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들의 소외 극복 방법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대부분의 인간은 일을 해야 한다. 어떤 일을 하는지 형태는 다를지라도 사람들은 매일같이 자신의 직장에 출근하여 노동을 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이렇게 사람들이 매일매일 해야 하는 노동은 정말로 하고 싶고 스스로에게 즐거운 일인가를 되물어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최근 인터넷 사이에서 유행하는 대표적인 어구인 “적게 일하고 많이 버세요” 같은 말들을 보면 노동은 딱히 더 많이 하고 싶은 유쾌한 일은 아니라는 점을 단번에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말에서 알 수 있는 점은 노동은 그저 돈벌이 수단으로 어쩔 수없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을 적게 하고 많이 버는 것이 미덕처럼 우리 사회에서 받아들여진다는 점이다.
어차피 모두가 해야 하는 일이 ‘일’, 즉 ‘노동’이라면 노동은 사람들에게 재미있고 유쾌하게 다가올 수 없는 것일까? 왜 사람들은 이토록 노동을 하기 싫은 일로 여기고 노동을 안 하는 것이 좋다고 볼까?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이 노동자에게 외적이거나 본질적인 속성이 아닌 강요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를 ‘소외’의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소외’라는 단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쓰는, 사람 간의 관계 내 소외의 의미가 아니라 인간들 자신이 만든 것에 의해서 인간이 지배되는 역설적인 상황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포이어바흐는 소외에 대해 논의하면서 절대 이성, 즉 신은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가공의 것이지만, 인간은 스스로가 만들어낸 신에 의해 복종하는 소외 현상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이처럼 포이어바흐는 소외의 논의를 ‘신’에게 적용시켰다면 마르크스는 소외의 논의를 ‘노동’에 적용시켰다. 마르크스는 총 4가지로부터 인간이 소외된다고 보았다. 첫 번째로는 노동생산물, 두 번째는 노동과정, 세 번째는 동료인간, 네 번째는 인간본성으로부터의 소외다.
각각의 항목을 설명하자면
(각각의 항목을 읽으며 컨베이어 벨트가 돌아가는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상상하면 이해가 쉽다.)
첫 번째로 노동생산물로부터의 소외는 노동자의 만들어낸 생산물은 노동자의 것이 아니라 자본가의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노동자가 공장에서 축구공(생산물)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해 보자. 노동자가 만들어낸 축구공(생산물)을 소유하고 처분할 수 있는 것은 노동자가 아닌 자본가이다. 따라서 노동이 노동자에게는 대상이자 외부적인 실재가 된다. 따라서 노동자는 스스로가 노동생산물을 만들었지만 그것을 소유할 수도, 권한을 가지지도 않는다. 다음으로 노동과정으로부터의 소외는 생산과정을 노동자가 통제할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노동자는 노동과정 속에서 어떤 방향으로 일할 것을 요구받고 그에 맞게 통제되기 때문에 노동은 수동적 활동으로 전락한다. 세 번째는 동료 인간으로부터의 소외다. 이는 노동을 하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동료 노동자와의 유의미한 관계를 맺기보다는 지배-피지배의 과정 속에서 동료 노동자와의 관계가 단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은 인간본성으로부터의 소외다. 마르크스는 인간 본성을 ‘유적 존재’로 보았다. ‘유적 존재’인 인간은 노동을 통해 세계를 창조해 나간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노동자에게 노동은 무언가를 창조하는 긍정적인 활동이 아니다. 강요받고 강제받으며 억지로 해야 하는 활동일 뿐이기에 마르크스는 인간 본성으로부터도 소외가 발생한다고 보았다.
마르크스가 제시한 소외는 오래전에 논의된 개념이지만 현재의 상황을 살펴보더라도 크게 다를 것은 없어 보인다. 어떤 직장에서 어떤 일을 일하더라도 보편적으로 사람들은 일을 하는 것을 힘들어하는 경향성을 보인다. (물론 디테일하게 어떤 직장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어떤 일을 하는지에 따라서는 달라질 수 있겠지만, 사회의 큰 풍조만 봤을 때는 그렇다) 그래서 일하면서 ‘빨리 집 가고 싶다’라고 생각하는 직장인이나 퇴사를 꿈꾸는 직장인의 모습이 밈으로 자리 잡은 게 아닐까 싶다.
그런 말이 있다. “주인의식을 가지라 해서 가졌더니, 진짜 주인인 줄 알았다” 이 말이 내포하는 것은 노동자는 결코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아주 러프하게 비유하자면 노동자는 거대한 기계의 부품 중 중 하나로, 지금 아무리 일을 잘하더라도 나중에 쓸모가 없어지면 언제든지 교체될 수 있는 그런 여러 부품 중 하나인 것이다.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열심히 일하더라도 ‘주인’만큼 성과를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더라도 억지로 해야 한다.
이 논리를 보면 아예 노동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그것은 아니다. 마르크스의 소외의 핵심은 ‘자본주의 내’에서의 노동이다. 마르크스는 인간 사회의 변함없는 특징은 노동이며, 인간 본성의 조건으로서 노동을 내세울 만큼 노동이 창조적으로 세상(그리고 자신)을 발전시킨다고 보았다. 하지만 ‘자본주의 내’에서의 노동은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수단이며, 수동적 존재가 된 노동자가 4가지 측면에서 소외를 겪게 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마르크스의 소외는 표현 자체가 강해서 그렇지,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모든 노동자들이 노동을 하면서 겪는 고통이라는 감정의 원인을 잘 분석한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과거보다 현재 노동자들의 노동 처우가 많이 나아졌긴 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일하면서도 노동을 긍정적이지 않은 현상으로 여긴다. 사람들이 일하면서 ‘빨리 집에 가고 싶다’, ‘퇴사하고 싶다’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마르크스가 제시한 소외의 4가지 측면에서 여전히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외를 다루는 사람들의 방법은 시대의 흐름이 변하면서 과거와는 달라졌다. 일반인들의 경우 과거에는 어딘가에 속해서 일하는 직장인이 되는 것이 가장 평범한 방법이었고, 그것 외에는 선택지가 크게 없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SNS가 발전함에 따라 일반인들도 SNS를 통해서 본인을 널리 알릴 수 있게 되었고, 본인의 가치를 어필하여 새로운 경제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래서 최근 들어서 ‘셀프 브랜딩’이라는 단어나 ‘크리에이터’라는 직업이 각광받지 않나 싶다. 대체되지 않기 위하여 본인의 특별한 가치를 발굴하여 셀프 브랜딩을 하고, 또 세상에 없던 새로운 콘텐츠를 만드는 크리에이터가 되는 것이다. 노동하면서 겪는 소외의 4가지 측면들을 사람들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인식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셀프 브랜딩’이나 ‘크리에이터’, ‘n잡러’ 등과 같이 SNS의 발전을 활용해 스스로를 기업으로 만드는 신자유주의적 자아를 형성함으로써 소외에 대응하는 방안으로 사용하고 있는 보인다. 이런 상황을 보며 현대인들이 세상의 변화를 능동적으로 활용하면서 자율성을 높이고,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노동의 과정 속 목적성을 갖고, 동료들과 일체감을 가짐으로써 노동 소외에 대응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