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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밥 짓는 타자기 May 13. 2024

기계식 키보드를 샀다.

기부니템은 굉장해

 기계식 키보드를 샀다. 나랑 Y는 필요 없지만 갖고 있으면 기분이 좋은 물건을 ‘기부니템’이라고 부르는데, 기계식 키보드도 여지없이 기부니템에 속했다(기분템 아니다. 기부니템이다). 내겐 이미 거금 10만 원도 넘게 주고 산 매직 키보드가 있었으니까. 때문에 키보드를 사기 전에 고민을 오래 했다. ‘내가 이걸 사도 되는 거 맞나? 난 이미 개쩌는 매직 키보드가 있는데.’ 고민은 다음과 같이 이어졌다. ‘수십만 원 쓰겠다는 것도 아니고 십만 원 정도인데 괜찮지 않나?’ 

 

고민은 길었지만 앞서 밝혔다시피 결국에는 샀다. 여기에는 Y의 부추김이 한몫했다. 

 

“사고 싶으면 사. 너 너한테 돈 별로 안 쓰잖아.” 

 

그건 그래.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이었다. Y의 말대로 나는 나를 위한 소비를 적게 하는 편이다. 미니멀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기도 하고, 갖고 싶은 게 적기 때문이기도 하다. 돈을 쓸 때마다 죄책감이 든다는 것도 이유다. 남의 돈을 쓰는 것도 아닌데 죄책감을 느낀다니. 아마 걱정이 많아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한다. 걱정이 많을수록 소심해지는 법이니. 그렇게 미룬 게 어디 한두 개일까. 여행도 미루고 취미도 미루고. 심지어는 잃어버린 커플링을 다시 맞추는 것도 미뤘다. 적다 보니 조금 속상하네. 왜 좋은 일은 항상 나중을 기약해야 하는지. 


 그렇게 해서 산 키보드는 썩 만족스러웠다. 매직 키보드에 비해 높이가 높다는 것과 한글 각인이 안 되어 있다는 게 아쉽긴 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괜찮았다. 나는 얼마 써 보지도 않고 기계식 키보드 특유의 딸깍, 딸깍 하는 소리에 온 마음을 빼앗겼다. 매직 키보드를 팔고 새로운 기계식 키보드를 하나 더 사고 싶을 정도였다. 머릿속에서 Y의 놀리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역시 넌 패션 환경 운동가였어.’ 


 패션 환경 운동가라. 그건 Y가 나에 관해 쓴 에세이의 제목이기도 했다. 나를 보면 ‘환경을 위하는 나 자신’에 취해 있는 것 같다나 뭐라나. 행동보단 주둥이가 앞서 나가는 편이긴 해도 환경 운동을 패션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데… 조금 억울한 기분이다.

 

여기까지, 쓸 말도 없는데 억지로 써 봤다. 새로 산 키보드를 마구마구 써 보고 싶어서. 마구마구 쓰고 나니 기분이 좋다. 역시 기부니템이야. 한동안은 글을 열심히 쓸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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