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재이 Dec 05. 2023

무의미한 대화의 의미



여보세요

-뭐해

청소

-또?

또는 무슨. 근데 번호가 왜 이래.

-폰 바꾸면서 같이 바꿨어. 기자 다 됐네, 모르는 번호로 오는 전화도 받고.

안 받어 원래.

(나는 처음 보는 번호로 온 전화를 받은 이유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

-우리 6년 전에 같이 갔던 서촌에 독립서점 있잖아. 거기 없어졌더라?

그게 6년이나 됐나.

(나는 책상을 치우며 대충 대답한다)

-어, 거기 위스키도 팔고 좋았는데. 엽서도 팔고 예쁜 컵도 팔고 책도 팔고 술도 팔던 곳.

위스키?

(내가 위스키를 마셨을 리가 없다, 그것도 6년 전에)

-어

칵테일이 아니라?

-아, 칵테일인가

그럴걸

-근데 하나도 안 아쉬워하네

요즘 독립서점 안 가서.

-그럼 책 어디서 사?

교보

-광화문?

응, 광화문. 어 아니, 아무 교보.

-아무 교보?

응 아무 교보. 아님 걍 알라딘.

-알라딘... 나 저저번주엔가. 종각 영풍에서 너 봤는데

아 진짜? 왜 아는 척 안 했어

-엄청 심각한 얼굴로 겁나 두꺼운 책 읽고 있던데

(그게 무슨 책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 아는 척 하지.

-방해될 거 같아서 그냥 갔어. 카키색 코트 너 맞지

(내 옷이 맞다)

-그때 너 일행도 있었을 걸

아.

(너는 내 일행이 누군지 굳이 묻지 않는다)

-서울 참 넓고도 좁아. 우리 우연히 마주친 게 벌써 몇 번짼지

그러게

-한 8번되나

(몇 번인지 나는 모른다)

그거야 네가 나 따라다니니까 그렇지

-미친. 요즘도 운동해?

-무슨 운동?

크로스핏

-안 힘들어?

힘들어

-골프는?

것도 해

-재밌어?

재미없어

-테니스는?

안 해

-왜

손목 아파서

-나랑 필라테스 같이 다니는 거 어때?

갑자기 무슨

-너 5년 전인가, 한창 다니지 않았었나

그랬지

-근데 남자한테도 좋다더라고.

그렇긴 하지

-같이 하는 거 생각해 봐

흠...

(난 필라테스를 할 생각이 없다)

-요즘 뭐 읽어

쇼펜하우어

-또?

또 뭐... 그냥 재미없는 책들, 그리고 카를로 로벨리 신작 하나.

-아니, 쇼펜하우어를 또 읽냐구

응, 요즘 다시 읽어

-재밌나

재밌어

-너 글은 정해놓고 써, 아님 그냥 그때그때 쓰고 싶을 때 써?

그냥 쓰고싶을 때

-요일 정해놓고 써 봐

싫어

-왜

의무감 들면 흥미가 떨어져

-그렇긴 하지

그럼 재미 없어지고 즐길 수가 없잖아

-그건 또 맞지. 아참, 서촌에 그 카페는 그대로 있더라?

글쿠나

-뭐야, 이 시큰둥한 반응은

나 요즘 커피 안 마셔

-끊었어?

-왜?

잠을 못 자서

-왜

그냥 그럴 만한 일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좀 그래

(너는 무슨일인지 묻지 않는다. 묻지 않을 걸 예상했지만, 정말 그래주는 네가 나는 퍽 고맙다)

-큰일이네

큰일은 아냐

-명상같은 거 해 봐

안그래도 매일 해

-그 사람은?

잘 지내

-그래?

잘 지내...겠지? 사실 몰라

-그렇겠지, 너는

나? 잘 지내겠지?

-나는 모르지

나도 사실 몰라

-이럴수도 있고 저럴수도 있지

그치

-이렇기도 하고 저렇기도 하지

그렇지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다 알 것 같았다)

-근데 계속 단답만 한다, 너

아 청소중이라, 이따 청소 다 끝나고 전화할까?

-아니 그냥 해. 이따가 안 할거잖아

(들켰다)

음, 아참 그 어플 론칭한 거 봤어. 회사 다니면서 바빴을텐데, 언제 또 그런 걸 다 했대?

-오 이제서야 질문을?

질문은 아냐

-그럼 뭐야

감탄?

-하,

하라니

-하.....

(우당탕투쿵앋나아당캉당)

-뭐야, 청소 격렬하게 하나 봐? 뭐 다 무너지는 소리나는데, 뭘 떨어 뜨린거야.

아, 책. 아 잠깐만.

(2차 우당탕투쿵앋나아당캉당)

-다 뿌셔라, 다 뿌셔.

아악 안돼

-담주에 뭐해

바빠

-그 담주는

서울에 없어

-그 담주는

한국에 없어

-미친, 왜 이렇게 바쁜 척이야?

실제로 바빠

-왜

연말이니까

-1월에는

1월도 바빠

-왜

연초니까

-하

-커피를, 아, 커피 끊었댔지

응, 하 청소 다했다

-빨리 끝냈네

이제 씻고 잘거야

-일찍 잠들 수 있길, 바랄게

응, 끊어


나는 약속이 잡힐 틈을 두지 않고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무의미한 얘기만 줄줄 한 것 같은데, 끊고나서 통화 내용을 되짚어보니 나의 1년이 요약된 것 같아 허무하고도 우스웠다.






매거진의 이전글 헌 옷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