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촉사(灌燭寺)’라는 이름

by 진경환

논산의 관촉사와 은진미륵을 생각할 때마다 두 가지가 늘 궁금했다. 하나는 관촉사 석상, 은진미륵의 존명(尊名)이 ‘미륵’인가 ‘관음’인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관촉사의 이름에 하필 ‘물 댈 관(灌)’ 자를 쓰는가 하는 점이다.


은진미륵 앞에 설 때면 나는 우선 관음께, 그러고 나서 미륵께 기도를 올린다. 도상(圖像)과 존명의 불일치, 곧 석상의 모습과 그것을 부르는 이름 사이의 어긋남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이다. 우리가 흔히 은진미륵이라고 하는 석상의 정식명칭은 ‘관촉사석조미륵보살입상’이지만 도상적으로는 관음이라고 하는 게 적절하다는 주장을 접하고 나서 내 기도의 대상이 그렇게 어정쩡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도상-존명의 불일치 문제에서 관음이냐 미륵이냐, 그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거기에는 일찍이 이능화가 말했듯이, “조선 사람들은 석불을 모두 미륵이라 부른다”는 소위 거석(巨石)에 대한 뿌리 깊은 숭배가 전제되어 있고, 아울러 일종의 메시아니즘과 유사한 미륵신앙, 그리고 민중의 고통을 어루만져주는 대자대비(大慈大悲)의 화신인 관음에 대한 강렬한 믿음이 중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다층적으로 얽힌 문화와 사상의 켜를 분석과 해석의 이름으로 하나씩 털어낸 결과 앙상하거나 빈약한 소출을 얻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이까지 버리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나는 은진미륵의 재료가 된 돌이 반야산 정상에서 자른 후 굴려 내린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실제로 정상 부근에서 구멍을 내 자르려다 만 거대 바위가 여럿 있는 것을 확인한 바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비록 더 합리적인 생각이라 하더라도, 관촉사 마당에서 거대한 바위가 갑자기 솟아올랐었다는 이른바 ‘바위솟음’ 전설의 유구한 전승을 무시하거나 버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이번에 이야기하고자 하는 ‘관촉사’라는 이름도 단순치 않다. 불국사(佛國寺), 통도사(通度寺), 해인사(海印寺)처럼 대개의 절집 이름은 불법의 내용을 충실히 드러내고 있는 데 비해, 관촉사의 경우는 상당히 난해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관촉사는 ‘물댈 관(灌)’ 자와 촛불 혹은 촛대를 뜻하는 ‘촉(燭)’ 자를 함께 쓰고 있다. 오행에서는 ‘수극화(水克火)’라 하여 물[水]과 불[火]은 서로 상극(相剋)이다. 그렇다면 왜 관촉사는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맞서거나 충돌하는 것을 그 이름으로 내걸었을까?

그런데 관촉사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렸다. 고려 광종(재위 949~975) 때 지어진 관촉사는 고려 말에는 ‘관족사(灌足寺)’라고도 했다. 고려 말 대학자인 이색(李穡, 1328~1396)은 “한산의 동쪽으로 백여 리쯤 되는 곳(馬邑之東百餘里) / 은진현이라 그 안에 관족사가 있는데(市津縣中灌足寺) / 여기엔 크나큰 석상 미륵존이 있으니(有大石像彌勒尊) / ‘내 나간다 나간다’며 땅속에서 솟았다네(我出我出湧從地)”라 읊었다. 고려 말 무외(無畏)도 「용화회소(龍華會疏)」라는 글에서 “지난 인년(寅年)에 제가 이 모임을 관족사(灌足寺)에 주선하려 했다”고 했다. 신흥왕조의 기틀을 잡고 문풍을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한 조선 초기의 문신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 주도해 편찬한 『동문선』의 기록이니 믿을 만하겠다.


조선 시대 들어서도 『태종실록』과 『세종실록지리지』에서 그 이름이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관족사(灌足寺)는 은진현의 북쪽에 있다. 돌미륵이 있는데, 높이가 54척이다”라거나 “관족사 남쪽 봉우리의 큰 돌이 저절로 무너졌다”다거나 “관족사의 석불이 신시(申時)로부터 해시(亥時)까지 땀을 흘렸다”는 따위다. 이로 보면 고려말에서 조선 초까지 관촉사는 관족사로도 불렸음을 알 수 있다.


‘관족’은 발을 씻는다는 뜻인데, 이 용례와 관련해서 은진미륵이 선 자리에 물이 많아 미륵의 발이 물에 젖어 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도 전하지만, 사실과는 좀 멀어 보인다. 풍수적으로 미륵이 서 있는 관촉사의 득수(得水)는 그 앞에 펼쳐진 논산평야를 휘돌아 감아 흐르는 논산천일 뿐 아니라, 당장 관촉사의 계곡물은 수량이 매우 적고 계곡 또한 사찰 아래에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관족’과 비슷한 용례는 『금강경』에서 찾을 수 있다. “부처님께서 성중(城中)에서 차례대로 걸식(乞食)하시고 나서 본래의 처소로 돌아와 옷과 발우(鉢盂)를 거두시고 발을 씻으신 다음 자리를 펴시고 앉으신 후 공양을 드셨다(於其城中, 次第乞已, 還至本處, 飯食訖, 收衣鉢, 洗足已, 敷座而坐).”


