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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반 Apr 26. 2024

다시 떠나려 합니다.


다시 여행을 떠나보려 합니다.


짐을 꾸리는 여행자의 감정이 이제는 꽤 담담해졌습니다. 특별한 용무가 있거나 구경하고 싶은 관광지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다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든 지는 오래되었습니다. 굳이 이유를 대자면, ‘삶이란 것은 끊임없이 떠나는 것이다’라고 둘러대봅니다. 끊임없이 가스를 주입해야만 추락을 면할 수 있는 구멍 난 기구처럼, 우리는 쉼 없이 새로운 에너지를 발견해내야만 얼마간의 삶을 겨우 지탱할 수 있는 고단한 존재가 아닐는지요.


한 달 정도를 오뜨 사부아(Haute Savoie, 프랑스의 알프스 지역)에서 WWOOF를 하며 지낼 것이고, 한 달은 친구들과 함께 또는 혼자서 여행을 할 생각입니다. 이번에는 좀 더 차분하게, 좀 더 찬찬히 오뜨 사부아를 들여다보려 합니다.

WWOOF는 마린니에에 있는 마르틴느네 집에서 좀 더 오래 지내기로 했습니다. 작년에 장과 함께 알프스산에서 베어 왔던 전나무(Sapin)가 적당히 말랐는지, 이번에는 제재공을 불러 그것들을 판자로 만드는 일을 해야 한다고 하네요. 일손이 부족하던 차에 마르틴느는 내가 가겠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좋아하고 있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오는 젊은 커플과 독일에서 오는 마르틴느 친구 부부도 함께 일손을 보탤 거라 합니다.

리용에 사는 에르베의 식구들도 두루 만날 겁니다. 에르베의 어머니 니꼴의 안부도 궁금하고, 제네바에서 일자리를 구했다는 마티유의 근황도 궁금합니다. 무엇보다도 에르베와는 그동안 내가 구상해 온 '알프스 한 달 살기 프로그램'에 대해서 함께 검토해 보기로 했습니다.

이번에도 알프스 트레킹을 자주 하게 될 것 같습니다. 마르틴느와는 이번에 도전해 볼  등산 코스에 대해 이미 얘기를 나누었고, 몽블랑 둘레길의 대피소도 한 곳 예약해 두었습니다. 그 옛날의 목동들처럼, 밤이 되면 더욱 또렷하게 들리는 샘물 소리와, 분주히 왔다 갔다 하는 모든 산들의 신비로운 요정들과, 쉬지 않고 운행하는 별들의 궤적을 숨죽여 엿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또 한 가지 잊지 않고 들러볼 곳이 있습니다. 지난번 여행에서 미뤄두었던 제네바 근처의 드리즈 강둑인데요, 300년 전에 고뇌에 찬 젊은 루소가 배회하던 곳, 제가 존경하는 폴 투르니에의 생가가 있는 곳이지요. 그 벌판에 부는 바람을 가슴으로 느껴보고 싶습니다.


