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연표류자 Feb 23. 2024

어젯밤 나는 중학생이 되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 해도, 그때를 다시 살 수 있다 해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중학교 시절을 다시 보내기를 택했다. 무엇이 나를 그 길로 이끌었는지는 모른다. 중학교도 졸업하고, 고등학교도 졸업하고, 이제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던 내가 어째서 갑자기 중학생이 되었을까. 무엇이 그리워서, 무엇이 알고 싶어서 지금을 버리고 그 시절을 택했을까. 알 수 없는 것투성이지만 일단 내게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내 손으로 버린 것은 영영 돌이킬 수 없음을 알기에.


그럼에도 내가 놓친 무엇이, 영영 다시 만날 수 없는 무엇이 여전히 이 마음 안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나를 불편하게 한다.


교복을 차려 입고 교실 문을 밀었다. 과외 학생 또래로 보이는 어린 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똑같은 자세로 교실에 앉아 있다. 아무도 웃거나 수군대지 않는다. 날 비웃지 않는 아이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별다른 인사 없이 복도 창가 쪽 빈 자리로 가서 앉는다. 빗자루와 쓰레받기가 들어 있는 청소 도구함 바로 옆자리다. 안에서 새어나오는 퀴퀴한 먼지 때문에 목이 따가워지는 것 같다.


내 책상에 뭔가 비스듬히 기대어져 있다. 목재 사물함에서 떨어져 나온 것 같은 커다란 검붉은색 판때기다. 제대로 된 칸막이도 아닌 것이 밉게 생겼다. 그게 아이들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 그 덕에 내 옆자리에 누가 앉아 있는지, 또 어느 누가 나를 보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누구의 시선도 받지 않는 상태가 지속되기를 바라고 있을 때, 담임선생님께서 내 이름을 부르신다. 내가 앞으로 매일 주번을 맡아주면 좋겠다고 하신다. 나는 생각한다, 원래도 주번이 있었던 건가. 선생님은 청소 도구함을 열고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꺼내시더니 그걸로 어떻게 교실을 청소해야 하는지 시범을 보이신다. 이 정도는 할 수 있지, 나는 안심한다.


그러다가 교실 앞뒤에 있는 쓰레기통 두 개를 가리키시면서, 매일 종례가 끝나면 소각장으로 가서 그걸 비워오라고 하신다. 정말 이걸 다 혼자 하라는 건가. 나는 망설이다 용기를 내어 묻는다. 선생님, 옛날에 제가 이 학교를 다닐 때는 주번 말고 쓰레기 버리는 사람이 따로 있었는데요. 그래도 제가 주번이니까 이것까지 해야 할까요? 왠지 모르게 익숙한 얼굴의 선생님은 말이 없으시다.


내가 정말 이 학교를 다닐 수 있을까. 선생님은 나에게 이렇게나 많은 걸 요구하시는데, 내가 그걸 피해갈 방도가 없다면. 시간을 되돌린 대가가 이런 건가. 아니, 시간을 되돌렸다면 이 몸이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내가 중학생의 몸이었더라면, 내가 시간을 되돌렸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게 할 수 있었더라면 선생님은 나에게 주번 일을 시키지 않으셨을 텐데. 그냥 중학생의 몸으로 다시 살 수는 없는 건가. 내가 바란 건 이런 게 아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생각은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자리를 벗어나려 교실 앞문을 밀고 나와버린다. 그 자리를 벗어나더라도 시간을 되돌리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데, 나는 멍청해서 그걸 모른다. 계단을 밟아 위층으로 올라간다.


위층에는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가 있다. 처음 보는 교실 표찰들이 시선을 끈다. 나는 이제 막 중학교 2학년이 되었으니 여기에서 꼬박 2년을 더 공부해야 거기서 공부할 수 있다. 나는 여기서 좋은 성적을 받아서 그 고등학교에 원서를 내고 거기서 면접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기필코 합격할 것이다. 내가 그 학교에 떨어지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래야 내 과거를 다시 살 수 있으니까. 시간을 되돌려 여기까지 온 나의 결정이 물거품이 되게 할 수는 없으니까. 간절한 마음으로, 누가 날 발견하고 쫓아오기 전에 걸음을 서두른다.


