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 캐스팅을 하던 내가 캐스팅을 당한 건에 대하여~
베를린엔 유명한 버거 마이스터라는 버거집이 있다. 이곳은 한국인들에게도 무척 유명한 맛집이라 베를린에 방문한다면 꼭 한 번은 들르는 곳이라 할 수 있다.
내 최애 버거는 칠리 버거에 칠리 프라이즈인데 맵싹 한 것이 딱 내 스타일이었다. 물론 한국인 기준에선 전혀 맵지 않음.
여느 날과 다름없이 필름을 현상하러 코티(kottbusser tor)라는 곳에 들른 날이었다. 크로이츠베르크 에 위치한 코티는 한국인들이 잘 아는 Voo store가 있는 지역이다. 코티에는 포토 코티라는 사진관이 있었는데 온갖 예대생&사진가 등이 애용하는 사진관 중 하나였다. 포토 코티 사장님이 어느 날 나에게 혹시 한국인이냐 물었고 그렇다고 대답하니 가게 아르바이트생 중에 한국인이 있었다며 혹시 그 사람을 아냐며 이름을 알려줬다.
본인 주변에 특정 국가 사람 지인이 있으면 동일 국가 사람에게 아냐고 물어보는 건 전 세계 어딜 가나 똑같은 듯. 물론 나는 전혀 모르는 분이었다.
그날따라 사진관에 사람이 많았다. 내 앞으로도 있고 내 뒤론 젊은 독일 커플이 있었다. 나는 그 당시 만나던 (전) 남자 친구와 함께 있었다. 한국인의 촉이라는 것이 참.. 그 독일 커플이 우리를 싸한 눈으로 계속 주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기척을 느낀 나는
‘아 이건 필시 인종차별의 각이다.’
라며 내 안의 각도기를 꺼냈다. 하지만 다행히 그들은 딱히 우리를 건들지 않고 별 일 없이 지나갔다.
휴. 괜히 또 예민한 고라니가 될 뻔했네.
한 숨 돌린 우리는 바로 옆에 위치한 버거 마이스터로 향했다. 주문을 끝내고 버거를 기다리고 있는데 대각선 테이블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아까 그 독일 커플과 눈이 마주쳤다.
‘이건 찐이다.’
순간 그런 느낌이 들었다. 눈을 절대 피하지 않고 계속해서 우리를 스캔하는 그 눈. 뭐라고 속삭이며 시선은 절대 떼지 않는 그들. 절대로 착각이 아닌, 오직 우리만을 향한 그 네 개의 눈동자.. (전) 남자 친구가 잠시 화장실을 다녀온다며 일어났다. 홀로 남겨진 나는 최대한 험상궃은 무표정으로 되지도 않는 경계를 하고 있었다.
머릿속에선 인종차별을 당하면 또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까 시뮬레이션을 열심히 돌렸다. 하도 시비를 거는 미친놈들이 많아서 그런지 베를린에서 살면서 가시를 세울 일들이 많았다. 하지만 주로 중독자들이나 행태가 불량한 사람들이었는데 이번엔 멀끔한 멋쟁이들이 나를 쳐다보는 것이 썩 유쾌하진 않았다.
여기서 잠깐!
조금만 외국에서 생활하다 보면 인종차별을 하려고 드릉드릉하는 꼴이 잘 보인다. 자연스럽게 그 부분에 대해서 예민해지고 항상 신경이 곤두서 있어서 외국 생활은 참 피곤한 것 같다. 그냥 외국인이면 그냥 한 번씩 건드리는 것 같다.
그동안 겪었던 다채로운 인종차별 썰도 조만간 써봐야겠다. 기상천외해서 재미짐.
무튼 혼자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앉아있던 나에게 독일 커플이 다가와 내 테이블에 앉았다.
‘올 게 왔구나. 그래…. 어디 맘껏 지랄해 봐….’
정말 이런 마음이었다.
