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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민 Mar 30. 2023

나의 신랑, 나의 신부를 소개합니다

결혼식에서

2022년 12월 11일 결혼식에서 /사진=지앤느
배경음악으로 사용한 I Believe (My Sassy Girl OST) - Instrumental

나의 신랑 우정석을 소개합니다.


 정석이는 잘생겼어요. 저는 우면산에서 정석이를 처음 봤을 때 첫눈에 반했어요. 빡빡머리를 한 채 차분한 표정과 말투로 이야기하는 정석이의 은은한 분위기가 제 마음을 가져갔어요. 혹시 제 얘기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신다면, 그건 아마 지금 정석이가 그때보다 15킬로나 더 쪘기 때문일 거예요.

 

 정석이의 호감 사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어요. 돈과 명예, 권력만 있으면 됐거든요. 저는 재력을 과시하려고 모임 홈파티를 빌미로 정석이를 집으로 불러들였어요. 그날 정석이는 남산타워와 서초구 전경이 보이는 저희 집 야경을 감상했죠. 비록 화장실 정도만 제 것인 전셋집이지만, 정석이가 그 사실까지 알 필요는 없었어요. 정석이가 저희 집에 다녀가고 며칠 뒤 저희 집 침대에서 눈을 뜨는 꿈을 꿨다고 하니, 제 전략이 성공적이었던 것 같아요.


 평범한 직장인인 저는 사회에서 별 다른 권력과 명예가 없지만, 정석이와 만난 통로인 제 모임에선 6년 넘게 독재를 이어가고 있는 권력자예요. 겨우 강남 일대 최대 규모 스터디 모임의 모임장일 뿐이지만, 정석이는 모임장의 남자친구를 꽤 명예로운 자리로 생각하고 있어요.

      

 정석이는 불교 수행자예요. 매일 명상을 하고 스님들의 법문을 들어요. 종종 명상을 하겠다며 누워서는 5분도 지나지 않아 코를 골아요. 그렇게 2시간을 숙면하다가 일어나서는 태연하게 명상이 좋았다고 해요. 불교 수행자들은 탐욕을 독으로 여긴다는데, 저는 정석이처럼 잘 마시고 잘 먹고 잘 자는 사람을 본 적이 별로 없어요.

      

 정석이는 춤을 잘 춰요. 입장할 때 보셨으니 아시죠. 정석이는 제 앞에서 늘 춤을 춰서 제게 웃음을 줘요. 혼자 보기 아까웠는데, 마침 정석이가 자기 춤 실력을 여러분께 보여드리고 싶다고 해서 말리지 않았어요.

      

 정석이를 만난 뒤 저는 웃는 상이 됐어요. 예전에는 가만히 있어도 화났냐는 말을 자주 들었는데, 최근엔 인상이 좋아졌단 이야기를 들어요. 살이 올라서 짱구를 연상시키는 정석이의 볼살을 주무를 때, 명상한다면서 어느새 코를 고는 정석이를 바라볼 때, 택견인지 춤인지 헷갈리는 정석이의 춤을 감상할 때 저는 완전함을 느껴요. 365일, 24시간을 늘 기쁘고 신나게 지내고 싶다고 집착하던 저는 정석이와 함께한 뒤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요. 세상을 다 가진 느낌이 아닌 세상을 다 가질 필요가 없다는 느낌이라면 와닿으실까요.   

   

 저의 행복을 응원해 주시던 분들께 제가 정석이를 만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행복해졌다는 소식을 전하고 싶었어요. 긴 이야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정석이한테 마이크를 넘길게요. 




나의 신부 이영민을 소개합니다. 


 이름 이영민, 나이 만 32세.     

영민이는 89년생으로, 94년생인 저보다 나이가 다섯 살 많아요.

영민이는 "거짓말"이라는 노래제목을 들으면, 아이돌 그룹 지오디가 생각난대요.

저는 "거짓말"이라는 노래 제목을 들으면 그룹 빅뱅이 생각나거든요.

우리의 세대차이는 지오디와 빅뱅 정도로, 그렇게 멀지만은 않아요.

국제보건기구 WHO에 의하면, 여성의 평균수명이 남성의 평균수명보다 7년 정도 길다고 해요.

평균수명으로 따지면 영민이가 저보다 2년 정도 더 살 확률이 높은 거지요.

그래서 딱 괜찮은 것 같아요.

     

 영민이는 머리가 엄청 좋아요. 참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이에요.