여행의 끝 무렵 10일은 머물 곳도 일정도 아직 계획하지 않고 여백으로 남겨 두었습니다. 여행하는 도중에 또 다른 여행을 꿈꾸게 될지 모르니까요. 아마도 피레네산맥을 혼자 걸어서 넘어가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넘어가는 길들입니다. 그 길 중 하나가 콤포스텔라까지 이어지는, 그 유명한 산티아고 순례길이죠. 한국 사람들이 단체로 다녀가는 바람에 순례길 본연의 모습을 흐리게 한다는 소문을 어느 프랑스 사람으로부터 들은 바가 있어서, 저는 가보기를 주저했던 곳입니다. 순례길은 프랑스에도 여러 갈래의 루트가 있습니다. 그중에서, 제네바에서 시작하여 쀠-앙-블레(Le Puy-en-Velay)를 거쳐 생쟝-피에-드-뽀흐(Saint-Jean-Pied-de-Port)에 이르는 길이 꽤 알려진 루트인데 이 여정에 대해서도 시간을 가지고 좀 더 자세히 알아봐야겠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길인데, 이 길 또한 일주일의 걷기로는 어림도 없는 거리입니다. 다행히 툴루즈에 사는 실비라는 친구가 순례 여행에 조예가 깊어서 그녀에게 조언을 구해 볼 생각입니다. 어느 길이건 간에 완주할 생각은 없습니다. 스탬프를 찍는 것은 더욱 질색입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던, 기어이 끝장을 보겠다는 불도저식 사고에 대한 반감 때문일 겁니다. 저는 오롯이 혼자 걸으며 저만의 기쁨을 발견하고 싶습니다. 혼자 걷는 것과 둘이 걷는 것은 완전히 다른 여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동행자가 있다면, 나의 생각과 감정이 혼자 걸을 때와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흘러갈 것인데, 저는 걷는 동안에 누구로부터도 간섭받거나 신경 쓰고 싶지가 않네요. 최근에 읽어보았던 책, <나는 걷는다(Longue Marche)>의 저자 베르나르 올리비에도 1만 2000 km의 그 멀고 지루한 길을 수년에 걸쳐서 혼자 걸어가더군요. 같이 갈 친구가 없어서 그런 건 아닐 겁니다.


이번 여행 준비를 하면서 야외 수영복을 하나 샀습니다. 작년에 오뜨 사부아의 안시 호수(Lac d’Annecy)나 레만 호수(Lac Leman)에 갔을 때, 직접 몸을 담가 수온을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지중해 해변의 깔랑끄(Calanque, 해안의 만)에서 며칠 보낼 때는 야외 수영복을 준비하지 못한 탓에 그냥 속옷 팬티 차림으로 해변에서 뒹굴었는데 사진을 보니 좀 거시기하더군요.


셀카봉도 하나 샀는데 조금 망설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저는 여행하는 동안 내 사진을 찍을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하거니와 가는 곳마다 자신의 사진을 찍어 대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 행위의 저의에 의심을 품고 있기 때문인데, 제가 글을 쓰다 보니 간혹 기록을 위해 필요한 경우가 있는 것 같아 이번에는 한 번 사용해볼 생각입니다. 알프스의 변덕스러운 날씨에 대비해서 판초 우의도 새로 구입했고, 여럿이 대화할 때 가끔 활용할 생각으로 초소형 이동식 프로젝터도 하나 마련했습니다. 이러다 보니, 줄인다고 해도 살다 보면 어느새 늘어나 있는 세간살이처럼 짐이 더 늘어났습니다. 최소한의 짐꾸리기를 지향한다는 나의 여행 원칙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번에 여행에서는, 지금껏 부지불식간에도 결코 멈춘 적이 없었던 내 심장의 맥박 소리와, 한 번도 주의깊게 주목해보지 못했던 내 들숨과 날숨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보고자 합니다.

터무니없는 상상력과 설렘은 여행자의 특권이겠지요?. 혹시라도…… 알프스가 피워내는 구름들 속에서, 내 능력에 없는 신령한 영감을 감지하게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운이 좋아서 마주친 산양들이나 마모뜨를 숨죽여 관찰하는 동안에, 혹시 내가 그들의 언어를 알아듣게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노년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여행이란...... 오늘도 죽지 않고 살아내야만 하는 고단한 영혼들에게 다가와 한순간도 쉬지 않고 작업을 시도해 대는, 이 모기떼 같은 권태와 불안에 맞서기 위해서, 또는 받아들이기 위해서, 마음의 불쏘시개를 한 줌씩 주워오는 나름 쓸만한 방법이 아닐까요?


이렇게 여행은 진즉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마르틴느네 뒷마당에 쌓아논 판자를 만들 목재. 터미네이터 쟝이 또 뭔가를 지어낼 모양입니다. 이렇게 그들은 모든 것을 직접 합니다. 몇 년에 걸쳐서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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