이미 내 테이블에 앉은 이상 피할 곳도 없고 마주하는 것만이 내게 남은 선택지였으니까.
인종차별의 최대의 반응은 무반응이다.
인종차별에 대한 반응은 사람마다 갈리는 편이다.
지지 말고 싸워라 또는 반응하지 마라
대체로 외국 생활을 하게 되면 분노의 3개월이 존재하는데 ‘분노의 3개월’이란 외국 생활을 시작한 지 3개월까지는 모든 인종차별에 일일이 반응하며 에너지를 쏟아 반격하는 시기이다.
나와 내 친구들 대부분 ‘그 3개월’을 싸움꾼 수준으로 보냈다. 하지만 3개월이 지나면 어느 순간 해탈하며 ‘너는 짖어라. 나는 갈 테니.’ 같은 마음으로 조금 내려놓게 된다.
나는 이미 많이 해탈을 한 상태였으므로 그들이 왔을 땐 빨리 나한테 지랄하고 떠나길 바랬다.
한껏 경계하는 나에게 독일 커플 중 여자가 말했다.
“우리가 아까부터 너네를 지켜봤어. 너네 너무 옷도 멋있게 입고 쿨~해 보여.”
아?
난생처음 들어보는 낯선 이들의 플러팅에 인종 차별을 당했을 때 보다 더 당황스러웠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고 지금 내 표정이 얼마나 바보 같을지 상상도 못 할 정도였다.
“아! 고마워. 사실 난 너네가 시비 걸라고 온 줄 알았어.”
사실대로 말하며 자연스럽게 아이스 브레이킹이 되었다. 알고 보니 그들은 영상 디렉터였다. 그들은 이번에 본인들이 작업하는 뮤직비디오에 우리를 캐스팅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날은 둘이 비슷한 트렌치코트를 입었던 날인데 그들 눈에는 외국인들은 잘하지 않는 커플룩 aka 시밀러 룩 (단어가 참 길티스럽지만..)인데 스타일이 좋아서 너무 멋있었다고 했다.
그들이 내게 본인들의 웹사이트와 인스타그램 계정들을 보여주었고 내가 알만한 아티스트 중에서는 Mura Masa와 작업한 적도 있다고 했다. 그 뒤로 몇 명 더 말했는데 사실 못 알아 들었다. 동종업계 사람에게 캐스팅을 받는 영광이 있다니. 그리고 무라 마사는 내가 좋아하던 아티스트 중 한 명인데 이게 웬일이야? 그래서 우리도 같은 업계에서 일한다고 이야기해줬다. 그들은 정말 우리를 흥미로워했다.
그들과 대화를 할수록 나는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 왜냐면 나는 내일 한국으로 돌아가니까. 하. 하. 하.
그들은 나에게 혹시 조만간 다시 만날 수 있겠냐며 미팅을 하자고 했다. 그래서 내가 말했지.
“미안. 좋게 봐줘서 너무 기쁘고 좋은데..
나 내일 한국 가.”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너무 아쉬워하며 혹시 언제 다시 올 예정이냐고 물었다.
다음에 그러면 다시 베를린에 오게 된다면 꼭 연락해달라는 말을 남기곤 독일 커플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팝콘 각 이던 이 모든 상황이 다 끝나고 돌아온 (전) 남자 친구에게 나는 그가 자리를 비운 동안 일어난 일에 대해 설명해줬고 귀국 하루 전을 장식한 추억이 되었다. 그는 매우 아쉬워하며 뒤돌아 독일 커플에게 인사를 건넸고 그들 또한 아쉬운 인사를 했다.
우린 버거를 먹으며 그들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구경했고 진지하게 귀국을 밀어볼까 생각했다.
to. 독일 커플에게
나 곧 갈 거니까 기다려주겠니..?
물론 그땐 내 옆 사람은 바뀌어있을 예정이야~
어차피 아시안 잘 구별 못할 거니까 괜찮을 거야 풉 킥 넝~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