너무 머리가 좋아서 원하는 대학에 가고, 전공도 3개나 했답니다. 

철학, 사회학, 심리학. 부전공으로 경제학까지.

정말 대단하죠?

이렇게 머리가 좋은 영민이 인데... 가만 보면... 그 좋은 머리를 잘 안 써요.

하루동안 하는 생각이라곤, 점심에 뭐 먹지? 퇴근하고 뭐 하고 놀지? 이 정도예요.

정말 속 편한 삶을 사는 사람이랍니다.

덕분에 별의별 생각이 많은 저도 영민이랑 있으면 덩달아 마음이 편안해져요.

저도 영민이와 함께 세상사에 무심한 마음으로 편안하게 살도록 하겠습니다. 

   

 저에게는 남들에게 잘 얘기하지 않는 꿈이 하나 있어요.

그 꿈에 대해 잘 얘기하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은 보통 그 꿈에 대해 들으면, 우습게 생각해요. 

제가 철이 덜 들었다거나, 너무 낭만적이고 비현실적이라고 얘기해요. 

제 꿈이 뭐냐면, 저는 부처님, 예수님, 소크라테스, 공자, 노자 같은 성인군자가 되는 것이 꿈이에요. 영어로 Saint라고 하죠.     

제가 영민이와 연애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이 꿈에 대해 얘기했어요.

"있잖아, 내 꿈은 부처님, 예수님, 소크라테스, 공자, 노자 같은 성인이 되는 거야." 조금 불안했어요. 영민이도 내가 철이 없다고 생각할까? 내 꿈이 우습다고 생각할까?

근데 영민이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저에게 이렇게 말해주었어요.

"잘됐다. 내 고등학교 꿈도 위대한 성인이 되는 거였는데. 나도 너랑 같이 saint 되면 되겠다."     

영민이가 이렇게 말해줄 때, 꼭 잃어버린 가족을 되찾은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생각했어요. 이 사람이랑 결혼해야겠다.

성인군자가 되고 싶다는 저에게 같이 성인군자가 되자고 말해주는 사람...     

그 사람이 이영민. 제 신부랍니다.

이상으로 제 신부 이영민에 대한 소개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 2022년 12월 11일 결혼식에서 -


 

결혼을 준비하며 가장 신경 쓴 부분이 '재미'였다.

귀한 주말 시간을 내서 먼 길 와주는 하객들이 결혼식을 보며 즐거웠으면 좋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유쾌한 신랑 신부 입장과 신나는 축가를 준비했지만 뭔가 부족했다. 

혼인서약서 순서까지 없애버리니 결혼식이 너무 허전해 보였다.


결혼식 2주일 전까지 고민하다가 대책이 떠올랐다.

결혼식 주인공들 소개. 

결혼하는 지인의 배우자를 잘 모른 채 축하해 줬던 수많은 결혼식들에서 느꼈던 아쉬움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 아이디어와 동시에 영화 '엽기적인 그녀'에서 차태현이 임호에게 전지현에 대해 이야기해 주는 장면이 떠올랐다. 배경 음악으로 'I Believe'를 깔고 아련한 말투로 소개하면 재밌지 않을까.


소개글을 쓰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 어떻게 쓸지 얘기를 조금 나눈 뒤 각자 노트북 앞에 앉아 단숨에 써냈다. 

칭찬인 듯 흉인듯한 소개글 낭독 연습을 하며 하객들이 많이 웃어주길 고대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결혼식은 신랑 입장부터 신랑신부 퇴장까지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식이 끝난 뒤 많은 지인들이 "감동했다" "역대급 흥겨운 결혼식" "웃음과 눈물이 함께 한 결혼식은 처음"이라는 후기를 전했다. 드레스 도우미님도 결혼식이 너무 재밌다며 "너무 많은 결혼식을 봐서 잘 기억에 안 남는데 오늘 결혼식은 기억에 남을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자녀를 데리고 온 한 교수님은 정석이에게 "아이에게 새로운 관점의 결혼식을 보여줄 수 있게 해 줘서 고맙다"고 문자 했다고 한다.  

 

결혼식에 대한 어떤 환상이나 계획도 없었지만,  

하기 싫었던 것들을 빼고 하고 싶은 이야기만 담았더니 가장 우리 다운 결혼식으로 만들 수 있었다.


결혼을 앞둔 많은 분들에게 '나의 신랑, 신부를 소개합니다' 코너를 해보시길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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