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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빈 youxarthur Mar 17. 2022

윤희에게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

영화 <윤희에게>를 첫 개봉한 2019년 당시에 처음 보고 덮어만 두다가 다시 꺼내 보게 되었다. 두고두고 몇 번을 보고 싶은 영화였지만 쉽사리 손이 가지 않았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다시 들여다봐야 할 때가 와서야 과제처럼. 


처음 이 영화를 보고 느낀 감정은 '눈이 많이 오는 겨울, 일본 삿포로에 꼭 가고 싶다', 'OST의 잔잔하면서도 쿵쿵 울리는 선율이 예쁘다', '내레이션과 구성이 좋다'와 같은 단순한 사유들이었다. 누구나 그냥 이 영화를 본다고 하면 떠올릴 법한 것들. 다시 꺼내 본 <윤희에게>는 사실 조금 더 다르게 와닿았다. 잃어버린 나, 퀴어의 현실, 더 디테일하게는 레즈비언의 현실 같은 것들. 닷페이스를 통해 레즈비언의 삶에 관심을 조금 더 가지게 되었다. 내가 종종 영화로 접하거나 생각하던 그들은 보통 10대거나 20대였다.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깨어 있다고 자부하는 나조차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들도 나이가 들 테고, 그러면 당연히 그 이후의 삶도 있을 테니까. 닷페이스로 접한 그들은 60대 이상의 고령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사회가 그동안 얼마나 철저히 그들을 배제해 왔는가를 느낄 수 있었다. 그 감정들을 고스란히 <윤희에게>의 윤희의 삶에 투영시키니 그제서야 다른 세상이 열렸다. 이것은 단순히 배경 좋고 분위기 좋은 여행 일기 같은, 과거 회상 같은 영화가 아니다. 한 여성의 삶, 대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그간의 일들이 다 과거의 어느 귀퉁이로 처박히고, 문장으로 뱉기보다는 은유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 되어 버린 현재. 우리 사회가 얼마나 폐쇄적인지에 대한 증명과도 같은. 


왜 우리 사회는 기본이 '이성애'일까. 시대에 따라 가치가 변하고, 점차 발전하면서 다양한 가치가 존중받는 사회로 나아가는데, 왜 여전히 우리는 '이성애'적인 사고를 하는 걸까. 어차피 사람이 사람을 좋아한다는 건 사람 대 사람의 감정이지, 성별의 감정이 아닐 텐데. 이런 갇힌 사고 속에 어쩌면 우리는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애써 우정이나 다른 단어로 치환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닷페이스의 비디오 속의 퀴어들은 상대방을 '남자 친구'로 부를 수가 없어 애써 '애인'이라는 단어로 바꿔서 말한다고 했다. 이것도 우리 사회 깊이 자리 잡은 이성애적인 사고가 아닐까. 영화 <윤희에게> 속 윤희는 쥰을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결국 가족들에 의해 정신적인 치료를 받았다고 했다. 윤희가 어떤 심경이었는지, 어떻게 그 삶을 살았는지 자세히 나오지는 않았지만 쥰의 편지를 읽는, 쥰을 보러 가서 숨었던 윤희의 표정과 행동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결코 죄가 아닌데. 


생각은 꼬리를 물고 나아가 같은 퀴어라고 해도 '게이'와 '레즈비언'을 대하는 사고가 얼마나 다른지로 퍼졌다. 업계에서 일을 하다 보면 종종 공공연하게 자신이 게이인 것을 표출하는 사람을 볼 수 있다. 그들의 SNS만 봐도 이미 텍스트로 자아를 내보이고 있고. 반면에 자신이 레즈비언이라고 당당히 말하는 사람은 잘 없다. 물론 몇몇 유튜버가 있기는 하지만 보편적으로 더 생각해 보면 그들은 그렇게 나서지는 않는 것 같다. 성경에서 왜 동성애를 죄악으로 여기는지, 그리고 또 우리 사회가 왜 동성애를 금기하고, 또 여성에게 더 박한 건지 생각해 보면 이 모든 것은 여성은 결혼을 해야 하고, 또 '출산'을 하여야 한다는 억지 의무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닷페이스 속 그들도 강제로 결혼을 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살아야 했던 어떤 이들의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우리 사회가 어떤 사회적 책임과 의무감을 개인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일정 나이가 되면 결혼을 해야 하고, 애를 낳아야 한다는. 그런 의미에서 점차 비혼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1인 가구가 점차 보편화되는 것은 좋은 변화이다. 종종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에게 나이가 들어서도 '혼자 그렇게 살 수 있을 것 같냐, 점점 나이가 들면서 다 결혼하고 애 낳으면 그렇게 지금처럼 사람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와 같은 무례한 말을 뱉는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그것이 아니라고 반박할 수 있는 좋은 변화가 되지 않을까. 혼자 사는 게 뭐 어때서, 나 같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윤희에게>를 보고 사유를 거듭하다 보니 점점 생각의 무게가 무거워진다. 그만큼 이 영화는 간접적으로 표현을 하고 있지만 많은 것을 담고 있다. 그저 흘러가는 잔잔한 영화가 아니라. '성 소수자'의 삶, 거기에 더해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삶, 존중받지 못했던 한 개인의 삶까지. 영화는 여운을 길게 남기는 윤희의 마지막 말로 끝났다. 비로소 밖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게 된 윤희, 이제 가족이 정해 주는 삶이 아닌 스스로가 정하는 삶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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