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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하유지향 Jul 17. 2024

어느 여름, 골방은

어두컴컴하고 서늘한 기운이 돌았다.

혼자만의 공간을 갖고 싶었다. 온 식구가 한방에서 다 같이 살던 시절이었다. 나는 자주 골방으로 숨어들었다. 해가 잘 들지 않으며 맞바람이 시원하게 드나들던 골방은 얼음자리를 깔아놓은 것처럼 시원했다. 낮잠에 빠져들기 알맞춤한 공간이었다.

비키니 옷장에서는 철 지난 옷들이 나프탈렌 냄새를 맡으며 더위를 피하고 추위를 견뎠다. 쿰쿰한 곰팡내가 나던 골방은 전성기가 지난 것들의 집합소가 되었다. 하나둘 쓸모를 다한 물건들이 골방으로 모여들었다. 그중에는 마루에서 터줏대감 노릇을 하던 찬장도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오래된 찬장은 생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지만 여전히 반질거렸다. 짙은 갈색빛이 도는 외모는 멋스러웠다. 지블링 패턴이 들어간 고급스러운 재질의 코트를 걸쳐 입은 여인이 연상되는 외관이었다. 한때는 멋쟁이라는 소리깨나 들었음직했다. 굴곡이 들어간 유리문을 달고 화려한 꽃무늬 접시며 찻잔이며 그릇들이 들어차 있을 때는 대청마루 한가운데서 어깨 펴고 서 있었을 것이다.

귀한 손님이 들면 누구보다 먼저 나서서 극진한 대접을 하던 화양연화 시절을 뒤로 한채 골방으로 귀양 보내진 신세가 되었다. 퇴물취급을 당하며 골방으로 옮겨진 것도 서러운데 잘 쓰지 않는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품으며 한동안 풀이 죽어지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세계문학전집 세트도 골방으로 들어왔다. 온갖 잡동사니 물건들로 채워졌던 찬장은 금색 제목이 새겨진 을유문화사 세계문학전집을 품고 책장으로 변신했다.

여름방학은 길었고 심심했고 더위에 나른했다. 골방을 아지트 삼아 드나들며 퇴물이 된 물건들 사이에서 나는 찬장 유리문을 수시로 여닫으며 금박으로 새겨진 책 제목에 익숙해졌다.

치열했던 현장에서 물러난 이들의 이야기가 낮게 깔려 있던 그곳에서 어느 날은 이룰 수 없는 상상의 나래를 폈고 어떤 날은 마음에 드는 책을 꺼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 내려가다 낮잠에 빠져들기도 했다. 그해 여름방학 골방에서 나는 젊은 베르테르를 만났었고 찬장 안에서 여자의 일생을 엿보며 보냈다.

골방은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던 이들과 혼자가 되고 싶었던 나의 안식처가 되어주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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