한편 관촉사는 ‘볼 관(觀)’ 자를 쓰기도 했다. 조선 초 문신인 박상(朴祥, 1474~1530)과 병자호란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인 홍익한(洪翼漢, 1586~1637), 그리고 조선 시대 한문학의 대미를 장식한 김택영(金澤榮, 1850∼1927) 등은 자신의 시에서 모두 ‘관촉사(觀燭寺)’라 썼다. 무엇보다도 1743년(영조 19)에 세워진 「관촉사사적비」의 전언이 주목된다. “(은진미륵이 세워진 후) 중국의 승려 지안(智眼)이 (은진미륵의 미간에서 나오는) 광명을 쫓아와서 말하기를, ‘중국의 가주(嘉州)에도 대상(大像)이 있는데, 역시 동쪽을 향해 서서 이 상과 동시에 광명이 서로 응하였습니다’라고 했다. 여기서 관촉사라는 이름을 얻은 것이다.” 말하자면 지안이 촛대처럼 우뚝 솟은 은진미륵의 미간에서 쏘아대는 광명을 바라보고 저 멀리 중국에서 은진까지 왔다는 것이다. 이 진술의 키워드는 ‘바라보았다’는 말이니, 그 절집을 ‘관촉사(觀燭寺)’라 한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조선 시대를 통해 많이 쓰여온 말은 역시 ‘물 댈 관(灌)’ 자를 쓰는 ‘관촉사(灌燭寺)’이다. 성종 때의 문신으로 대제학을 지낸 성현(成俔, 1439~1504)과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이 자신의 시에서 모두 ‘관촉사(灌燭寺)’라 썼고, 우의정을 지낸 이행(李荇, 1478~1534) 등이 1530년에 『동국여지승람』을 증수하여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17세기 실학자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의 『동국여지지』 그리고 이규경(李圭景, 1788~?)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모두 그렇게 적었다. 말하자면 관찬서는 물론이고 유력 학자들의 저술에서 대부분 ‘관촉사(灌燭寺)’라 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관족사’나 ‘관촉사(觀燭寺)’는 잘못 쓴 것인가?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고려 말까지는 ‘관족사’로도 불려오다가 이후에 ‘관촉사(觀燭寺)’와 ‘관촉사(灌燭寺)’가 동시에 쓰였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지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도 ‘관촉사(觀燭寺)’라고 생각할 텐데, 그들에게 ‘이 절 이름은 원래 ‘관촉사(灌燭寺)이다’라고 하면 오히려 의아해할지 모른다. 이렇게 보면 이들 이름 중 어느 하나만 맞고 나머지는 착오나 오류라고 단정할 수는 없겠다. 어느 이름이 옳고 그르냐를 따지는 것은 마치 관촉사 석불이 미륵인가 아니면 관음인가, 둘 중의 하나만 옳다고 말하는 것처럼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절의 역사와 함께 그 이름도 이러저러하게 흘러왔다고 보는 편이 좋겠다는 말이다.


남는 문제는 ‘지금’ 쓰고 있는 ‘관촉사(灌燭寺)’라는 이름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하는 점이다. 작은 단서나 용례라도 있으면 쉽게 해결이 될 터인데, 불행히도 그런 자료는 찾아볼 수 없다.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물을 대다’라는 ‘관(灌)’ 자와 촛불이나 촛대를 의미하는 ‘촉(燭)’ 자가 서로 자연스럽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오행에서는 ‘수극화(水克火)’라고 하여 물이 불을 이긴다고 하는데, 이에 따르면 관촉사의 아이콘인 ‘촉(燭)’은 꺼져버리고 만다. 관촉사는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삼고 있는 화엄사찰이어서 본당을 ‘대광명전(大光明殿)’이라 하는데, 그 빛을 물로 꺼버린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자, 이제 어쩔 것인가. 모든 것이 불투명할 때는 꿈보다 해몽이라고 선의로 해석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예전에는 절집을 악지(惡地)에 지어 주위의 사기(邪氣)를 억눌렀다고 하니, 다소 허황스럽다 하더라도 긍정적으로 풀어보기로 하자.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관촉사의 지리적 위치를 우선 고려할 필요가 있다. 차현(車峴) 이남 공주강(公州江) 지역을 조심하라고 한 왕건의 「훈요십조」에 따라 지방 호족을 통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정치적 의도와 함께 곡창지대인 논산평야의 소출을 확보하려는 경제적 요구가 관촉사 창건의 전제이자 목표였다. 그것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농사에 장애가 없어야 할 터인데, 그때 가장 중요한 것이 물이다. 논농사에서 물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이야말로 대단히 중차대한 일이다. 주지를 광종이 직접 임명할 정도로 중요했던 관촉사의 이름에 그러므로 ‘물 댈 관(灌)’ 자를 쓴 것은 자연스럽고도 적절하다. 여기에 왕즉불(王卽佛), 곧 왕이 곧 부처라는 사상을 강조하기 위해 바위가 촛대처럼 땅에서 우뚝 솟아올라 광명을 비추고 있다는 신비한 이야기를 결부시켰음 직한데, 그러므로 ‘촉(燭)’ 자를 내건 것은 대단히 적절했다고 하겠다.


요컨대 ‘관촉사(灌燭寺)’라는 이름은 논산 지역의 경제적인 풍요와 정치적인 안정 및 강화라고 하는 당대의 현실적 요구를 충실히 반영한 명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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