내임을 바꿀 마음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