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관리는 어떻게 창의적 뇌 활동을 돕는가
정말로 메모 상자의 덕을 보려면, 우리는 작업 루틴을 바꾸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메모 상자가 왜, 어떻게 효과가 있는지, 어떻게 다양한 글쓰기 단계와 잘 들어맞는지에 대한 깊은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책, 글 쓰는 인간을 위한 두 번째 뇌 제텔카스텐> 중에서...
지식관리는 단순히 자료 저장소로 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수집하거나 기록으로 남겨둔 자료를 바탕으로 창의적인 아이디어, 관점, 뒷받침하는 근거들을 가지고 더 나은 시작을 할 수 있습니다.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처럼, 시작이 어려운 법입니다. 지식관리를 통해 우리는 한층 더 유리한 출발점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숀 케아렌스는 작업 루틴의 원리와 효과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어야 메모 상자의 진정한 가치를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작업 흐름을 신뢰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이 사용하는 방법에 휘둘리기 쉽죠. 물론, 다른 사람의 방법을 참고하고 적용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근간에는 작업 흐름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어야지, '원리 이해의 부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원리'를 모른다면 금방 무너질 공장을 짓는 셈이니까요.
지식관리는 자료를 찾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뇌 활동을 지원하는 역할을 합니다. 양질의 기억을 만들고 잘 인출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죠. 저는 '기억'이 저장되고 인출되는 메커니즘을 통해 작업 흐름에 대한 많은 영감을 얻었습니다. 이 분야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제가 얻은 통찰을 공유하면서 지식관리 작업 흐름에 필요한 요소가 무엇인지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기억'하면 흔히 '암기'를 떠올리기 쉽습니다. 암기는 곧 저장을 의미하는 것 같지만, 사실 암기가 제대로 되었는지 확인하려면 정보를 불러와 봐야 합니다. 즉, 기억은 정보를 머릿속에 저장하는 과정과 필요할 때 꺼내 쓰는 과정을 모두 포함합니다.[1] '기억력이 좋다'거나 '아는 것이 많다'는 것은 적재적소에 적절한 기억을 인출해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장기기억은 크게 사건에 대한 기억, 정보에 대한 기억, 방법에 대한 기억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2]
먼저 사건에 대한 기억은 특정 장소, 시간, 사건 등이 하나로 묶인 정보를 말합니다. 삶에서 의미 있거나 충격적이었던 순간들은 오래도록 머릿속에 각인되곤 하죠. 저는 28살 때 양손에 커다란 캐리어를, 등에는 검은 백팩을 메고 서울행 KTX에 올랐습니다. 취업과 함께 시작된 서울에서의 독립 생활. 그날 기차 안에서 느꼈던 설렘과 두려움이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다음으로 정보에 대한 기억, 이른바 의미기억은 맥락과 무관하게 저장된 지식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대부분 구구단을 외우고 있지만, 그것을 언제 어떻게 배웠는지까지 기억하지는 못하죠.
마지막으로 방법에 대한 기억, 일명 근육기억이 있습니다. 자전거 타기나 기타 코드 잡기처럼 처음에는 어려워도 일단 익히고 나면 오랫동안 기억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특히 기타의 F코드처럼 여러 줄을 동시에 누르면서 소리를 내야 하는 경우에는 좌절감을 맛보기도 하죠. 하지만 결국 습득하고 나면 더는 의식하지 않고도 몸이 기억해내는 법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뇌의 기억은 정보를 저장하고 인출하는 데이터베이스와 유사해 보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뇌는 저장된 정보를 단순히 꺼내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해석하고 추론합니다. 기억의 범주에 이런 연산 결과까지 포함된다고 할 수 있겠죠.
데이터는 SSD의 블록과 같은 물리적 공간에 저장됩니다. 반면 기억은 특정 신경세포에 고정적으로 저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을 불러올 때마다 뇌에서는 전기적, 화학적 반응이 일어나며 새로운 신경 회로가 형성된다고 합니다.[3] 즉, 기억의 생성과 인출 과정 자체가 뇌의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이죠. 뇌는 일종의 예측 기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기억을 바탕으로 현재를 해석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뇌의 주요 기능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측의 결과물로 새로운 아이디어나 행동 전략 등이 도출되곤 합니다.