1학년 교실이 쭉 들어선 복도를 따라 걷다가 생각한다. 그래, 난 졸업생이니까 어쩌면 이 고등학교에서 그냥 수업을 들어도 되지 않을까. 교실 뒷문에 난 작은 유리창 앞에서 까치발을 한다. 선생님이 칠판에 쓰시는 글씨를 본다. 다 내가 배운 적 있는 것들이다. 이미 다 공부한 거니까 바로 고등학교로 가도 괜찮을 거야. 그 믿음을 확인하려고 교실의 문을 벌컥 열어버린다.


문을 열자마자 모든 아이들이 일제히 몸을 돌려 나를 응시한다. 그 모든 눈들이 나의 얼굴을 향하는 것을 느끼자 두 동공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동공을 압도하는 눈들로부터 시선을 돌려, 눈들을 둘러싼 얼굴들을 본다. 아, 내가 잘 아는 고등학교 친구들이다. 그러나 반가운 마음을 드러낼 수 없다. 그 아이들은 나를 모른다. 내가 미래에서 온 건가. 아니다, 그냥 날 모른 척하는 것일 수도 있다. 상관없다. 아무렇지 않은 척 맨 뒷 자리에 앉는다.


칠판을 올려다보니 아까와는 다르게 내가 잘 모르는 스페인어 단어들이 가득하다. 화면에는 스페인어로 쓰인 교과서 연습 문제 하나가 띄워져 있다. 선생님께서 무어라고 나에게 말을 거시는데 잘 들리지 않는다.


나는 어디서 났는지 모르는 스페인어 교재를 펼친다. 화면과 똑같은 페이지를 찾아 교재를 펼친다. 문제를 풀려고 샤프를 드는데, 문제 몇 개가 이미 풀어져 있다. 과거의 내가 써둔 것 같다. 내 글씨체가 아닌 것 같기도 한데, 고등학교 때 내 글씨체가 이랬었나.


스페인어 수업이 끝나고 다시 두 층을 내려가 교무실로 간다. 교무실 자리 배치가 내가 기억하는 중학교 시절과 똑같았다. 어렵지 않게 교무실 맨 구석에 위치한 담임선생님 자리를 찾아갔다.


선생님은 시간을 되돌리기 전의 내가 누구인지 알고 계셨다. 내가 고등학교에 갔던 것도, 대학교에 갔던 것도,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어쩌다 지금으로 오게 된 것도, 다 알고 계셨다. 선생님만큼은 나를 이해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고등학교 1학년으로 학년을 옮기고 싶다고 정중히 말씀드렸다. 비겁한 거 알지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요, 저 후회해요. 다시 대학 다니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때가 더 행복했거든요.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되돌아갈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학년만이라도 옮기게 해주시면 안 될까요?


내 말에 답하는 대신, 선생님이 물어보셨다. 교복은 입었니? 친근한 듯, 무시하는 듯. 선생님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유지하셨다. 예상 못 한 차가움에 몸이 경직되었다.


나는 검은 가디건 속에 감춰둔 교복을 끄집어 꺼내보였다. 가디건 목 부분을 당겨 안쪽을 보이자 빳빳한 와이셔츠 위에 입은 회색 조끼가 드러났다. 왼쪽 가슴 위에는 세 개의 각진 산봉우리 아래에 '삼각산'이라는 자수가 굵게 박혀 있었다.


