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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이 Nov 27. 2023

헌 옷



늦은 점심을 먹고 모처럼 사색에 잠겼다.


쇠꼬챙이 하나가 불현듯 머리를 관통하는 듯한 날카로운 아픔이 느껴져

왼쪽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그러다 문득,

새 옷이 헌 옷이 되는 과정에 대해 생각했다.



택을 땔 때 설레는 마음,

소중하게 아껴입는 마음,

주름이라도 질까 매번 다려 입는 마음,

뭐가 묻거나 올이라도 나가면

하루종일 기분이 안 좋아질 정도로 신경 쓰이는 마음,

걸려있는 것만 봐도 기분이 좋은,

그런 새 옷을 대하는 마음.




옷은 실제로 낡아서 낡은 게 아니라

입지 않는 순간 헌 옷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 옷이 얼마나 낡았는지와 상관없이

옷장에 처박힌 채

멀쩡히 낡아가는 내 헌 옷들.

아니 새 옷들,


헌 옷이 되어가는 멀쩡한 내 새 옷들.








이런 마음일까.


더 이상 손이 가지 않는

멀쩡한 내 새 옷들처럼,

멀쩡한 채 낡아가는 내 헌 옷처럼,


처음의 생기를 잃은 마음이

멀쩡히 닳고 닳는 과정.


더 이상 돌볼 여력이 없는 마음.



그렇게

아직 멀쩡하지만,

놓아버린 채 방치하는 마음.


헌 옷이라기엔 아직도 너무 새것이지만

흥미를 잃어 손길이 가지 않는

새롭지 않은 새 옷처럼,


새것이라기엔 이미 흥미를 잃어버린

나의 이 마음.



낡아버린 새 마음.



새 옷은 방치하는 순간 헌 옷이 되어버리는 거야.



마음도 똑같아.

따끈따끈한 마음도 방치하면 차갑게 식어버려.


나는 그걸 몰랐어.

미처 몰랐어.


아니, 사실 알았어.

사실 나는 다 알고 있었어.


미안,

미안해.







더 이상 손이 가지 않아 자리만 차지하는

멀쩡한 헌 옷들을 옷장에서 일제히 꺼내어 정리하면서,


나는 어쩔 도리없이 식어버린

유효기한이 지난 마음도 함께 정리하였다.


박스에 처박아두면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르게

까맣게 잊어버리게 되는 옷들처럼

내 마음 속 공간에서 몰아내면,

자리를 잃은 마음들은 원래 없던 것처럼

사라져버릴거야.

꺼내어 볼 수 없게, 치워 버리자.


그렇게 헌 옷을 정리하듯

마음을 정리했다.







헌 옷이 있던 자리엔

언젠가 헌 옷이 될, 결국엔 되고 말,

새 옷이 자리를 채웠다.



나는 새로운 마음으로

마음 속 빈 자리를 채우려 했지만,



한동안 그 곳을 비워 두기로 했다.


낡았지만 손이 자주가는 편안한 옷처럼

익숙하고 편안한 마음만,

그런 마음만 남겨둔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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