양질의 정보가 잘 연결된 지식 네트워크 역시 이와 유사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이전에 소개해드린 키워드 노트는 그 자체로 행동을 제안하거나 미래를 예측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키워드 노트에 담긴 과거의 기록들은 뇌로 하여금 더 다양한 요소를 고려하게 함으로써 합리적 판단과 추론을 가능케 합니다. 풍부한 사고의 재료가 있다면 더 나은 해법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죠.
안타깝게도 뇌의 기억력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쉽게 망각하기도 하고 때로는 왜곡되기도 하죠. 그러나 우리에게는 기억의 인출을 촉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뇌의 작동 원리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이를 잘 활용할 수 있습니다.
먼저, 모든 기억에는 단서가 존재합니다.[4] 어린 시절이 잘 떠오르지 않다가도 오래된 앨범을 펼쳐 들면 그때의 추억이 생생해지곤 합니다. 때로는 오랜만에 만난 유년 시절 친구와의 대화가 잊고 있던 과거를 되살리기도 하죠. 기억 중에는 고립된 채 존재하는 것도 있지만, 여러 기억이 연결되어 덩어리를 이루기도 합니다. 기억의 군집이 클수록 그것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연결고리도 많아지는 셈이죠.
기억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적절한 인출 단서를 마련해 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크게 두 가지 방법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의 기억에 다양한 단서를 연결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내용을 학습할 때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 서로 다른 감각을 자극하는 단서를 만들어 보세요. 밑줄 긋기, 형광펜으로 색칠하기, 마인드맵 그리기, 소리 내어 읽기 등의 방법이 도움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여러 기억을 하나로 묶어 군집을 만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역사를 공부할 때 '1443년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라는 사실에 그치지 않고, 창제 배경, 찬반 논쟁에 참여한 인물들, 그 외 세종대왕의 업적 등을 함께 엮어 학습한다면 더욱 강력한 기억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기억에서 추론된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단서와는 다른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바로 문제의식, 혹은 질문이죠. 좋은 해답을 얻으려면 좋은 질문을 만나야 합니다. 질문의 방향이 어떤 기억을 재료 삼을지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전에 양질의 기억을 많이 축적해 두는 것이 도움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의 깊이를 과소평가하곤 합니다. '인생의 해답은 언제나 내 안에 있었다'라는 말이 있죠. 우리는 대개 해답의 부재가 아니라 질문의 부재로 인해 고민에 빠지는 것 아닐까요.
질문은 우리의 지식과 무지의 경계를 드러냅니다. 이미 알고 있는 바를 토대로 질문을 구성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목표를 재설정하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문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지 격차를 마주하면 뇌는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관련 기억을 총동원합니다. 그 과정에서 창조적 사고가 싹트게 되는 것이죠.
지식관리 전략을 세울 때도 기억 인출의 원리를 활용할 수 있습니다. 핵심은 단서를 마련하고 정보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만드는 것이죠. 이 두 가지 방법을 명확히 구분하긴 어렵지만, 몇 가지 실천적 방안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메모에 태그, 제목, 부제목, 작성일자, 장소 등의 메타데이터를 기입하고, 관련 파일들을 하이퍼링크로 연결하며, 프로젝트별로 폴더를 만들고, 특정 주제에 대해서는 태그나 링크를 활용해 별도의 카테고리로 분류해 두는 것 등이 도움될 수 있습니다.
다만 지식관리 도구를 처음 접하면 폴더와 태그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어떤 메타데이터가 필요할지 등에 대한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저 역시 아직 배우는 단계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방대한 양의 메모를 감당하려면 과정이 단순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꼭 필요한 것 외에는 최소한으로 유지하는 것이 관리 부담을 줄이는 지름길이 될 거예요.
주위를 둘러보면 유용해 보이는 정보 관리 팁들이 넘쳐납니다. 하지만 이것저것 적용하다 보면 정작 핵심인 메모 작성이 더 어려워지는 역설적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추가하는 습관이 혁신을 방해한다"[5]는 말처럼, 남들이 하는 방식을 무작정 따르기보다는 내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되물어야 합니다. 이때 최우선 기준은 언제나 '인출'입니다. 내가 쉽게 꺼내 쓸 수 있는 형태로 정보가 저장되고 있는지, 그것이 가장 중요한 척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지식관리의 궁극적 목표는 단순한 정보의 저장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사고, 나아가 뇌 활동 전반을 지원하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질 높은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풍성한 추론을 가능케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상적인 지식관리의 모습일 거예요.