교복 위에 대여섯 개의 단추를 빠짐 없이 잠근 가디건이 입혀져 있는 내 몸을 보며 생각했다. 나는 내 교복이 부끄러웠구나. 성인의 몸으로 기어이 중학생이 되기를 택한 나를 숨기고 싶었구나.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했던 스물다섯 살의 어리석은 마음을 숨기고 싶었구나. 그 부끄러움을 부끄러워하면서도, 나는 끝까지 그 검은 가디건의 단추를 한 개도 풀지 않았다.


지그시 눈을 뜨고 잠시 천장을 보았다. 내가 겪은 모든 것이 꿈이었음을 깨닫는 데는 수 초가 걸렸다. 깨닫자마자 소리 내어 울먹였다. 잠이 덜 깨어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바싹 마른 입을 닫고 다시 천장을 바라볼 때 조용히 눈물이 흘러 베갯잇이 축축해졌다. 그렇게 눈을 뜬 채로, 눈물이 흐를 때마다 질끈 감고 눈물을 짜내며 십 분쯤 흘려보내니 알람이 울렸다.


자그마치 10년 전이다. 중학교 때, 그러니까 15살 때, 나는 대체로 고통받았고 아주 가끔 행복했다. 고통 속에 살았던 그 시기를 그리워했던 걸까. 꿈 속의 나는 왜 그때를 다시 살고 싶어했을까. 왜 하필 그때를 택한 걸까. 기억하고 싶은 것이라도 있었나. 방금 전 꿈에 내가 기억해내지 못하는 조각이 있을 것 같아 하나라도 더 기억해내려 애썼지만, 애석하게도 내가 그 시절을 택한 이유는 기억 나지 않았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당신은 언제로 가고 싶은가요, 라는 질문에 답해본 적이 없었다.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썩 마음에 들지 않기는 해도 지금이 가장 좋다고, 언제나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던 것 같다.


간밤의 꿈은 나에게 시간을 되돌리지 않을 이유를 하나 더해 주었다. 시간을 되돌리기로 결심하는 순간부터 나는 내가 무엇이 될지 알 수 없다. 아마 그 순간부터 나는 나 아닌 존재가 될 것이다. 원래의 나를 기억하면서, 돌아간 그 시간에서 달라지는 것들을 목도하면서, 한동안은 그 변화들을 부정하면서, 그럼에도 언젠가는 내가 그때의 내가 아닌 존재가 되었음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꿈 속의 나는 선생님께서 시키신 주번 일을 끝내 해냈을까? 중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을까? 졸업한 후에는 어떤 고등학교를 다니고, 어떤 대학교에 가고, 어디에서 살고, 어떤 사람들을 만났을까? 중학교 시절이 그리워 그때로 돌아가버린 그는 나와 다른 삶을 산다. 취미도, 가치관도, 이상형도, 좋아하는 음식과 좋아하는 음악까지도, 나와 다른 사람이다. 나는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하나도 알 수가 없다.


나는 살아오면서 많은 것들을 운에 의존했다.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고,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사람들을 만난 것. 모든 건 그저 운이 따랐기에 가능했다. 죽을 만큼 힘들었던 순간조차, 세상이 날 버린 것 같았던 순간조차 나의 일부가 되었다. 지독한 고통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단단한 나도 없었을 게 분명하다. 생각할수록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그 소중한 것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 삶이 소중해졌다. 나는 그 많은 것들을 하나도 잃고 싶지 않다. 그래서 누가 내게 기억 속 행복했던 어느 시절을 다시 살 수 있다고 달콤히 속삭여와도 그때로 돌아가는 선택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보다 더 행복해질 수 있다 해도, 또 어떤 아픔은 사라진다 해도, 내가 가진 것을 언제 어떻게 앗아갈지 모를 그 선택을 나는 하지 않겠다.


나는 언제나 지금의 내가 가진 소중한 것들을 지키는 선택을 하며, 미래의 나에게 소중해질 미지의 것을 찾아다니는 재미로 산다. 앞으로도 딱 이 마음으로 살아가려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를 바꾸는 기록의 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