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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하유지향 Feb 16. 2024

꽃차 우리는 시간

향기로운 주검이 겹겹이 포개어져 있다. 지나간 계절이 물기는 쏙 빼고 납작하게 눌려져 있다. 납작해진 꽃잎들이 바람에 호로록 날려갈 듯하다. 몸피도 작고 무게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멧노랑나비, 작은 주홍부전나비, 배추흰나비, 뿔나비, 오색나비의 날개 같기도 하다. 저것들은 한때 물 오른 꽃봉오리였을 것이다.


그녀가 생일 선물로 꽃차를 보내왔다. 이 골짝 저 골짝에서 딴 꽃을 씻고 말리고 펼쳐서 덖어 보낸 것이라 했다. 갓난아기주먹만 한 유리병에 산목련, 마리골드, 아까시꽃, 싸리꽃, 왕겹벚꽃이 들어 있다. 바닥에는 효능과 만든 날짜를 꼼꼼하게 손글씨로 라벨링해 놓았다. 이만저만한 정성이 아니다. 며칠 전 고맙게도 그녀는 꽃차를 맛있게 우려내는 방법에 대해서 전화로 알려주기까지 했다. 친절한 그녀의 레시피대로 차를 우려 마셔볼 참이다. 꽃차를 마실 생각에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먼저 다섯 가지 꽃차가 담긴 말간 유리병을 요리조리 살핀다. 병 안에 든 꽃잎 한 번 들여다보고 바닥에 적힌 어디 어디에 좋다는 효능 한번 읽고를 세 번째 반복하고 있다. 선뜻 어떤 것부터 맛보는 게 좋을지 선택하지 못한다. 이번에는 차례차례 뚜껑을 열고 냄새도 맡아보고 꺼내서 손바닥에 올려두고 살펴본다. 여전히 어떤 꽃차부터 먼저 마실지 망설이고 있다.


일단 물부터 끓여야겠다고 생각한다. 물을 팔팔 끓여야 하는데 물 끓일 도구가 마땅치 않다. 급한 대로 큰 머그컵을 꺼냈다. 무늬가 없는 도자기재질의 하얀색 컵에 물을 가득 부어 전자레인지에 돌린다. 삼분을 맞추어놓고 수납장 세 번째 선반 두 번째 줄에 놓인 일인용 티팟을 꺼내기 위해 까치발을 세운다. 유리병 속 꽃차가 놓인 식탁 위에 티팟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는다. 어느새 맨 앞에 있는 유리병뚜껑을 돌려 붉으면서 샛노란 마리골드 세 송이를 꺼내어 일인용 티팟에 넣고 만다.


물이 끓기를 기다리며 티팟 안에 든 바짝 마른 꽃송이를 바라본다. 이제 그녀도 나도 물기는 빠지고 납작해져서 지난 계절의 마른 꽃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꽃은 유혹의 기관이라는데, 눈 쌓인 계절 피었다가 절정의 순간 통꽃으로 툭툭 떨어지는 동백꽃처럼 꽃들은 죽음을 택함으로써 새 생명을 얻는다는데…. 삐삐거리며 전자레인지가 보내는 신호에 모퉁이를 돌던 생각이 주춤한다.


뜨거운 물속에서 마리골드꽃잎이 한 겹 몸을 펼친다. 마른 몸 안에 꼭 움켜쥐었을 지난 시간도 펼치고 있다. 식탁 위로 가벼운 바람 몇 줄기 분다. 햇볕 몇 줌 쏟아진다. 보슬비 몇 방울 떨어진다. 떠나보냈던 봄과 마주하고 앉았다. 온기 속에서 다시 피어나는 꽃송이들. 이미 떠나간 그 무엇들이 다시 올 수도 있겠다는 기대가 뜨거운 물속에서 녹는다.


은은하게 퍼지는 향기에 파마기 없는 단발머리에 까만 옷을 즐겨 입던 그녀가 따라 나온다. 어딘지 모르게 풋내기 신입생티가 나지 않던 그녀는 나보다 두 살 위였다. 우리는 자주 학교후문 떡볶이집에서 즉석떡볶이를 먹으며 깔깔댔다. 동전을 딸랑거리며 한동안 게임에 빠져 지냈고 아주 가끔 얇은 주머니를 탈탈 털어 닭갈비를 먹으며 봄은 지나갔다. 다음 해 봄 그녀는 연애 중이었고  즐겨 입던 까만 옷도 벗어버렸다.


몇 번의 봄이 왔다가는 동안 우리는 졸업을 했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녀는 바닷가 남자와 결혼도 했다. 산골여자였던 그녀는 바닷가의 변덕스러운 날씨에 심하게 멀미를 하면서도 다음 해에는 토끼 같은 아이도 낳았다. 그 후로도 여전히 봄멀미를 달고 살던 그녀는 소녀 같은 단발머리로 어느 날 남편을 따라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버렸다. 떠나기 전 그녀는 말로만 듣던 동토의 땅 러시아에서 겪게 될 매서운 추위에 대해 걱정을 풀어놓으며 가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관절마다 시큰거리는 산후풍을 떨쳐내지 못해 한국에서도 늘 전기매트를 달고 살던 그녀였다.


몇 년 후 그녀가 파마머리를 하고 나타났다.  파마를 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는다는 수줍은 고백을 꺼내놓았다. 단발에 파마기가 얹힌 헤어스타일도 제법 잘 어울리는 그녀는 자격증부자가 되어 있었다. 요리 자격증을 종류별로 땄고 바리스타 자격증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거기에 더해 플로리스트 자격증까지 가지고 있다며 웃었다. 무엇이든 배우기에 열심이던 그녀는 꽃차를 배우러 다닌다고  했었다.


티팟 안에 노을이 든다. 연한 노란빛에서 샛노랗게 색을 더하는 중이다. 뜨거웠던 물이 온도를 나누어 노을빛 따뜻한 마리골드 꽃을 다시 피운다. 기다리는 시간마저 달콤하다. 한 모금 입안에 머금고 있으니 꽃송이가 꼭 품고 있던 그녀의 봄이 혀의 미각돌기 위에서 부드럽게 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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