물론 우리 뇌 속에는 지식관리 시스템에 담기지 않은 방대한 정보가 있습니다. 어떤 기억은 금세 떠오르지만, 또 어떤 기억은 오랫동안 잠들어 있죠. 잊고 있던 깊은 기억을 꺼내 오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질문'입니다. 이 점에서 볼 때 좋은 질문을 만들어내는 것은 지식관리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크게 세 가지 접근법이 있습니다.
먼저 구조화된 질문 세트를 만드는 만들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템플릿이라고 하죠. 주제와 상황에 맞는 질문 세트를 개발하고 정교화해 나가는 거죠. 이는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틀을 만드는 작업이기에 꼼꼼함이 필요합니다. 빠짐없이 구성된 템플릿은 풍부한 사고를 이끌어 내고, 지식의 공백을 파악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다양한 분야와 과제에 맞는 질문 세트를 갖추어 나갈수록 더 많은 일을 타인이나 AI에게 쉽게 위임할수 있습니다. 퍼포먼스는 질문 수준에 비례한다고 생각해요.
두 번째 방법은 지식의 '구멍'을 발견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입니다. 제가 재미있는 영화를 보고 나면 며칠간 그 여운에 휩싸이곤 하는데요. 영화에 대한 기사는 물론 관련 인터뷰까지 모조리 찾아보고, 다른 사람들의 감상평도 꼼꼼히 살펴봅니다. 처음에는 제가 그저 쉽게 빠져드는 성향이라고만 생각했어요. 하지만 시간이 흘러 깨달은 진짜 이유가 있었죠. 로웬스타인이 말한 것처럼, 지식의 공백을 메우려는 욕구 때문이었던 거예요.[6]
지식관리 역시 이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지식의 틈새를 발견하게 만드는 장치를 곳곳에 마련해 두는 거죠. 앞서 언급한 키워드 관계도는 그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념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시각화함으로써 부족한 점을 직관적으로 알아챌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가령 철학자에게는 생각하는 방법과 철학적 문제의식으로 걸러내는 사유 체계의 증축 과정을 배운다. 하지만 한 사람의 이론 체계에 지나치게 함몰되어 편파적 세계관을 생성하지 않도록 또 다른 철학자의 사상적 편력에 비추어보면서 통찰하는 과정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
<책, 책쓰기는 애쓰기다> 중에서...
세 번째는 비판적 사고를 촉진하는 템플릿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자신의 생각을 지지하는 정보에 더 주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를 확증편향이라고 하죠.[7] 이런 편향에서 벗어나려면 반대 의견이나 사실을 의도적으로 찾아보려 노력해야 합니다.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메모 양식에 '반론' 항목을 만들어 두는 것도 좋은 예가 될 수 있어요. 비판적 관점을 견지하면서도 지식의 빈틈을 발견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1] ⎡기억의 뇌과학 080p⎦ 기억한다라는 의미는 형성과 인출을 모두 포함한다.
[2] ⎡기억의 뇌과학 063p⎦ 장기기억 유형 3가지 - 정보, 사건, 방법
[3]⎡� 이토록 뜻밖의 뇌 과학 038⎦기억은 인출 할 때 마다 새로운 신경세포의 조합으로 만들어 진다.
[4] 유튜브 - 뇌를 창의적으로 만들고 싶다면 기억을 많이 하라!-박문호
[5] ⎡브레인스토밍에서벗어나자 153p⎦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는 이유는 추가하는 습관 때문이다.
[6]⎡� 스틱 20⎦공백 이론
[7]⎡� 글 쓰는 인간을 위한 두 번째 뇌 제텔카스텐 124p⎦확증편향, 반증적 주장과 사실은 의도적으로 수집하려해야 한다.
기억의 특징을 살펴보면서 뇌 활동을 자극하는 지식관리가 갖추어야 할 요소에 대해 알아 보았습니다. 기억 인출을 돕는 단서를 제공하고, 잊고 잇던 먼 기억들을 연결해주고, 사고를 자극하는 질문을 발견하는 것이 핵심이죠.
어떤 메모들이 있어야 이런 역할을 하는데 도움이 될 까요? 다음글은 무엇을 메모해야 하는지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