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세요
-뭐해
청소
-또?
또는 무슨. 근데 번호가 왜 이래.
-폰 바꾸면서 같이 바꿨어. 기자 다 됐네, 모르는 번호로 오는 전화도 받고.
안 받어 원래.
(나는 처음 보는 번호로 온 전화를 받은 이유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
-우리 6년 전에 같이 갔던 서촌에 독립서점 있잖아. 거기 없어졌더라?
그게 6년이나 됐나.
(나는 책상을 치우며 대충 대답한다)
-어, 거기 위스키도 팔고 좋았는데. 엽서도 팔고 예쁜 컵도 팔고 책도 팔고 술도 팔던 곳.
위스키?
(내가 위스키를 마셨을 리가 없다, 그것도 6년 전에)
-어
칵테일이 아니라?
-아, 칵테일인가
그럴걸
-근데 하나도 안 아쉬워하네
요즘 독립서점 안 가서.
-그럼 책 어디서 사?
교보
-광화문?
응, 광화문. 어 아니, 아무 교보.
-아무 교보?
응 아무 교보. 아님 걍 알라딘.
-알라딘... 나 저저번주엔가. 종각 영풍에서 너 봤는데
아 진짜? 왜 아는 척 안 했어
-엄청 심각한 얼굴로 겁나 두꺼운 책 읽고 있던데
(그게 무슨 책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 아는 척 하지.
-방해될 거 같아서 그냥 갔어. 카키색 코트 너 맞지
(내 옷이 맞다)
응
-그때 너 일행도 있었을 걸
아.
(너는 내 일행이 누군지 굳이 묻지 않는다)
-서울 참 넓고도 좁아. 우리 우연히 마주친 게 벌써 몇 번짼지
그러게
-한 8번되나
(몇 번인지 나는 모른다)
그거야 네가 나 따라다니니까 그렇지
-미친. 요즘도 운동해?
응
-무슨 운동?
크로스핏
-안 힘들어?
힘들어
-골프는?
것도 해
-재밌어?
재미없어
-테니스는?
안 해
-왜
손목 아파서
-나랑 필라테스 같이 다니는 거 어때?
갑자기 무슨
-너 5년 전인가, 한창 다니지 않았었나
그랬지
-근데 남자한테도 좋다더라고.
그렇긴 하지
-같이 하는 거 생각해 봐
흠...
(난 필라테스를 할 생각이 없다)
-요즘 뭐 읽어
쇼펜하우어
-또?
또 뭐... 그냥 재미없는 책들, 그리고 카를로 로벨리 신작 하나.
-아니, 쇼펜하우어를 또 읽냐구
응, 요즘 다시 읽어
-재밌나
재밌어
-너 글은 정해놓고 써, 아님 그냥 그때그때 쓰고 싶을 때 써?
그냥 쓰고싶을 때
-요일 정해놓고 써 봐
싫어
-왜
의무감 들면 흥미가 떨어져
-그렇긴 하지
그럼 재미 없어지고 즐길 수가 없잖아
-그건 또 맞지. 아참, 서촌에 그 카페는 그대로 있더라?
글쿠나
-뭐야, 이 시큰둥한 반응은
나 요즘 커피 안 마셔
-끊었어?
응
-왜?
잠을 못 자서
-왜
그냥 그럴 만한 일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좀 그래
(너는 무슨일인지 묻지 않는다. 묻지 않을 걸 예상했지만, 정말 그래주는 네가 나는 퍽 고맙다)
-큰일이네
큰일은 아냐
-명상같은 거 해 봐
안그래도 매일 해
-그 사람은?
잘 지내
-그래?
잘 지내...겠지? 사실 몰라
-그렇겠지, 너는
나? 잘 지내겠지?
-나는 모르지
나도 사실 몰라
-이럴수도 있고 저럴수도 있지
그치
-이렇기도 하고 저렇기도 하지
그렇지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다 알 것 같았다)
-근데 계속 단답만 한다, 너
아 청소중이라, 이따 청소 다 끝나고 전화할까?
-아니 그냥 해. 이따가 안 할거잖아
(들켰다)
음, 아참 그 어플 론칭한 거 봤어. 회사 다니면서 바빴을텐데, 언제 또 그런 걸 다 했대?
-오 이제서야 질문을?
질문은 아냐
-그럼 뭐야
감탄?
-하,
하라니
-하.....
(우당탕투쿵앋나아당캉당)
-뭐야, 청소 격렬하게 하나 봐? 뭐 다 무너지는 소리나는데, 뭘 떨어 뜨린거야.
아, 책. 아 잠깐만.
(2차 우당탕투쿵앋나아당캉당)
-다 뿌셔라, 다 뿌셔.
아악 안돼
-담주에 뭐해
바빠
-그 담주는
서울에 없어
-그 담주는
한국에 없어
-미친, 왜 이렇게 바쁜 척이야?
실제로 바빠
-왜
연말이니까
-1월에는
1월도 바빠
-왜
연초니까
-하
왜
-커피를, 아, 커피 끊었댔지
응, 하 청소 다했다
-빨리 끝냈네
이제 씻고 잘거야
-일찍 잠들 수 있길, 바랄게
응, 끊어
나는 약속이 잡힐 틈을 두지 않고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무의미한 얘기만 줄줄 한 것 같은데, 끊고나서 통화 내용을 되짚어보니 나의 1년이 요약된 것 같아 허무하고도 우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